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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과 요청

[31매]

by 이한얼






저녁을 먹은 후 22시쯤 사전을 읽으려고 소파에 앉았다. 갓 두어 개나 읽었을까, 웬 카톡이 왔다. 누구지? 이 시간에 연락할 만한 지인은 없는데. 확인해 보니 모르는 이다. <문학과 관련된 어느 곳(가칭)>에서 '자신들이 선정한 명작'에 내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몇 초쯤 멍했다. 최근 내가 어디에 뭘 보낸 것도 없고, 공모한 적도 없는데 웬?


근데 가끔 이런 일이 있기는 있다. 내가 어딘가 발표한 작품을 누군가 보고, 이번에 내는 모음집에 작품을 싣고 싶다고 연락이 오는 경우가. 내가 작품을 처음 보냈던 <더 수필>도 그런 식이었다. 어느 출판사에서 이번에 내는 수필 무크지에 내 등단작을 싣고 싶다고 요청해서 그때는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결정이 이후 내 작품 활동의 시작이기도 했고.


이번에도 그런 건가. 근데 그런 것치고 ‘축하드립니다 선정되었습니다’는 꽤… 묘한 어감의 말이다. 내가 먼저 투고를 했다면 지극히 합당한 말일 것이다. 또는 제작자와 창작자를 권위의 저울에 올렸을 때 한쪽으로 많이 기운다면 뭐 쓸 수는 있는 말이다. 근데 글쎄… 발신자가 속한 이곳의 권위가 이 정도로 높았나. 공모도 안 한 초면인 창작자에게 ‘축하한다 선정되었다’고, 낮도 아닌 밤에, 전화도 아닌 카톡으로 통보할 만큼. 내가 문단 소식에 어두운 편이기는 하지만 지금 6년째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음에도 처음이다.


예전 <더 수필>측에서 연락이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심사위원에 유명한 원로 수필가 분들도 많이 계셨고, 나를 뽑은 선생님께서도 현직 수필가이자 편집장까지 맡을 정도로 업계에서 유명인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이제 갓 등단한 애기 수필가였고, 출신 또한 적자나 장자는커녕 서자나 얼자조차 아닌, 말하자면 변방 오랑캐 출신이었다. 나는 문창과 출신도 아니고, 유명한 스승에게 사사 받은 것도 아니고, 어느 문인회 하나 가입하지 않은 채 골방에서 글만 쓰던 서울촌놈이었으니까. 그러니 계림 내에서는 상대적 권위와 위치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에도 밤에 카톡이 아니라, 낮 열 시에 출판사 대표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다. 시간대, 전화를 건 상대의 위치, 그리고 특정 작품을 싣고 싶다는 정중한 요청까지, 이 세 가지가 맞아떨어졌으니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나도 괜찮겠다 싶었고.


그래서 우선 22시라는 시간대. 대뜸 본문뿐인 카톡 하나.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이미 기발표한 작품을 작품집에 포함하고 싶다는 내용이 아니라 그냥 작품 하나를 보내면서 동시에 후원금 10만원을 함께 보내달라는 내용까지. 그쯤 읽었을 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스마트폰을 일단 내려놓았다. 이미 결론이 지어졌지만, 그럼에도 한동안 속이 알싸했다.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다. 어떤 글을 보다보면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왜 아직 무명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잦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많은 만큼,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다. 어린 사람도 있고, 젊은 사람도 있다. 다른 일을 하며 쓰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하던 일에서 은퇴하고 쓰고자 하는 이도 있다. 가볍게 쓰는 이도, 진지하게 쓰는 이도, 드러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음에도 터져 나오는 이도, 스스로 드러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보이는 이도 있다. 다만 어딘가에 글을 보이고 싶어 하는 이보다 그 ‘어딘가’가 턱없이 적을 뿐이다. 어느 신문에 작품을 싣거나, 문예지에 원고를 싣거나, 혹은 책을 내거나 하는 등, ‘타인의 요청을 받아’ 글을 드러낼 만한 공간은 글을 쓰고자 하는 이에 비해 더없이 부족할 뿐이다.


물론 요즘은 참 다양한 방법이 생겼다. 독립출판과 자비출판도 더 이상 낯설지 않고, 클라우드 펀딩이나 지자체 창작 지원도 있고, 브런치든 밀리든 글을 올리는 플랫폼 또한 다양해졌다. 그도 아니라면 개인 블로그와 SNS까지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간이 적다. 모든 글쓴이에게 그렇지는 않겠지만, 일정 이상 나이가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예전 방식이 익숙하고, 예전부터 인정하던 가치에 먼저 손이 갈 법 하고, 요즘 다양한 경로에 대해 몰라서가 아니라 익숙하지 않아 접근하지 않는 이에게는 더 그럴 것이다. 글이 쓰고 싶다. 근데 쓴 글을 내보일 곳이 없다. 원고 청탁이든, 출간 제안이든, 그 자리와 기회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아마 이 부분은 나이대에 따라 체감이 많이 다를 듯하다. 특히 태어나 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이미 세상이 일정 이상 ‘디지털화’ 되어 있던 세대와, 일정 나이까지 자라는 동안 여전히 아날로그였던 세대는 이에 대한 체감이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내가 속한 이쪽 업계, 나 다음 막내를 찾으려면 열 살 터울이 올라갈 만큼 고연령대가 많은 수필 업계는 더 그렇다. 처음 글을 쓰고자 마음먹었을 때 인터넷도 블로그도 SNS도 무엇 하나 없는 시절이었다면, 당시에는 오직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지 않으면 어디 가서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일 때부터 쓰기 시작한 분이라면 더욱.


영세한 출판사나 문예기관은 월간이든 계간이든 문예지를 출간하는 것이 꽤 부담이 되는 듯하다. 영세할수록, 정부에서 지원이 줄어들수록 더 그럴 것 같다. 그럴 때 양쪽의 필요는 은근히 잘 맞아 떨어진다. 출간 비용 일부를 지원받고 싶은 제작사와 약간의 지출이 있더라도 세상에 글을 내보이고 싶은 창작자. 한쪽은 부족한 자금을 지원 받으면서 자리를 원하는 이에게 그 자리를 만들어주는 공급자이자 수요자가 된다. 다른 한쪽은 홀로 한 권을 모두 채우기에는 아직 스스로 인준한 작품수가 모자라거나 또는 그 과정이 험난하여 망설여지지만, 여러 명의 작품을 모은 이런 작품집에 내 작품 한 개를 실어 보내서 그 결과물이 종이책이라는 실물로 세상에 등장하는 일은 기꺼이 내키는 수요자면서 동시에 수요자가 된다. 그러니, 단언컨대 이 일련의 수요공급의 합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모두에게 이로운 상생이니까. 한쪽은 자금을 지원 받으며 문예지 운영을 이어갈 수 있고, 다른 쪽은 약간의 지출이 있을지언정 그보다 큰 만족감으로 실물 책을 받아볼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만약 이 과정에서 어떤 ‘미묘한 속쓰림’을 느꼈다면 그 출처는 이 상성 과정 자체가 아니다. 아마 과정이 진행되는 도중에 느껴지는 아주 은근하고 모호한 어감 차이 때문일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글을 쓰는 일’은 내게는 꿈이다. 정확히는 꿈을 이루기 위해 과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을 어떤 매개체를 통해 진행할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나는 글을 선택했다. 물론 우연이라고 본다. <어쩌다 작가가 된 어느 사상가>에 적었듯이 당시 내 손에 가장 먼저 잡힌 것이 붓도, 피크도, 조각칼도 아닌 연필이었으니까. 그리고 ‘글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은 꿈이 아닌 소망이다. 이 역시 소망 그 자체라고 할 수 없다. 소망을 이루는 과정에서 필요한 단계에 적합하다. 어쨌든 이 ‘글쓰기’와 ‘출사’가 내 꿈과 소망에 연결되어 있다면 내게는 꽤 간절할 것이다. 글을 쓰는 일도, 글을 드러낼 수 있는 자리도,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기회조차도. 그 간곡함에 매매의 시장가와 매물의 개인가에 차이가 날 만큼. 너무나도 운이 좋게 나는 여러 방면으로 그 자리와 기회를 받았지만 만약 내가 운이 지금보다 약간이라도 좋지 않았더라면? 스스로 ‘꽤 좋은 글을 쓰고 있다’고 자부함에도 도통 어디 드러낼 자리와 기회가 여적 없었다면?




누군가 내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꿈과 소망을 돈으로 맞바꿀 수 있는가?’라고 물어보면 나는 ‘도대체 왜 안 돼?’라고 답할 것이다. ‘후원금 명목으로라도 출간 비용 일부를 내면 내 작품을 실어준다고? 다른 사람 작품과 함께 실리니 나만의 책은 아니어서 조금 아쉽지만 뭐 어때? 그렇게 자리와 기회가 생기는데? 스스로 좋은 작품이라 생각하고, 정말 그렇다면 그렇게라도 일단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훨씬 이득 아니야? 이게 자비출판이나, 일인 출판사를 세워 독립출판 하는 것과 구조적으로 뭐가 달라? 비용이 큰지 작은지, 거기에 드는 작품 수가 많은지 적은지 차이뿐이잖아.’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함에도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하여, 나는 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체제 안에서는 꿈도, 소망도, 하물며 노동력으로 대표되는 몸도, 발상으로 대표되는 생각도, 그리고 시간과 사랑마저 자본의 근원, 즉 돈과 교환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것이 좋고 옳아서가 아니다. 옳고 그름이야 정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최소한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라고, ‘그렇 수 있다’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렇게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는 거의 모든 것을 돈과 바꿔 팔거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과정이 더없이 조심스러워야 한다. 다들 원래라면 사거나 팔고 싶지 않은 것을 체제와 욕망에 맞춰 교환하는 중이니까.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래야 다른 것을 얻거나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않는다 여기기에 그러는 것이니까. 그러니 쉽게 사고 팔 수 없다고 여겨지는 매물일수록, 그것을 매매하는 데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느껴질 만큼 미묘한 거래일수록, 그 제안과 과정은 더없이 조심스러워야 한다. 제안할 때는 필요 이상으로 상대를 충분히 존중(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고, 그 과정은 일정 이하로 개저분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면 바로 곁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옆 탁자에서는 오히려 돈을 주면서 원고 청탁을 하는 모습이 뻔히 보이는데, 이 탁자에서는 돈을 내면서 ‘원고 청탁’을 청탁하라고 하는 중이니까.


매매의 가치는 매물의 가격과 비례한다. 비싼 물건이면 비싼 가격을 받는 것이 자본주의에서 합당하다. 다만, 매물의 가치는 매매의 가격과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싼 가격으로 사고판다고 해서 그 매물이 반드시 싸지는 않다는 뜻이다. 아무리 자본주의라 한들, 오히려 공산주의가 아니기에 그것마저 일치될 수는 없다. 3만원에 팔았다고 내 글이 나에게 고작 3만원짜리가 아니듯이. 필요에 의해 도로 10만원을 내며 원고를 보낸다고 이 원고가 -10만원, 세상에 오히려 해를 끼치는 물건이 아니듯이. 누군가의 정념과 욕망이 서려있는 물건이라면 매매가와 매물가는 항상 같을 수는 없다. 그 매물이 구체화된 물건이 아니라 추상적인 생각이라면 더 그렇다. 그러니 그 과정이나마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럴 마음이 없어도 상대를 존중하는 척 하고, 그런 생각이 없어도 귀한 물건을 싸게 산 척 너스레를 떨어야 한다. 파는 이도 부족한 물건이라며 머리를 조아리고. 좋은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대우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자본주의 하에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파는 이 과정에서 덜 상처받을 수 있다. 감정적인 억심이 아니라, 이성적인 이득에 집중하며 시장경제의 이 '기묘한 감각'을 뭉뚱그릴 수 있다.




나는 금세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카톡 답장을 보냈다. ‘좋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하다, 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원고 청탁은 정중히 사양하겠다, 다시 한 번 감사하다’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결국 나처럼 거절 카톡을 보내기까지 오래 번민할지도 모른다. 또 다른 누군가는, 다음날까지 이어진 고민 끝에 후원금과 원고를 함께 보낸 후에 왠지 씁쓸해진 마음을 달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 다른 이는, ‘좋게 생각하자’며 선뜻 돈으로 그 자리를 샀을 수도 있고. 반대로 어떤 이는 '오! 이런 제안이 올 만큼 문단에 내 번호가 제법 돌아다니나 본데! ㅋㅋ'라며 가벼운 웃음으로 넘길 수도 있다. 다만 그 어느 누가 되었든, 공모도 하지 않았고 사정도 모른 상태에서 갑자기 도착한 ‘축하합니다’라는 글귀를 보고 과연 존중받았다고 느꼈을까. ‘선정되었습니다’라는 통보를 보며 ‘억! 개꿀!’이라며 기뻐했을까.


만약 내가 어제 받은 내용이 <이번에 이런 취지로 작품집을 만들고자 한다. 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출간비용이 부족하다. 작가님께서 후원금과 원고로 한손 거들어준다면 기쁠 것 같다. 제안을 드리니 검토해달라>라는 ‘요청’이었다면 어땠을까. 밤 22시가 아니라 오전 열 시쯤이었으면 또 어땠을까. 카톡 말풍선 하나가 아니라 2분쯤 걸린 정중한 통화였다면 또 어땠을까. 그럼 어쩌면 후원금과 원고 한 편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나는 '글 자리를 산다'고 느끼지 않고, 문단의 일원으로서 '문단 발전에 일조한다'고 여겼을 지도 모르겠다. 뭐든 최소한, ‘축하합니다! 선정되었습니다!’를 본 순간만큼 마음이 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알싸함은 내가 무시당했다고 느껴서가 아니다. 이 카톡을 받은 어느 누군가는 이 문구를 보고도 고민하고 있을 테니까. 누군가의 인생이자 역사 자체인 글이 허름한 좌판 위에 올라가 있는 듯한 그 모습이 조금 속상했다.






2025.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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