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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인사

요즘 무슨 생각해? [26매]

by 이한얼






평생 손바닥이 아닌 손가락과 악수를 해오는 삶이었다.


아마 내 성향 탓도 있겠지. 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나서서 감정과 속내를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다.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들을 되도록 스스로 해결하려는 사람이다. 혼자 차분히 감정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하나씩 정리하고, 그것을 글로 옮기면서 대부분의 부침을 해소한다. 그렇다고 남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비밀주의도 아니다. 누군가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내 안부에 대해 말을 나누던 중 적절한 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말을 한다. 나는 상대 안부에 대한 대답이든 내 안부에 대한 대답이든,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면 되도록 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것이 관계에서 내 의무이자 우리에 대한 존중이자 무엇보다 상대에 대한 배려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니 나는 속내를 드러내는 일을 꺼리는 사람이 아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부끄러워하는 이도 아니고. 정보를 숨기는 것이 이득이라고 여기는 편도 아니다. 그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누군가 묻는다면 내가 밝힐 수 있는 부분은 전부 드러나고, 누군가 먼저 묻지 않아도 대화의 흐름 상 이야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싶으면 자연스럽게 감정과 속내를 꺼내기도 한다.


즉, 나는 <물어야 알 수 있는 사람>이다. 묻지 않으면 거의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과도 같다. 나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런 내 성격이 익숙하지 않거나 혹은 나와 방식이 많이 다른 이는 어쩌면 내가 꽤 어렵거나 비밀스러운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이 사람은 자기 이야기는 잘 안 해. 내 이야기는 잘 들어주는데 본인 속내는 거의 밝히지 않아. 오래간만에 만나서 내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은 후에 이제 이 사람이 이야기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말도 하지 않아. 그저 내 이야기를 잘 듣고, 공감하고, 내가 더 말할 수 있게 적절하게 되묻기만 해. 그런 모습을 보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나 봐. 잘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거나. 그러다 보니 다시 내 이야기를 하게 되고, 결국 몇 시간을 만났든 거의 내 이야기만 하다가 헤어져. 내 쪽에서 나쁠 것은 없지. 나야 사건도 감정도 할 말도 늘 많은 사람이고, 이 정도로 말을 끊지 않고 편하게 잘 들어주는 사람은 귀하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것도 관계의 초반뿐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적절한 상황이거나 질문을 받으면 말을 많이 했으면 했지, 절대 적게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어느 글 쓰는 사람이 그렇듯이 혼자서 한 시간을 떠들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그런 사람임을 깨닫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성격 차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일어난 사건이나 내용 차이일 수도 있고. 하지만 무엇보다 차이를 보이는 것은, 상대가 얼마나 내 안부를 자주 묻냐에 따라 내가 어떤 성격인지 빨리 파악한다.


내가 물어야 알 수 있는 사람, 질문해야 답을 하는 사람, 적절한 상황에서만 먼저 꺼낼 뿐 평소에는 자기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은, 바꿔 말하면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내 첫마디는 항상 고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상대의 안부다. 그리고 적절한 상황이 오거나 상대가 내 안부를 묻기 전까지 내가 할 말들도 마찬가지로 상대의 안부에 대해서다. 이런 내 성격에 대해서도 상대가 먼저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으니 어쩌면 상대는 나와 꽤 오랜 시간, 자주 만나왔음에도 이 점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그냥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정착될 수도 있다. 여기까지도 나쁘지 않다. 상대가 나에 대해 여전히 모르니까. 내가 먼저 밝히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이다음부터 생긴다. 관계에 대해서 내가 가지는 절대적 규칙은 꽤나 단순하다.


1. 주고받기

2. 서로의 안부

3. 선 넘지 않기


모든 관계는 교환이다. 교환이 없는 관계는 존재할 수 없는 섭리다. 단지 비율의 문제일 뿐이다. 누군가는 무조건 1대 1로 주고받아야 하고, 누군가는 100대 1 비율이어도 어쨌든 ‘주고’와 ‘받고’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모든 관계는 양방이다. 나는 너의 안부를 물어야 하고, 너는 나의 안부를 물어야 한다. 나는 네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너는 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이 역시 비율의 문제일 뿐, 어느 한쪽만 존재해도 괜찮은 관계는 없다.


그리고 선 넘기는 뭐, 너무나 당연한 거고. ‘나머지는 우리가 서로 대화하고 합의하여 맞춰가는 거지만 이건 안 돼. 이 부분은 맞출 수 없는 부분이야’라고 명확한 그어놓은 서로의 선을 선명하게 지켜주는 것. 그럴 수 없다면 관계 자체를 포기해야 하고.


즉, 관계의 핵심은 교환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실재든 추상이든, 생각이든 감정이든, 잘못이든 용서든, ‘모든 것을 비율에 맞춰 교환하는 과정’이 관계의 정의다. 여기서 내 주변 많은 사람들이 함정에 빠졌다.


‘이 사람은 자기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 먼저 꺼내지도 않아. 그리고 매번 안부를 물을 만큼 일상이 극적으로 변하지도 않고, 비일상적인 사건이 많지도 않아 보여. 그러니 이제 슬슬 안부는 눈으로만 물어도 되지 않을까. 안 물어도 되지 않나. 지금 당장 내 할 말이 너무 급한데. 나 오늘 너무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와 나 지금 화나고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일단 이 이야기 먼저 하고, 그다음에 안부를 물어도 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내가 지금 몇 년째 이 사람을 만나서 상대의 안부를 묻지 않았음을 깨닫지 못하는 중이어도 괜찮지 않나.’


언젠가부터 상대는 점점 나에 대해 묻지 않기 시작한다. 별다른 큰 사건은 없었다고 하니까. 그러며 이 사람이 겉은 평화로운 도시풍경이지만 속에서는 매일매일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사람임을 잠시 잊게 된다. 지금 당장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겉모습에만 매몰되게 된다. 그래서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고, 나에 대해 묻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자신의 이야기로 끝나는 만남이 거듭된다.


그쯤 되면 이제, 내가 우리 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맥을 짚을 시기가 된다. 몰랐을 테니 차분하게, 오늘은 내가 먼저 할 말이 있다,라는 운으로 시작한다.


‘나는 관계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해. 근데 요즘 우리 관계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 같아. 근데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우리는 오래 보지 못할 거야.’


상대도 안다. 지금 우리 관계가 균형 잡혀 있지 않다는 것을. 내가 가진 관계론은 합리적이고, 내 주장 역시 합당하다는 것을. 성격에 따라 바로 수긍하거나, 또는 그 자리에서는 억울함을 항변하거나 해도, 결국은 알았다고 합의를 한다. 앞으로는 내 이야기만 하지 않겠다. 내 안부만 전하려고 당신을 만나러 오지 않겠다. 만나면 당신의 안부도 묻고, 당신에게 질문도 하며 당신 이야기도 듣겠다.


결과적으로, 지금 내 주변에서 일정 이상 속내를 털어놓은 수 있는 이는 넷 정도뿐이다. 지난 20년 동안 한 번 그렇게 관계의 균형이 무너진 백여 명 중에 지금까지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은 고작 두 명뿐이다. 그조차 거의 간당간당한 관계의 끈에 매달려있고. 넷 중 나머지 두 명은 애당초 26년과 25년을 알고 지내면서 단 한 번도 관계의 균형을 무너트린 적이 없다. 겉으로 늘 평온해 보이는 나를 찾아와 매번 같은 질문을 한다. 내가 누구를 만나도 똑같이 하는 그 질문들.


1. 어떻게 지냈어?

2. 별일 없었어?

3. 요즘 무슨 생각 중이야?


라고. 이제는 뻔하고 똑같아서 외울 수도 있을 법한 대답이지만 그럼에도 매번 묻는다. 왜냐면 그들은 예전부터 알았으니까.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나는 대답의 첫마디만 ‘나야 여전히 잘 지내지’라며 똑같을 뿐, 그다음 문장부터는 만나는 매 순간 늘 다른 말을 하는 이라는 것을. 그러니 그들이 여전히 내 유이한 친구들이고.


나머지는 내 입장에서는 점점 가관이 된다. 내 안부를 묻지 않는 것을 넘어 질문조차 점점 사라진다. 만나면 다짜고짜 자기 이야기부터 한다. 마치 그간 내 짐을 자신이 대신 지고 있었던 것처럼. 대뜸 전화를 걸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다. 마치 뭔가를 맡겨 놓은 빚쟁이처럼. 어떤 인사말도, 다른 소리도 없이 카톡으로 대뜸 자신의 화나 감정을 폭탄처럼 던져댄다. 마치 일상 속 사건사고에 시달리다가 마침 감정 쓰레기통을 발견한 것처럼.


그러다 보면 내가 정한 선까지 결국 넘어선다. 수많은 만남과 관계 중에 불현듯 어떤 상황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으니까. 내 기준과 자신의 충동이 상충할 때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관계에서 내가 정한 선을 넘은 이들은 대부분 나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아서도 아니고, 내 기준이 납득되지 않아서도 아니다. 단지 그 모든 것보다 지금 당장 자신의 충동이 더 크기 때문에 잠시 못 본 척할 뿐이다. 합리화할 뿐이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 역시 결국은 나를 존중하지 않은 것이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온 삶이었던 것만큼, 나는 그런 ‘내 안부를 묻지 않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왔다. 현수, <검은손>의 여정을 오래 걸어온 만큼 나는 ‘자신의 감정을 그저 내게 던질 뿐인 이들’에게 시달려왔다. 지긋지긋해서 서른쯤 대부분의 사람을 물렸음에도, 곧 마흔이 되는 시기에도 아직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그때는 그러지 않던 친구가, 지인이 마치 내가 물렸던 이들을 대신하듯 지금 그러고 있어서.


친구였던 이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말을 못 들은 지 삼 년쯤 됐다. 거의 매주 보고 있음에도. 카페에서 죽을상을 한 채 창밖을 보고 있어도 상대의 신경은 내 안색이 아니라 자신이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내게 보여주는 일에 온통 쏠려있다. 지난 십 년 동안 밤이건 새벽이건 전화해서 불러내던 어떤 동생은, 내가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우울한 기색을 띤 채 전화를 걸었더니 퇴근 직후라 피곤하다며 통화를 끊어버렸다. 오늘 눈 떴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한 카톡은 가타부타 다른 말없이, 자신이 여자친구 때문에 왜 화가 나고 답답했는지, 마치 나에게 대신 화내듯 격정적으로 써 갈긴 장문 메시지 세 개였다. 어제는 하지 말라는 행동을 세 번째 하고 있는 지인에게 ‘너는 어째서 내 기준보다 네 충동이 먼저인지’를 설명하느라 두 시간을 통화했다.


이상하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상대를 만나면 어떻게 지내니, 별일 없니, 그것을 먼저 물으며 살고 있는데, 그 당연하고 합당하고 꽤나 쉬운 안부 인사를 받는 일은 왜 이리도 어려울까.


조금 지치고 진절머리가 난다. 어쩌면 내가 전부 잘못한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2025.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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