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이에요, 얼마 전에 당신이 쓴 ‘억압된 사람의 성향 패턴’을 보면서 정말 많이 공감했었거든요.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우린 억압된 사람이니까. 나도 순간 열이 확 올라서 대뜸 전화해버렸는데, 일단 미안해요. 갑자기 이러는 것도 실례니까 나부터 먼저 말할게요.”
“천천히. 얼마든지. 잘 들을게요.”
“내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당신 블로그에 들어갔어요. 글이 없더라고요. 근데 내가 아는 당신은 빠르면 1시, 아니면 못해도 새벽 5시 전에는 전날 글을 올리는 사람이거든요. 특히 요즘에는 더. 왜냐면 당신은 억압되고 폐쇄적인 인간이니까. 근데 없었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좀 있다 다시 들어가 보니까 여전히 없더라고요. 그래서 셋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어제 집에 안 들어왔다. 글을 못 쓸 정도로 큰 사고나 사건이 터졌다. 마지막으로 술을 많이 마셨다. 근데 리스트를 못 쓸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으면 분명 단품이라도 술에 잔뜩 취한 넋두리가 올라왔겠죠. 요즘이니까! 그러니 그건 패스. 큰 사고나 사건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으니 패스. 그럼 집에 안 들어왔다, 만 남더라고요. 지금 내 얘기 듣고 있죠?”
“소름 끼치게 집중해서 잘 듣고 있습니다.”
“왜 소름이 끼쳐요?”
“나도 이런 일 있으면 혼자 그러고 있거든요. 근데 과정까지 너무 흡사하니 마치 날 보는 것 같았어요.”
“그렇겠죠. 당신한테 배운 거니까. 그럼 지금 내가 무슨 기분인 줄 알겠네요.”
“네. 그런 생각 들게 한 건 정말 미안해요. 말 다 끝난 건 아니죠? 마저 들을게요.”
“그럼 뭘 하다 집에 안 들어왔을까 생각해보니 두 가지더라고요. 첫 번째는 사람을 만나서 술을 마시다가 차가 끊겼다. 사람을 만나서 술 없이 밤샐 정신은 없으니 제외하고. 그러면 아마 피씨방을 갔을 텐데, 역시 한 개라도 글이 올라와야 하니 이건 패스. 술 마시다 차가 끊겼는데 사람들과 헤어지고 큰 사고, 이것도 패스. 이렇게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부터 소거법으로 다 지워보다 보니 결국 하나가 남더라고요.”
“뭔데요?”
“지금 서울 아니죠?”
“네.”
“혼자 있어요?”
“…네.”
“…진짜 혼자예요?”
“…….”
“혼자 아니죠?”
“거짓말했어요. 미안해요. 혼자 아니에요.”
“그럴 것 같았어요.”
“어떻게요?”
“정말 혼자 갔으면, 가기 전에 연락을 줬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네요. 근데 어제 그 정도로 걱정했으면 연락이라도 한 번 주지 그랬어요? 그럼 걱정 좀 덜 했을 텐데.”
“이 모든 건 오늘 아침, 정확히는 방금 세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이에요. 어젯밤에는 그냥 잘 있겠거니 했죠.”
“아, 맞다. 그랬다고 했죠.”
“누구랑 갔어요?”
“그건 노코멘트할게요.”
“그래요. 지금 누구랑 간 게 중요하지, 누군지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미안해요. 거짓말해서.”
“몇 번?”
“두 번.”
“내가 월요일에 같이 바람 쐬러 가자고 했을 때, 당분간 여행은 혼자 가고 싶다고 했었죠.”
“네.”
“왜 그랬어요?”
“폐 끼칠 것 같았어요. 지금 이 상태로 어딜 가면 시체처럼 기어 다니다가 주저앉아서 울고, 다시 걷다가 또 어딘가 망부석처럼 앉아있을 테니까. 그런 과정이 당신에게 뭐가 재밌겠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한테는 더더욱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고.”
“그건 정말 시간이 지나도 오래 가네.”
“뭐가요?”
“당신 지레짐작 싫어하죠?”
“네.”
“근데 당신도 그거 하는 건 알죠?”
“…네.”
“근데 당신이 하는 지레짐작 중에 뭐가 제일 많은지 알아요?”
“…….”
“지금 같이 이런 거예요. 남에게 피해 주는 거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내 행동이 상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그러면서 손도 내밀지 않고, 내민 손도 지레짐작으로 거절하잖아요. 그래요, 평소에는 그게 좀 심해도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그냥 그러려니 했어요.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 당신은 그럴 상황이 아니에요.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지금은 얇든 썩었든 손이 닿는 모든 동아줄을 잡아야 할 때 아니에요? 당신이 계속 그러면, 나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저돌성을 가진 몇 사람 아니면 아무도 당신에게 못 가요. 당신이 먼저 찾지도 않겠죠. 그렇게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외롭게 스러질 거예요? 당신, 이번에 이대로 그냥 죽을 생각이에요?”
“아니에요.”
“이번 일만 해도 그래요. 내가 당신 상태 몰라요? 그것도 모르고 어디 가자고 했겠어요? 당신 상태만큼은 사실 어느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다고 봐요. 여행 가서도 그럴 줄 알았고, 내가 그 모습 감당할 수 있으니 가자고 그런 거예요. 그건 내가 정한 거고 내 몫이에요. 근데… 아, 말하다 보니 너무 속상하다.”
“미안해요.”
“근데 당신은 나한테 거짓말했죠? 차라리 ‘이렇게 생각해서 좀 그래요’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가고 싶어요’ 그랬죠. 그래서 내가 그냥 ‘알았어요’ 했어요. 지금 혼자 가면 큰일 날 시기지만, 그러고 싶을 마음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냥 ‘알았어요’ 했어요. 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알았어요’ 했어요.”
“…….”
“근데 도대체 얼마나 편한 누구랑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갔죠. 당신 생각에 이 사람한테는 이만큼 폐 끼쳐도 된다고 생각했으니 같이 갔겠죠. 그래요, 그럴 수도 있죠. 나는 안 돼도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어요. 근데 왜 또 거짓말해요? 차라리 이래저래 해서 누구랑 같이 왔다고 하지, 왜 혼자라고 거짓말해요.”
“미안해요. 울지 마요.”
“안 울어요.”
“이제 거짓말 안 할게요. 그런 지레짐작, 바로 버릴 수는 없지만 앞으로는 그러고 있다고, 그런 생각 중이라고 솔직히 말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