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새벽 한 시의 사거리

by 이한얼






- 그 여자의 추정 -


방금 막 버스에서 내려 바로 곁에 있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시간은 벌써 새벽 한 시를 향해 달려간다. 이 시간쯤이면 동네의 좁은 2차선 신호등쯤은 점멸등으로 바뀔 법도 한데, 횡단보도가 있어서 그러지 않는 모양이다.


내가 사는 동네는 조금 후미졌다. 신축 아파트나 번화가 없이, 마치 지방처럼 낮고 오래된 주택과 작은 가게들만 모여 있는 옛날 동네다. 당연히 이 작은 사거리조차 그리 밝지 않다. 주변을 밝히고 있는 것은 며칠 전이 한가위였음을 증명하는 약간 부족한 보름달과 지상 정착물 중에 가장 밝은 빛을 내는 농협 자동화 기계 부스, 그리고 약간의 가로등뿐이다. 뭐, 그래도 괜찮다. 사람이 하나 없는 텅 빈 거리에 나 혼자라면 이 조금은 어둑어둑한 새벽의 풍경과 습도도 나름 운치가 있으니까. 나외에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말이지.


횡단보도 앞에 선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저쪽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듯한 인기척을 느꼈다. 확인해 보니 소리가 들릴 거리는 아닌데 내가 어떻게 ‘들었다’고 인지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만이 속했던 이 정취 있는 사거리가 누군가의 등장으로 인해 갑자기 익숙하고 뻔한 동네 횡단보도로 돌아왔다. 근데, 등장한 인물이 남자다. 게다가 덩치가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 걸음걸이가… 조금 이상하다.


그 순간 나는 조금 긴장이 됐다. 지금 나 말고 누군가가 여기? 당연히 있을 수 있지. 아무리 작다 한들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 몇인데. 그게 남자? 그럴 수 있지. 이 시간에 나오면 안 되는 법도 없으니. 덩치가 커? 잘 먹었거나 운동을 좋아하나 보지. 아니면 보통 유전이니까. 근데 걸음걸이가 마치 뉴욕 퀸즈에서나 볼 법한 껄렁껄렁한 걸음걸이다? 어우야, 이건 좀… 바지춤과 후드 한 부분이 글록 손잡이가 분명한 모양으로 불룩 솟아있거나 닥터 드레 헤드폰에서 갱스터랩이라도 흘러나오지 않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걸음걸이인데.


지금 사람이 있고, 남자고, 덩치가 큰 것을 떠나, 저 걸음걸이에 나는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긴장은 상대가 이쪽으로 다가올수록 점점 강해졌다. 그러다 상대는 나와 신호등 기둥을 사이에 두고 횡단보도 한쪽에 멈춰 섰다. 분명 토종 한국인 같아 보이는데, 술에 취한 건지 약에 취한 건지 왜 저렇게 걷지?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아주 어렴풋이 어떤 소리가 들렸다. 낮은 톤의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는 듯한, 또는 주정하는 듯한 기묘한 음율이었다.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이쯤 되면 취한 것이 술이면 다행일 지경이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메고 있던 숄더백을 다시 그러쥐었다. 그러자 그 순간, 그 남자의 마치 주문 같던 중얼거림이 사라졌다.


그러고 몇 초쯤 더 흘렀을까. 횡단보도의 신호는 파란불로 바뀌었다. 내가 하얀선을 밟기도 전에 그 남자가 먼저 뚜벅뚜벅 횡단보도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중얼거리는 소리도 없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아주 바르고 단정한 걸음걸이였다.


무섭기보다 기묘하다. 도대체 뭐였지…








<그 남자의 사정>


30대 나: 드디어 끝났다! 축하한다! 인마!

40대 나: 하… 내가 이제 마흔이라고? 나 참… 허, 참나…

30대 나: 고생해라. ㅋㅋㅋㅋ 아, 쉽지 않았다 진짜.

40대 나: …이제 뭐하지?

30대 나: 뭐하긴, 하던 거 마저 해야지. 지금 추석 때 생각 없이 놀아 제낀다고 밀린 <사전 한 장>이 몇 장인데.

40대 나: 무기력해진다… 눕고 싶다…

30대 나: …자! 그럼 일단, 생일 선물을 주자!

40대 나: 누구한테?

30대 나: 우리한테.

40대 나: 누가?

30대 나: 우리가!

40대 나: …뭘로?

30대 나: 초콜릿 어때? 식물성유지, 팜유가 들어 있지 않은 정상적인 초콜릿. 카카오매스와 카카오버터가 들어 있는 진짜 초콜릿. 어차피 지금부터 사전 정리 하려면 필요하니까, 자 생일 선물 사러 나가자!

40대 나: 이 시간에?

30대 나: 한국은 이게 참 좋아. 편의점이라는 게 세상에, 24시간이네? 자, 빨리 옷 입어!


하여, 나는 주섬주섬 바지를 갈아입었다. 순간 그냥 나갈까 싶었지만, 난벌과 든벌을 구분하는 것은 다른 이가 아닌 내가 정한 규칙이었으니까. 사실 외출용 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을 때까지만 해도 조금 귀찮았다. 지금 이 시간에 무슨 초콜릿을 사러 편의점에 가. 집에 한 번 들어와서 손을 씻고 알코올 솜으로 스마트폰과 워치까지 다 닦은 후에는, 엔간하면 다시 나가지도 않으면서. 얼핏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 시간에 밖에 나가본 것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친구가 놀러왔을 때 맥주가 떨어져서 함께 나갔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얼추 반년은 된 듯하다.


그럼에도 이 시간대 공기와 분위기, 습도와 풍경은 참 묘하지. 현관문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귀찮음이 더 컸는데, 계단참으로 나와 습한 공기와 할로겐색 노란 가로등을 보니 갑자기 또 기분이 좋아졌다. 마흔, 뭐 어때. 평생 안 될 거야? 어차피 거쳐 갈 길이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사람에게 붙은 나이라는 숫자 딱지가 아니라, 그것을 달고 있는 이가 어떤 영혼을 가지고 무엇을 추구하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그것이 중요한 거니까. 생일 선물? 좋아, 주자고. 초콜릿? 안 그래도 먹고 싶었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부터, 나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고작 네 개 층의 계단을 내려오는 사이, 즉석에서 되도 않는 작곡으로 만든 노래를 중얼거릴 만큼.


초콜릿♬ 초콜릿♬

초콜릿 맛있어♬ 초콜릿 좋아해♬

초콜릿 먹으러 가자♬


무릎으로 박자를 맞추며,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이 시간이면 점멸등이겠지 싶었는데, 의외로 신호가 아직 살아있다. 횡단보도가 있어서 그런가. 근데 거리에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간혹 지나가는 차를 제외하면 이 텅 빈 사거리에는 오직 나뿐이다. 사람이 없어? 좋아! 그렇다면 어깨춤까지 춰주겠어!


입으로는 초콜릿송을 흥얼거리고, 어깨로는 깨방정을 떨면서 횡단보도 앞까지 갔다. 여기는 춤추기에 너무 밝다. 바로 뒤에 조명이 훤한 농협 자동화 기계 부스와 조금 배가 꺼졌지만 휘영청한 보름달 덕에 혹시 누구라도 등장하면 남우세스러운 춤사위를 바로 들킬 것이다. 그래서 입으로만 흥얼거렸다. 초콜릿, 초콜릿,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


그러다 문득, 어떤 인기척을 들었다. 근처에서 면직물끼리 스치는 듯한, 마치 폴리에스테르나 폴리나일론이 70에서 80% 이상 들어간 야상(아우터)의 소매와 몸체가 서로 비벼지는 그런 소리. 순간 덥지 않은 날씨임에도 등에 땀이 났다. 흥얼거리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움직여 신호등 지주 너머를 확인해봤다. 어떤 젊은 여자가 뻣뻣한 자세로 서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달빛이 얼핏 비친 상의는 플라스틱 섬유 특유의 묘한 광택을 발하고 있었으니까. 사람이 있었구나. 아니 이 시간에 사람이 여기 왜 있지? 아니지, 있을 수 있지. 이 동네 사람이 몇인데. 게다가 여긴 버스 정류장 바로 옆 횡단보도고.


나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신호가 바뀌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다 눈앞에 파란불 비슷한 것이 보이자마자 곧장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저 멀리 보이는 편의점 간판을 향해 돌진하듯 걸어갔다. 차라리 웃어! 노래가 그게 뭐냐고 비웃어도 돼! 아니면 내가 너무 부끄럽잖아! 훗날 ‘마흔 살이 되자마자 가장 처음 한 일이 무엇이었나요?’라는 누군가의 질문에, ‘하핫! 새벽 한 시에 동네 사거리에서 춤과 노래를 즐기다 수치사를 당한 뻔 했지요!’라고 해야 되잖아. ㅠ_ㅠ


혹시라도 이상한 사람일까 봐 겁먹게 했을지 걱정된다. 밤이든 낮이든,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요즘은 조금이라도 이상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일단 주춤 물러나게 되니까. 내 깨방정한 어깨춤과, 작곡인지 시낭송인지 헷갈리는 초콜릿송은 새벽 한 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이상했을 것이고.


초콜릿은 결국 사왔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마흔이 되던 생일날 밤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2025. 10. 09. 01:12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수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