[17매]
<첫 한 줄>
어느 순간부터 헌혈을 안 하기 시작했다.
헌혈을 처음 한 것은 내 기억에 군대였다.
그때는 작은 보상이 탐나 낯선 냄새가 나는 그 버스 앞에 줄을 섰다. 손가락을 찔러 혈액형을 확인하고, 두꺼운 바늘을 팔뚝에 꽂을 때는 조금 두렵기도 했다. 그래도 워낙 건강하고 신진대사가 빨라서인지 400ml를 빼는 것은 금방이었다. 남보다 늦게 들어가서 먼저 나왔던 기억이 있다. 한 손으로 초코파이를 우적우적 씹으며, 다른 손에는 손바닥 반만 한 조금 빳빳한 종이를 쥐고 말이다. 처음 받아본 헌혈증은 왠지 묘한 느낌을 줬다. 좁은 윗부분이 파랗고, 아래 넓게 하얀 배경 위로 여러 정보가 적혀있는 종이. 내 피를 내어주고받은 종이이자 훗날 남을 피를 받을 수 있는 증서. 동전을 저금통에 넣듯, 지폐를 통장에 입금하듯, 저축한다는 느낌이 왠지 든든했다.
이후 이십 대 내내, 헌혈을 할 수 있는 기간이 되면 거의 빼먹지 않고 주기적으로 헌혈을 했다. 친절하게도 두어 달이 지나면 혈액관리본부에서 잊지 말라고 문자도 보내줬으니까. 그러다 보니 어느덧, 명함 지갑에는 수십 장의 헌혈증이 쌓였다. 이것을 전부 피로 바꿀 일은 없겠지. 살다가 수혈이 필요할 만큼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겠으나 피가 이렇게까지 많이 필요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사고를 자주 당해서도 안 되고. 서른아홉인 지금까지도 나는 큰 사고 없이 자라왔다. 조심조심 곱게 자라온 편도 아닌데 입원을 한 적도 없고, 뼈가 부러진 적도 없다. 크든 작든 수술을 한 경험은 초등학교 때 포경수술밖에 없었다. 물론 운이 좋아서였겠지.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고, 또 나이가 먹을수록 병원과 멀리하기도 점점 어려워지겠지만.
다만 당시 나는 아직 이십 대였고, 중요한 것은 헌혈증이 십 수 장 쌓였을 때부터, 이제부터는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이 증서가 더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이미 가진 것도 충분하고, 앞으로도 종종 한다고 치면 오히려 넘칠 테니. 그럼에도 다시 헌혈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됐다는 문자를 받으면 습관처럼 하러 갔다. 필요성에서 벗어났음에도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에 기여를 하는 방식이 하나 더 늘었다는 만족감 때문이었다. 결국 자기만족이다. 내게는 이제 별로 소중하지 않은 이 작은 헌혈증이라도 어느 순간의 누군가에게는 천금만큼 절실하고 절박할 수도 있으니까. 헌혈을 자주 해서 내가 직접적으로 피해나 타격을 입는다는 체감이 있었으면 모르겠으나 그러지도 않았으니까. 이십 대가 뭐 그렇듯이. 그렇다고 헌혈하고 받는 보상이 좋다고 체감하지도 못했다. 피를 주면 고작 과자와 주스를 우물거리다가 로션 세트든 영화 티켓이든 들고 나오는 것은 내 기준에는 턱없이 미미한 교환비였으니. 그래도 사회에, 당장 절박한 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만족감을 가진 채 헌혈의집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마치 무 자르듯 헌혈을 하지 않았다. 언제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도중에 혈액 관리와 취급에 대한 몇 차례 뉴스가 있고 난 후였다. 이 시기는 조금 더 정확하게 지적해야겠다. 정확히는 그런 뉴스를 접한 후가 아니었다. 그 뉴스를 접하고 나서, 이후 그에 반대되는 뉴스를 접하지 못했을 즈음부터 나는 헌혈을 하지 않았다. 어느 센가 더 이상 헌혈의 효능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중에 몇 차례 사고가 났다고 해서 헌혈과 수혈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도 아니다. 지금도 피가 모자라 경각을 다투는 생명은 여전히 있고, 피를 살 돈이 부족하여 전전긍긍하는 보호자도 있을 것이다. 다만, 현실에 여전히 멀쩡히 존재하는 그 모든 일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누구나 알듯 피라는 물건은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없다. 그러니 기간 내에 사용되지 않으면 (적법한 과정을 거쳐) 폐기될 것이다. 어딘가 사용처가 있다면 버릴 바에 (너무 싸지 않은 적정 가격으로) 판매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지만) 헌혈 과정 중에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다. 헌혈을 독려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과한) 경제 상품이 곁들릴 수도 있다. (그러면 안 되지만) 헌혈증이 누락될 수도 있고, 필요한 이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제도를 만든 이도, 그 제도도, 제도를 시행하는 이도 모두 완벽하지 않으니 괄호 안에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과정 중에 누군가 본의 아니게 실수할 수 있고, 아직 사례가 없어서 구멍이 있을 수도 있다. 여럿이 모인 집단이니 그중 누군가는 나쁜 마음을 먹고 제도와 체계의 허점을 노려 삿된 이익을 추구하려 할 수도 있다.
다만, 그런 일이 생겼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사건과 사고로 인해 신뢰를 잃고 멀리하는 이에게 대대적으로 알리는 일이다. 불완전한 제도 하에서 삿된 이익을 추구한 이가 어떻게 처벌받았는지, 그리고 그 사건사고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떤 수정과 보완을 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는 개선된 체계로 어떻게 운용하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알리는 일. 말 그대로 신뢰 회복 캠페인이든 공익광고든 하다못해 인터넷 밈으로 만들든 말이다. 과한 요구가 아니다. 헌혈을 하라고 참여와 독려는 그렇게 홍보했으니까. 그보다 더 하지는 않아도 그보다 소극적으로 해서는 안 되지.
신뢰를 잃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헌혈은 생명을 살립니다’라는 이성적 사실이 아니다. ‘피가 부족합니다 제발 도와주세요’라는 감정적 호소도 아니다. 그 중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연결고리가 빠져있다. 바로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여러 법안 발의와 제도 보완을 통해 이제 그런 일이 없도록 개선하였습니다’라는, 다시 신뢰를 쌓도록 설득하는 과정인 정서적 설명이 없다. 그러니 여전히 사람은 다쳐서 피가 필요하고 그 피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이성이든 감정이든 현실로 닿지 않는 것이다. 중간에 그들을 이어 줄 ‘체감’이라는 정서가 빠졌으니까.
그런 일이 있으니 당연히 누군가는 문제제기를 했겠지. 그러면 법안 발의도 됐겠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수정과 보완도 했겠지. 근데 나는 매일 보건복지부나 적십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어떤 법안이 발의되고 개선이 이뤄졌는지 찾아보는 사람은 아니니까. 애당초 헌혈을 처음 시작할 때도, 꾸준히 이어갈 때도 내가 얻은 헌혈에 대한 정보는 ‘찾아야만 나오는 정보’가 아니라 ‘찾지 않아도 보이는 정보’였으니까. 헌혈을 하라고 할 때는 광고와 캠페인으로 홍보를 했으면서, 신뢰를 되찾기 위해 보완한 내용은 직접 찾아보라니. 피를 거의 공짜로 달라는 입장치고는 너무 과한 요구로 보인다.
헌혈을 그만둔 이유도 그래서였다. 잘못되었다는 소식만 듣고 고쳤다는 후문을 듣지 못했으니. 그래서 여전히 피가 부족한 사회임에도 더는 헌혈에 대한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부디 이 사회에 사는 이들 중에 나만 이랬으면 좋겠다만… 글쎄, 과연 어떨까.
<한 줄 요약>
참여보다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하는 것은 보완이다.
25. 0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