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두 번째 대본
[신랑에게]
지금 여기가 강동구 성내동인데, 이 바로 옆이 풍납동이야.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 풍납동에 산부인과가 하나 있었거든. 저 아이가 거기서 태어났어.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으니, 오래 전 일이라 다른 기억은 전부 날아갔는데 신기하게도 저 아이를 처음 봤던 장면만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어. 사실 당시 내가 어리기도 해서, 동생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도 실감이 잘 안 났어. 근데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침대에 아주 작은 생명체가 손가락을 꼬물꼬물 거리며 누워있는 모습을 봤을 때, 마치 병실이 커다란 심장이 된 것처럼 쿵쾅거리는 거야. 그냥 본능적으로 알겠더라. 아, 이 아이가 내 동생이구나. 내 가족이구나. 나는 앞으로 평생 동안 이 아이를 지키고, 아끼고, 보듬고, 사랑하며 살아가겠구나. 그게 내 역할이구나.
그로부터 29년이 흘렀어. 그동안 분명한 건, 나는 저 아이에게 완벽한 가족은 아니었어. 솔직히 좋은 오빠였는지도 잘 모르겠어. 뭐가 정답인지 몰라서 늘 어려웠고. 그래도 항상 궁리하며 최선을 다해 키웠어. 가족으로서, 연장자로서 저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행여나 내가 너무 일찍 말하는 바람에 저 아이가 스스로 배우고 깨달을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너무 늦게 말하는 바람에 정작 저 아이가 필요한 순간에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를 바르게 키우는 일은 항상 어렵더라. 그럼에도 하늘이 도우셨는지 이 아이는 참 잘 자랐어. 어디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바르게. 내가 이 아이에게 좋은 오빠였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이 아이는 분명 내게 좋은 가족이자, 무엇보다 최고의 동생이었어. 우리 집에 복을 가져와준 홍복이자, 내 인생을 구해준 구원자이기도 해. 이 아이가 없었으면 나는 지금보다 못난 사람으로 훨씬 삭막하게 살고 있었을 거야. 저 아이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 수 있었어.
29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내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야. 필요하다면 내 안에 달려있는 뭐든 떼어줄 수 있는 그런 아이야. 그런 아이의 결혼식에서, 이 아이 옆에 서있는 너에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실 하나뿐이지. 아마 지금도 그러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부디 소중히 대해줘. 누군가가 목숨 걸고 지켜온 아이임을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신부에게]
그리고, 나는 사실 아직 신랑에 대해서 잘 몰라. 서로 알게 된 기간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눈 횟수도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아직은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수 없지. 다만, 나는 너에 대해서는 조금 알아. 평생을 곁에서 유심히 지켜봐 왔으니까. 너는, 내 가족인 것을 떠나 그냥 참 좋은 사람이야. 그리고 네가 곁에 사람을 둘 때 얼마나 많은 것을 고려하는지도 잘 알고, 그래서 네 곁에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네 친구들처럼 좋은 사람들만 머문다는 것도 알아. 그런 애가 단순히 사귀기만 하는 게 아니라, 결혼을 하겠다고 누군가를 데려와? 그러면 그 사람은 분명히, 아주 아주 좋은 사람일 거야. 나는 신랑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평생 키워온 너에 대해서는 아니까. 너의 사람 보는 안목과 판단력을 신뢰하니까. 그러면 이 친구가 좋은 사람이 아닐 수가 없지.
그래서인지,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 친구가 좋았어. 그리고 거듭 만날 때마다 점점 더 좋아졌고. 이제는 앞에서 밥만 먹고 있어도 흐뭇하고, 간혹 네 옷깃에 붙은 보풀 같은 것을 조용히 떼어주거나 입에 묻은 소스 같은 것을 가만히 닦아주는 모습을 볼 때면 아주 예뻐 죽겠어. 이런 좋은 사람과 결혼하게 돼서 그게 참 다행이고 기쁘다.
오늘부로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됐어. 아직 실감은 잘 안 나겠지만.
내가 관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본 방침은 단순해.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내가 먼저 그것을 한다.’ 그러니 나는 잠시 후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이 길을 걸어가 저 문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이 친구를 내 가족으로 생각할 거야. 내 하나뿐인 여동생이 어디에서 누굴 만나더라도 존중받고 사랑받길 원하는 딱 그 마음만큼, 내가 먼저 이 친구를 한 집안의 귀한 아들이자, 동시에 너의 소중한 남편이자, 동시에 우리 부모님의 하나뿐인 사위이자, 동시에 내 남동생으로 여길 거야.
그렇게 우리 서로에게, 차츰 좋은 가족이 되어갔으면 좋겠다.
결혼을 하기 전이든 후든,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늘 하나뿐이야. 아프지 마라. 건강해라. 그게 이 오빠의 모든 바람이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한다.
더불어 오늘 이 자리를 축하하기 위해 먼 곳에서 귀한 걸음을 내어주신 하객 분들께 두 사람의 가족으로서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2025. 11.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