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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달라져야 하는

그 관계에 대하여

by 이한얼






저녁에 카페 흡연실에서 짧은 통화를 했다. 이번 통화가 올해 상대와 나누는 마지막 연락이겠지. 고작 20분쯤 이었는데 전화를 마친 나는 퍽 지쳐버렸다. 주는 만큼 받는 일은 이토록 어렵구나. 기분 탓인지, 통화를 마칠 때까지 나를 걱정하거나 염려하는 기색은 느끼지 못했다. 그저 현재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 내게 전달하고 싶어서, 내 말은 단지 그 추임새쯤으로 활용하는 듯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내 말에 대해서는 되묻지 않고 '나도 그래' 또는 '나는 이래'라며 결국 자신 이야기로 돌아갔다. 지금 내 말에 관심이 없구나. 그럼 통화를 더 이어가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물론 상대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체감이나 느낌은 어느 한쪽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단지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간 너무 시달렸기 때문이겠지.

피곤하다. 사람 수를 줄여도 관계는 여전히 피곤하구나.


이제는 연인이나 배우자뿐만 아니라, 나머지 관계와 지인에 대한 이상형도 비슷해졌다. 몸과 정신이 건강한 사람. 그런 사람들과 관계 맺고 어울리며 살고 싶다. 차라리 내 심신이 건강하지 못하다며 그들에게 손절 당하고 싶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만남을 즐거워하고, 이 순간을 즐기며, 서로가 정한 선을 지키는 사람들. 나의 행복만큼 상대의 행복도 존중해주고, 만남 후에는 체력적 피곤함은 있어도 마음만큼은 피곤함 없이 말끔하기를 바란다.


내가 그동안 그대들을 너무 관대하게 대해왔나. 너무 많은 용서로 그대들의 삶을 망쳐왔나.

아니면 내가 그동안 당신들에게 너무 이기적으로 대해왔나. 너무 많은 기준으로 당신들의 언행을 제한해왔나.

당장은 무슨 수를 써도 알 수 없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된다. 그러면 기다리면 될 일이다. 내가 어느 쪽이었는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 너무 많은 기회를 주지 말자. 남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기대하며 화내고 설명한 후 기다리기보다, 그냥 웃으면서 거리를 벌리자. 부족한 시간과 귀한 기대는 변화의 조짐을 드러나는 이에게만 한정하자. 그러기만 해도 대상은 많고 내 삶은 짧다.


몸 상태가 아직까지 좋지 않다. 어제 <안부인사>를 올린 직후부터 식은땀이 나고 두통이 심하더니 오늘까지 이어졌다. 손떨림과 식은땀은 사라졌지만 두통은 약간 차도만 있을 뿐 여전히 안구 뒤쪽에 머물러 있다. 심적 여파가 컸나 보다. 이제 심상이 육체에 영향을 주는 일에 꽤 튼튼해졌다고 여기며 살았는데. 물론 그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그동안 쌓인 것이 터졌으니 이럴 수도 있지.


자자, 정신 차리고. 나는 드물고 귀한 이다. 예전이든 요즘이든 타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고, 판단 없이 공감할 수 있는 이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나 수요가 있다. 사람에게 오래 많이 시달렸다는 뜻은 그만큼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평생 스스로를 닦아온 만큼 어딜 가도 내 몫 이상을 하는 사람이고. 자긍심과 자존감과 자기애가 있으니 누군가는 다시 나를 찾을 테고. 설령 없다 하면 혼자 살면 되는 사람이다. 한 번 내린 선택에 책임을 지는 일은 물론 중요하지만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차선을 다해 의무와 배려로 대해왔다면 너무 목매지 않아도 된다.

누구도 너를 찾아오지 않으면 혼자 살고, 좋은 이가 찾아온다면 기쁘게 맞이하면 된다, 얼아. 거자막추 내자물거. 떠나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는 좋은 말이 있으니까. 저기서 ‘떠나는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잖아. 온 사람이 우리를 건강하지 않게 하면 상대를 받아들인 선택에 너무 목매지 마라. 서로에게 독이다.


부디 내가 하는 정도만 하는 사람이여, 내게로 오라. 그러면 관계에서 더 바라지 않아도 되겠다.


물론 내가 관계에서 백점짜리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꽤나 감점 요소가 많은 이지. 나는 평균 90점 이상인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좋지. 근데 내가 90점이 아니니 바랄 수는 있으나 요구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육각형이 고루 분포된 사람이 아니라 어느 한둘이 그래프 상한선을 뚫고 나간 이다. 그 와중에 나머지 부족한 지표를 하한선 이하로 떨어지지 않게 관리하면서, 전체적으로 조금씩 덜 부족하게 끌어올리는 중이다. 중요한 것은 부족한 지표를 올리기 위해 너무 많아 넘치는 지표를 깎아야 한다면, 굳이 그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비록 넘치는 지표인 장점이 남아돈다 해도, 부족한 지표인 단점이 하한선 이하만 아니라면 나는 장점을 깎으면서까지 단점을 돋우지 않는다.

그러니 앞서 말한 ‘내가 하는 정도만 하는 사람’은 모든 지표가 높은 ‘꽉 찬 육각형’ 같은 사람이 아니다. 평균 점수가 90점이 넘는 사람도 아니다.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든, <자신의 단점을 하한선 이하로 내려놓지 않은 사람>이다. 즉, 내가 관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 실상 관계의 모든 것이라고 여기는 그 세 가지를 지키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내게 와서 서로가 정한 선을 지키며 잘 지내보자는 이야기다.

이게 어딜 봐서 욕심이야? 전혀 아니잖아. 모든 것을 다 잘하라는 것도 아니고, 내 장점만큼 잘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육각 지표 중 하한선 아래로 빠지는 단점만 없으라는 말인데.

물론 누군가의 평가에서 내가 그 ‘육각 지표에서 어느 한두 지표가 하한선 이하로 빠지는 사람’이라면, 욕심일 수도 있겠지. 다만 내가 평가하는 나는 분명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최소한 하한선 밑에 놔두는 지표는 없다. 그렇다면 나를 그렇게 평가한 사람과 나는 그저 생각이 다른 이니 그 역시 어울리기 어렵겠지.


1. 관계에 대한 여섯 가지 지표 중 어느 하나도 하한선 아래가 아닐 것 (최소 기준)

2. 육각틀을 뚫고 솟은 지표가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건 희망)

3. 나와 너 둘 다 하한선 지표가 없다면, 우리는 장점이 비슷하든 다르든, 단점이 비슷하든 다르든 맞춰가며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비슷한 점에서는 함께 즐거워하거나 경계하면서, 다른 점에서는 각자 보완하거나 보조해주면서.

4. 내가 바라는 관계가 이렇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상한선을 뚫은 장점이 몇 개인지가 아니라 하한선을 밑도는 단점이 없는지다.


나 역시 이번 ‘사태’로 인해 배운 점이 있고, 또 배울 점도 있다. 이제 장점 쪽은 거의 극에 달했다. 관계에 있어 내가 가진 장점들은 이 수준으로 죽는 날까지 산다 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니 단점 쪽을 조금 더 보완하자. 물론 장점을 깎아가며 보완하지는 않을 것이나, 지금까지보다는 조금 더 집중해도 되겠다.

그러려면 내가 하지 말아야 하는 명확한 것은 두 가지다. 내 선택에 너무 매몰되지 말 것. 그리고 상대에게 너무 기대하지 않을 것. 단순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복잡하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저 단순할 뿐,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잘 못하는 중이고, 그럼에도 필요하니 해야 하는 일이고.


정리가 됐다. 확실히 글로 옮겨놓으니 머리와 마음 속 소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다. 이제 마침표를 찍고 창밖을 잠시 보면 되겠지.


이건 매번 어렵구나. 분명 십 년 후에도, 그리고 이십 년 후에도 나는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겠지.

'관계는 참 어렵구나.'라고.






2025.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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