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랑 되게 친하네요.”
“우리가 참 많이 친하죠.”
“사실 처음 보고 많이 놀랐어요.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른 집 남매들을 많이 접해본 게 아니라서. 다른 집은 잘 안 그런가 봐요.”
“집안마다 분위기가 다르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죠. 스무 살 먹은 동생을 끌어안는 오빠도 거의 없고, 오빠랑 나란히 누워서 수다 떠는 여동생은 더더욱 없고요.”
“스무 살 아니에요. 아직 열아홉이에요.”
“참나, 열아홉도 그런 애는 못 봤네요.”
“그렇구나. 하긴, 친구들에게 듣거나 인터넷에서 보거나, TV에서만 해도 남매지간이 내 생각만큼 그리 가깝지는 않더라고요. 그나마 누나 동생이라면 좀 낫지만 오빠 동생이라면 이건 뭐, 아주 전쟁터던데요. 보통 오빠라고 부르지도 않는다면서요? ‘야’나 ‘너’는 기본이고, 심하면 ‘오빠 놈’ ‘동생 년’ 그런다던데. 전 그거 보고 엄청 놀랐어요.”
“좀 극단적인 경우긴 하지만, 맞아요. 사실 나조차도 우리 오빠한테 안 그러니까.”
“어때요? 오빠랑 관계가?”
“그냥, 뭐랄까. 우리는 막 격렬하게 싸우진 않지만 그렇다고 살가운 것도 아니에요. 굳이 표현하자면 소와 닭 정도? 각자 인생이 있고 서로에게 큰 간섭도 안 하지만 관심도 크게 없고. 그냥 집에 없으면 없구나, 집에 있으면 있구나, 오랜만에 보면 살아있구나, 뭐 그래요.”
“라면 먹을 때 있으면 ‘먹을래?’ 하고, 안 먹는다 해놓고 뺏어먹으면 ‘죽을래?’ 그런?”
“정확해요.”
“재밌네요. 근데 그게 정말 서로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없거나, 상대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죠. 그래도 내 오빠인데.”
“그러니까 오빠가 어디 가서 몸이든 마음이든 다치고 오면 가족으로서 당연히 걱정되는데, 단지 표현이나 겉모습이 그렇게 보이는 거죠?”
“그렇죠. 혈육이고 가족이니까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안타깝고, 어디 가서 당하고 오면 화도 나고 그러죠. 근데 그런 큰일이 없으면 평소에는 그냥 각자 무난하게 사는 거예요.”
“그리고 보통은 그렇고요?”
“내가 아는 선에서는요.”
“역시. 우리 집이 특별한 거네요!”
“그래서 신기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동생이 애교가 많나?”
“애교는 무슨. 코딱지만도 없어요. 우리 집 식구들은 나 빼고 다 애교가 없는 성격인데, 동생은 아버지를 닮아서 유독 더 없어요.”
“그럼 어떻게 그렇게 친한 거예요?”
“그 얘기를 하려면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해야 하는데.”
“자, 이번 기회에 이 누나에게 시원하게 고백해봐요.”
“웬 누나. 나보다 어리면서.”
“아무튼, 자, 어서.”
“보자, 나는요. 어렸을 때부터 참 아쉬운 게 하나 있었어요.”
“뭔데요?”
“우리 부모님은 정말 남부럽지 않게 날 키워주셨는데, 딱 한 가지 아쉬웠던 게 뭐냐면, 스킨십이었어요.”
“지금 부끄러운 과거 고백 중인 거 맞죠?”
“아니에요. 그거 고백 안 하려고 B루트로 들어가는 중이에요.”
“이 남자 과거 비싸네. 아무튼 그래서요?”
“나는 스킨십을 정말 좋아해요.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사람과 사람의 피부가 닿고, 그 너머로 36.5도의 체온이 전달되는 게 너무 좋았어요. 부드럽고 따듯하고, 그래서 ‘아이컨텍’도 좋아해요.”
“아이컨텍이면 눈 맞추는 거요?”
“네. ‘눈맞춤’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비접촉 스킨십이죠.”
“그게 스킨십이었구나. 아무튼, 그래서요?”
“난 스킨십을 정말 좋아하는데, 우리 부모님은 그건 잘 안 해주셨어요. 아버지랑은 뭐 어림도 없고, 어머니랑도 유년기를 지나고 나서는 거의 접촉이 없었어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그게 참 아쉬웠던 것 같아요. 왜 스킨십이 없을까? 왜 안아주고 만져주고 입 맞춰주지 않을까? 그 생각이 심할 때는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나는 이 가족 구성원으로 필요 없는 사람인가? 그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요.”
“아이의 인격 형성에 스킨십이 굉장히 중요한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맞아요. 어쨌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아쉬워하던 중에, 언제였던가, 불현듯 깨달은 거죠.”
“뭘요?”
“‘그냥 내가 하면 되는구나’라고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다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상대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데 상대가 그걸 내게 주지 않는다면 ‘왜 주지 않을까?’ 하지 말고 그냥 내가 먼저 주면 되죠. ‘나는 왜 사랑받지 못하지?’라고 괴로워하지 말고, 내가 먼저 상대를 사랑하면 되는 거예요. 그럼 자연히 나는 사랑받게 되죠.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관계라면, 나를 사랑하는 상대를 내가 사랑하지 않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스킨십을 못 받는다고 아쉬워할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하면 되는구나. ‘왜 나한테는 산타가 안 오지?’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산타면 되는 것처럼. 그리고 스킨십이 가진 특수성이 뭔지 혹시 아세요?”
“뭔데요?”
“스킨십은 쌍방이 하는 거죠. 만약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관계이고 그래서 이렇게 손을 잡는다면, 이건 잡히는 당신도 좋지만 잡는 나도 좋잖아요. 스킨십은 이게 참 좋아요. 받는 사람도 기쁘고, 동시에 하는 사람도 기쁘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아마 동생이 일곱 살쯤 되었을 거예요. 그때부터 나는 동생을 안아주고 머리에 뽀뽀해줬어요. 그 전에는 간간히 하던 걸, 그때부터는 하루도 빠짐없이요.”
“부모님이 아니라 동생한테요?”
“네. 그때 나는 부모님과 거리가 멀었고, 동생은 나처럼 아쉬움을 가진 채 크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동생이랑 터울이 크잖아요. 보통은 어려워만 하는 나이 차니까. 근데 나는 그러기 싫었어요. 열한 살이 아니라 한 살 차이처럼, 터울 적은 보통 남매처럼 친하고 가깝게 서로 아끼며 살고 싶었어요. 어떡하면 나이차와 상관없이 가까워질 수 있을까. 부담 없이 편한 관계가 될까. 그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처음에 막 끌어안고 뽀뽀하고 그러면 동생이 안 싫어했어요?”
“어렸을 때니까요. 그때는 우리만의 인사도 있었어요. 총 다섯 단계인데, 둘이 마주 보고 거울처럼 상대에게 해주는 거예요. 순서대로, ‘사랑해요’라고 말하면서 안아주고, ‘토닥토닥’이라고 말하면서 등을 두드리고, ‘부비부비’라며 볼을 비비고, ‘꼬옥’이라고 하면서 한 번 더 꽉 안아주고. 마지막으로 ‘간질간질’ 하면서 서로를 간질이는 거예요. 그럼 항상 동생이 까르르 웃으면서 끝이 나죠. 그때 우리에게 스킨십은 그냥 장난 같은 거였어요. 부담스럽거나 쑥스러운 것이 아닌, 그냥 ‘쎄쎄쎄’ 같은 거였죠.”
“동생이 어렸을 때니까 가능한 거였겠네요. 지금 우리 오빠가 나한테 갑자기 그런다고 생각하면, 우와….”
“그래서 일찍 시작해야 돼요. 만약 더 늦게 시작했으면 우리 역시 어려웠을지도 몰라요. 그때부터 나는 아침에 둘 중 한 명이 나갈 때 그 장난을 치면서 ‘잘 다녀와. 차 조심. 사람 조심’이라고 말해줬어요. 다녀올 때도 마찬가지. 내가 들어가든 동생이 들어오든 먼저 달려가서 안아줘요. 그리고 ‘잘 다녀왔어?’라고 말해주면서 뽀뽀를 해요. 뒤통수든, 정수리든, 이마든 꼭 안았을 때 입술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평소에도 물 마시러 나왔다가 거실에서 마주쳤을 때, 신발장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을 때, 빨래를 개며 TV를 보고 있을 때든. 각자 방에서 생활하다가 집안 어딘가에서 마주치면 그냥 습관처럼 끌어안고 뽀뽀해요. 주말에 함께 있는 시간이라면 소파에 딱 붙어 앉거나 동생 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요. 각자 책을 보거나 휴대폰을 가지고 놀아도, 이야기를 해도 바짝 붙어있죠. 머리를 쓸어주고 등을 토닥여요. 그러면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스킨십은 이미 일상이 돼요. 어색한 행동이나 부끄러운 행사가 아니라, 밥을 먹고 잘 먹었다고 말하듯이, 화장실에 나올 때 불을 끄듯이 생활의 일부가 돼요. 나는 다른 생각에 빠져있다가도 동생을 보면 반사적으로 한쪽 팔을 벌리고, 동생은 비몽사몽 간에도 나를 발견하면 자연스럽게 정수리부터 내밀어요. 아, 왜 웃어요?”
“비웃는 건 아니에요. 근데 진짜 상상이 잘 안 돼요.”
“사실 나는 그리 좋은 오빠가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는 동생이 잘못하면 필요 이상으로 엄하게 혼내기도 했고요. 아, 부끄러운 과거 말 안 하려고 돌아왔는데 결국 내 입으로 실토하네요. 생일 선물도 제대로 챙겨준 적도 없어요. 어딜 같이 놀러 가거나 맛있는 걸 먹으러 간 적도 없고, 가족끼리 여행을 간 적도 거의 없죠. 사실 이 아이가 학교에서 몇 번인지, 친구는 누가 있고 누구랑 노는지 그런 것도 잘 몰라요. 요즘 무슨 고민이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몰라요. 내가 이 아이한테 해준 건 그저, 십 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은 스킨십밖에 없어요. 근데 재밌게도, 지금 우리 집안 꼴이 말이 아니고, 솔직히 내가 봐도 충분히 삐뚤어질만한 환경에서도 동생은 말썽도 안 부리고 특별한 사춘기도 없이 열아홉이라는 나이까지 잘 컸어요. 지금도 나랑 친하고, 친구처럼 같이 잘 놀고 장난치고, 하지만 만만하게 보지는 않아요. 혼낼 때는 말도 잘 듣고, 무서워하기도 하고 그래요. 그러다가 내가 소파에서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또 불쑥 와서 옆에 찰싹 달라붙고, 나란히 누워서 재잘재잘 말도 잘해요.”
“스킨십 덕분일까요?”
“다 내 덕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아요. 그럴 수도 없고요. 그저 힘든 환경에서도 무사히 잘 커준 동생에게 고맙고, 잘 견뎌줘서 기특하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빠를 어려워하지 않는 부분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정말 다행이네요.”
“스킨십이라는 건 정말 대단해요. 정말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요. 나는 그냥 그 아이를 안아주고, 그 아이에게 입을 맞추는 것뿐인데 그 안에는 수많은 의미들이 숨어있어요. 나는 널 사랑해. 너는 소중해. 너는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사랑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단다. 이런 입으로 직접 하기 힘든 쑥스러운 말들이 작은 손짓 안에 전부 담겨있어요. 보통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단절, 부모와 자식 간이든 형제자매 간이든 똑같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표현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없어도 되는 여러 갈등들이 피어나죠. 사랑과 표현의 상관관계는 참 오묘해요. 사랑하지 않으면 표현할 필요가 없지만, 사랑해도 표현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없는 것이 되어버려요. 하지만 이 표현이라는 게 쉽지 않죠. 인터넷에서 감성을 자극하는 글귀나 그림을 볼 때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엄마 아빠한테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지만, 시간이 좀 지나서 막상 만나게 되면 그게 잘 안돼요. 우물쭈물하고, 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넘어가게 되죠.”
“맞아요. 마음으로는 하고 싶어도, 실제 행동으로는 힘들죠.”
“근데 애써 쑥스러운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부모든, 자식이든 그냥 스킨십을 하면 되니까. 만지고 안아주고 입 맞추면 돼요. 물론 이 역시 처음은 쉽지 않죠. 예를 들어 고등학생 딸이 갑자기 집에 가서 엄마 아빠한테 안기고 뽀뽀한다고 생각해봐요. 부모가 그러겠죠. 뭐야, 징그럽게. 그러고는 머쓱하게 밀어내요. 그럼 딸은 그 반응에 상처를 받죠. 근데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니까. 부모님도 싫어서가 아니라 낯설고 쑥스러워서 그런 거고. 만약 부모가 딸의 뽀뽀를 받고 머쓱해하며 밀어내면 딸은 그냥 에헤헤, 하고 웃으면 돼요. 그리고 다른 날에 또 안고 뽀뽀하면 돼요. 그럼 부모의 반응도 점차 옅어지다가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받게 되죠.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것도 똑같아요. 그렇게 익숙해지면 그때는 작은 스킨십만으로도 정말 많은 말이 오가는 거예요. 소통이 되는 거죠.”
“…….”
“부모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사는지 자식이 반드시 알 필요는 없어요. 부모 역시 내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두 알아야 할 이유도 없어요. 서로에 대해 많이 몰라도 괜찮아요. 다만 한 가지. 우리가 가족이고 네 편이고 어느 상황에서도 널 사랑한다. 넌 혼자가 아니야. 그런 메시지를 가족 구성원 각각에게 전달해주면 돼요. 여동생에게 아빠와 오빠와 엄마가 해주고, 오빠에게 아빠와 엄마와 여동생이 해주고, 엄마에게는 남편과 아들과 딸이, 아빠에게는 부인과 아들과 딸이 그걸 전해주면 돼요. 그럼 괜찮아요. 그 집의 경제 형편이 좋지 않아도, 큰 집과 큰 차가 아니어도, 설령 빚이 있어도 그 가족은 함께 견딜 수 있어요. 가족이란 이름 안에서 행복할 수 있어요. 가족을 이어주는 건 혈연도 법적 울타리도 아니에요. 같은 집에서 기억과 정서를 나눠가진 이들만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 소통하는 라인’이 있죠. 그게 가족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선이에요. 그게 없으면 가족은 결국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거죠.”
“그럼 어때요? 지금 부모님 하고도 잘 지내고 있어요?”
“사실 우리 집도 잘은 안 되고 있어요. 위에 말한 것을 가족 네 명 다 한다면 가장 좋겠지만, 사실 가족 중에 한 명만 모두에게 하고 있어도 그 가족은 유지가 되거든요. 근데 어머니랑은 동생에게 하듯 똑같이 끌어안고 뽀뽀하고 해도, 아버지랑은 참…. 정말 ‘부자’라는 단어에는 오묘한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부자라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반대로 서로 절대 겹칠 수 없는 평행선도 존재하더라고요. 그리고 나는 이십 대 전부를 아버지와 좋지 않게 지냈거든요.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아직 서로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하거나 하는 관계는 아니에요.”
“그럼 아버지와는 아예 스킨십 자체가 없어요?”
“기껏 해봐야… 예를 들어, 저녁에 네 식구가 외식을 할 때 있잖아요. 아버지가 먼저 나오셔서 자판기 커피 한 잔 들고 하늘을 보고 계시면, 나도 커피 한 잔 들고 옆에 서는 거예요. 그냥 서는 건 아니고, 어깨랑 어깨가 살짝 닿을 정도의 거리에 서요. 닿았다는 건 느끼지만 막 부대끼진 않을 정도? 그 정도 닿았다고 아버지나 나나 막 옆으로 피하고 그러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내가 먼저 그러는 거죠. ‘아, 날씨 좋네요!’라고. 딱히 대답을 들으려고 말한 건 아니에요. 속뜻은 ‘뭐 괜히 어색하다고 옆으로 피하고 그러지 마시죠!’에 더 가깝겠죠. 그럼 아버지도 뭐라 말씀은 없죠. 옆으로 물러나지도 않고요. 그렇게 옷깃을 스치는 거리에서 같은 하늘을 보면 커피를 마시는 거, 지금 우리 부자의 스킨십은 딱 그 정도예요.”
“듣다 보니 갑자기 생각난 건데, 동생이랑 너무 친한 게….”
“친한 게?”
“그, ‘시스콤’이나 ‘브라콤’ 같은 거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에요. 사실 우린 서로 생활 반경이 너무 달라서, 평일에는 거의 못 봐요. 아침에 동생이 등교할 시간에 저는 그때 일어나죠. 동생은 12시 전에 자는데, 저는 거의 12시 넘어서 들어와요. 5일 중에 4일은 둘 중 하나는 맨 정신이 아닌 상태일 때 마주쳐요. 주말이 되어야 같이 밥을 먹든 놀든 하는데, 주말에도 서로 바빠서 그것도 한두 시간뿐이고. 무엇보다 각자 생활할 때 딱히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하거나 그러는 일은 없어요. 우리도 다른 남매처럼 각자의 삶을 살죠. 하지만 그 사이사이 서로의 접점이 생기는 지점에서 상대를 안아주는 거예요. ‘잘 살고 있지? 소중한 아이야. 여전히 널 사랑한다.’ 그렇게 몸짓으로 말하는 거죠. 할 마음이 없지 않은 이상, 그 정도는 아무리 바빠도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죠.”
2014.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