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 할 말을 하고 살아야 해 [30매]
1.
“난 솔직한 성격이야. 답답한 거 못 참아.”
“난 기가 센 사람이라,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해. 아니면 속에서 병 나.”
이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주변에도 종종 보이고, 모니터를 통해 연예인 중에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근데,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지레’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내 기준에 정말 <솔직한 사람>이나 <기 센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은 서로를 알지 못함에도 마치 그들끼리 그러기로 담합한 것처럼 <무례한 사람>이거나 <배려 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불의한 사람>이었다. 내 기준에 정말 <솔직하거나 기가 센> 사람은 굳이 저런 말을 하지 않는다. 저런 말을 할 필요도 없고, 그럴 상황 자체도 잘 없다. 그들은 스스로 표명하지 않아도 자신이 그러함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고, 주변에서도 그것을 이미 마음으로 인정하고 있으니까.
2.
모든 것은 <인간의 조건>에서 시작된다.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 인준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 조건. 바로 <시비>와 <공감>과 <이성>이다.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이가 아니라면 집단 속에서 사회를 이루어서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중일 것이다. 각자 미묘하게 다른 환경과 상황, 교육과 기치, 형질과 성향에 의해 모두는 생각이 다르다. 그에 따라 가치관도, 도덕률도 다르다. 그렇게 천차만별인 사람의 개성을 모두 100% 인정해주면 우리는 구조적으로 사회를 이룰 수 없기에 <합의의 역사>를 통해 최소한의 부분만 천편일률적으로 통일시켜야 했다. 그 통일된 부분이 옳고 그름의 경계, 즉 <시비>다. 그리고 최소한의 통일을 유일한 합법적 폭력인 공권력 하에 강제한 것, 그것이 <법>이고. 물론 시비는 법보다 범위가 넓다. 법뿐만 아니라 상당 부분의 도덕률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렇기에 법조문을 대하듯 딱 잘라 경계를 나눌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비슷한 배경과 교육을 통해 대다수가 합의할 수준의 시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첫 번째.
두 번째는 거울 뉴런의 통제를 받아 얼마나 상대에게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지, <공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대 입장을 상상하고, 고려하고,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다. 이해와 동감은 차후의 문제라고 쳐도 공감까지는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또 그래야 한다. 이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없다시피 한 드문 이를 우리는 <싸이코패스>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분류하고 배척하기까지 하니까. 이것이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는 논리, 합리, 당위, 지식 등을 총괄하는 <이성>이다. 즉, 상대를 대할 때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어떤 일관된 논리 체계를 통해, 서로 동의할 수준의 합리와 당위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이 부분이 뛰어나면 영역을 뛰어넘어 여러 방면에서 활약할 수 있고, 반대로 이 부분이 너무 떨어지면 사실 <사람 말을 할 수 있는 짐승>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예전에는 가끔 보이던, 디지털 기술이 발전될수록 모르고 지나갈 법한 이를 더 잘 발견하게 돼서 요즘에는 훨씬 자주 보이는, 그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러고 살지?’에서 <저 사람>을 맡고 있는 이처럼. 여기까지가 세 번째로, 이 세 가지를 일정 수준 이상 가지고 있어야 생물로 태어난 짐승은 스스로를 인간임을 주장할 수 있다.
3.
그러면 짐승으로 태어난 생물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이때 내가 주로 사용하는 이론은 <지능투자론>이다. 즉, 생물에게는 주어진 지능 수치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선천적 지능 수치, 다른 하나는 후천적 지능 수치다. 전자는 유전자 영역에 속해 태어나면서 가지고 태어난 것이고, 후자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변환하여 연성한 것이다. 그래서 각각은 자신(그리고 가까운 주변)의 의지에 따라 그 수치를 흘러가는 시간에 맞춰서 원하는 분야에 투자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투자 분야를 세분화하자면 끝도 없을 만큼 다양하지만 가장 커다랗게 묶는다면 세 가지 대분류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조건>에 나온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시비, 공감, 이성이다. 즉, 나는 태어나면서 이미 가지고 있던 점수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얻어낸 점수를 가지고 시비와 공감과 이성에 각각 몇 점씩 투자를 할 것인지. 짐승이 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을 개괄적 도식으로 표현한다면 하나의 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다. 그 점수는 지능 수치고, 어디에 많이 투자했느냐에 따라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가 정해진다. 물론 <어떤 개성을 가진 인간인지>가 아니다. 개개인의 특성과 개성을 결정짓는 것은 <인간의 인간적 조건>인 시비, 공감, 이성이 아니라 <인간의 개별적 조건>인 시비, 가부, 호불호니까.
어쨌든 그래서 인간은 살면서 각자가 내키는 대로 시비와 공감과 이성에 자유롭게 투자한다. 대부분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균등하게 분배한다. 그래서 서로 비슷해 보이고, 또 그런 비슷함에서 안정감을 얻는다. 그런 공통적 속성과 취향이 모여 상식과 대중성을 만들기도 하고. 허나 와중에는 어느 한쪽에 조금 과한, 때로는 너무 과하게 <몰이투자>를 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 유형이 있겠지만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유형은 <암기 몰빵>형이다. 시비와 공감과 이성에 분활 투자하지 않고 이성, 그 안의 여러 소분류 중에서도 지식과 암기에만 거의 모든 지능 수치를 투자한 사람. 이런 유형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장소는 아무래도 뉴스다. 당장 TV를 틀면 그런 시비가 모호하고, 공감도 못 하는 이가 많이 배운 것이 똑똑함이라며 색만 다를 뿐 같은 무늬의 넥타이를 매고 있다. 그 색이 따라 검사네, 국회의원이네, 대법관이네 거드름을 피울 뿐이다. 그런 이의 지능 그래프를 보면 어느 한 수치, 지식과 암기만 독보적으로 높을 뿐 나머지는 자글자글 바닥을 기고 있다.
4.
여기서 이야기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줏대 있는 사람>이 등장한다. 여기서 내가 정의한 <줏대론>의 줏대는 사전적 풀이의 2번, 즉 ‘자기의 처지나 생각을 꿋꿋이 지키고 내세우는 기질이나 기풍'의 의미다. 이런 줏대는 누구에게나 있다. 단지 정도가 강한지 약한지의 차이뿐이다. 그러면 어떤 인간이 이런 줏대가 강한가. 간단히 말해서 <정리>, <정립>, <정의>, 이 <세 가지 정>을 많이 한 인간일수록 줏대가 강해진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 <삼정>하는가. 여기서 내내 등장하지 않았던 <인간의 개별적 조건>이 필요하다.
줏대는 시비, 공감, 이성이라는 <인간의 인간적 조건>에서 오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인간임을 증명해줄 뿐이지 어떤 인간인지를 알려줄 수는 없으니까. 일종의 내용물이 아닌 체계,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 쪽이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드러내는 것은 무엇을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는지의 시비, 나는 무엇이 괜찮고 안 괜찮은지 또는 되고 안 되는지의 가부, 그리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의 호불호다. 이에 대한 정리와 정립과 정의를 많이 끝낸 사람일수록 줏대는 강해진다. 내가 살아가며 받아들이는 외부입력은 보통 온갖 가치와 섭리와 개념과 의지와 욕망이 서로 난잡하게 뒤엉켜있는, 마치 꼬인 실타래 같은 모습이다. 이것을 두고 얼마나 하나하나 해체하고 분류하여 <정리>하는지, 그 낱낱의 요소를 내 기준에 맞게 체계를 갖춰 쌓아올리며 <정립>하는지, 그리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 완성된 그 결정 구조를 내 스스로 무엇이라 인지하고 명명하여 다시 세상으로 출력하는 일로 <정의>할 것인지. 이 과정을 얼마나 다양하게, 오래, 여러 번을 거쳤느냐에 따라 줏대의 강도가 결정된다.
5.
줏대가 강한 사람, 보통말로는 <줏대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생각보다 꽤 빨리 만들어진다. 보통 성인도 되기 전에. 왜냐면 이때 만들어지는 것은 <줏대 있는 사람-초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줏대 있는 사람-초판>은 이후 시간과 경험을 쌓아가며 <줏대 있는 사람-완성판>으로 진화한다. 그 진화의 분류를 크게 나누면 총 네 가지다. 공감 지능 수치가 부족한 <배려 없는 사람>, 이성 지능 수치가 부족한 <무례한 사람>, 시비 지능 수치가 부족한 <불의한 사람>이다.
<지능투자론>과 <줏대론>은 큰 맥락에서 <인간의 조건>이라는 같은 유개념으로 둔 종개념들, 즉 대위개념 관계다. 앞서 말했듯 지능 수치를 어디에 투자했는지에 따라 내 줏대가 어떻게 강해지는지 결정된다.
줏대가 강한데 상황을 헤아릴 공감 지능이 부족하면 배려 없는 사람.
줏대가 강한데 할 말을 구분할 이성 지능이 부족하면 무례한 사람.
줏대가 강한데 부당을 판단할 시비 지능이 부족하면 불의한 사람.
6.
그러면 이야기는 첫줄로 돌아간다. 스스로를 솔직한 성격이라 밝히지만 사실은 답답함을 못 견딜 뿐인, 타인의 상태보다 자신의 답답함을 우선하는 사람은 <기 센 사람>이 아니라 <배려 없는 사람>일 뿐이다.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며 아무데서나 누구에게나 구분 없이 속내를 쏟아대는 사람은 <기 센 사람>이 아니라 <무례한 사람>일 뿐이다. 나는 내 기준이 있으니 그것이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끼치든 우리가 합의한 최소선에서 벗어나든 내 마음대로 해야 한다는 사람은 <기 센 사람>이 아니라 <불의한 사람>일 뿐이다. 전부 <줏대 있는 사람-완성판>의 네 가지 분류 중 어긋난 세 가지일 뿐이다. 그리고 그 분류 중 마지막 하나, 공감과 이성과 시비에 선천적 지능 수치를 고르게 투자를 했고, 이후 시간과 맞바꿔 얻은 후천적 지능 수치로 그중 그나마 부족한 부분마저 메운 사람이야 말로 정말 <기 센 사람>이 된다.
7.
즉, <기 센 사람>은 아주 높은 지능 수치를 가진 채 태어나, 스스로가 짐승이 아닌 인간임을 증명하고, 정리와 정립과 정의를 통해 줏대를 세운 다음, 후천적인 노력까지 더 해서, 세 가지 대분류 모두에 고르게 투자한 사람이다. 한 마디로 인간 의식 발달 과정 중에 가장 높고 어려운, 최고 등급의 <의식 통합 체계>를 가진 이다. 그런 이는 단순히 줏대만 강하지 않고 다른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미 완성되었거나 완성을 목전에 둔 인간이다. 그런 인간은 어디에서도 저 홀로 빛을 내며 눈길을 끈다. 주변인들 모두 그가 이제껏 쌓아온 노력의 역사를 인정하고 대우한다. 그런 이에게 가장 쓸데없는 일은, 스스로 “나 기 센 사람이야!”라고 자칭하는 일이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이미 스스로도, 주변도 그를 그리 대하고 있는데 거듭 밝힐 이유가 조금도 없으니까.
그러니 반대로, 스스로 “나 기 센 사람이야!”라는 말을 거듭 물고 사는 이가 있다면 그는 정말 그런 사람일까. 아니면 그저 배려 없거나 무례하거나 불의한 이가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제멋대로 하겠다며 주변을 향해 악을 쓰는, 시시껄렁한 엄포일까. 나는 그에 대해 판단을 마쳤다. 사람들도 모두 각자의 판단을 마쳤을 테고. 나와 같은 방식이든 다른 방식이든.
홀로 빛나지 못하는 별은 인기든 권력이든 운이든 빠져나가고 나면 하릴 없이 처량해질 것이다. 그럼 그 비명 같은 자칭이 사그라진 자리에는 어떤 허망함이 남아있을까.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할 순간에, 그럴 수 있는 부분에 지능 수치를 그만큼 투자해 놨을까. 가진 수치를 이미 다른 곳에 쏟아 넣었다면 이후 새 수치를 얻기까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텐데, 그럼 그런 상황과 맞닥뜨린 이는 그 험악하고 지난한 과정을 뒤늦게라도 거치려 할까. 아니면 틀린 것은 세상이고 너희가 멍청한 거라며 독선과 패악을 부릴까.
이때 주로 어떤 선택을 하는지도 우리는 실시간으로 보는 중이다.
25. 05.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