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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 중 일

[그데담 019] 마음의 투자

by 이한얼

[2/7]





“신기하네.”


“뭐가요?”


“사실 뭐 볼 게 있다고.”


“누구? 당신?”


“지금 난 가진 것 하나 없는데.”


“…진짜 많이 무너지긴 했나 보다. 자존감 끝판왕께서 그런 소리까지 하는 거 보니. 대답 들으려고 물은 거 아니죠?”


“음… 궁금하긴 해요.”


“이상적으로 답해야 해요, 현실적으로 답해야 해요?”


“둘 다 궁금하네.”


“사람 마음 가는데 무슨 조건이 있겠어요.”


“이상적인 대답이네요. 진짜 표정 연기는 나보다 몇 배는 고수야.”


“많아 보이지만 사실 여자가 가진 진짜 무기는 몇 개 없으니까. 가뜩이나 남자에 비해 무기도 적은데 있는 것조차 포기할 순 없죠.”


“동감이에요. 그럼 현실적인 것은?”


“…….”


“뭐야, 왜 고민해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어려워서. 십 대 때 난 당장 멋있는 사람이 좋았어요. 스물 초반에는 상대의 지금 모습이 내가 정한 최저 기준보다 위면 괜찮았어요. 그게 1이든 10이든. 근데 언제부턴가, 사회생활 시작하고 나서 취향이 좀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사람이 일을 하기 시작하면 남의 돈으로 살 때랑 일상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여러 부분에서 달라지잖아요. 나도 조금 퍽퍽하게 살던 학생 때에 비하면, 직장생활을 하고 돈을 모을수록 주변 환경이 점점 나아졌어요.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가 느는 만큼 운신도 자유로워지고. 그럼 마음도 그만큼 여유로워지잖아요. 그럴수록 상대가 가진 총량을 의식하게 됐어요. 처음엔 단순히 1보단 10이었으면 좋겠고, 100이면 더 좋겠는 마음이었는데, 내 상황이 더 나아지니까 꼭 지금 당장 멋있어야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왜 그런 표정이에요?”


“의아하겠지만 이건 재밌게 듣고 있는 표정이에요. 난 아예 생각도 못 해본 발상이라 엄청 신선해요.”


“남자들은 안 그런가? 아무튼 지금 난 크게 부족한 것 없이 두루두루 가진 사람이라, 현재 적당히 깜빡깜빡한 사람보다 지금 어두침침해도 나중에 엄청나게 반짝거릴 사람에게 더 끌려요.”


“신기하네. 보통 두루두루 부족한 거 없는 사람은 나 같이 이상한 애보다 무난한 애 좋아할 텐데.”


“그 부분은 나랑 생각이 좀 다르네요. 만약에 내가 지금 별 거 없고 여유도 없었으면 당신 말고 무난한 사람이 더 좋았겠죠. 내 코가 석자인데 누굴 챙겨요. 그것도 벅찰 정도로 복잡하게 사는 당신을? 아우, 그건 누가 와도 못해요.”


“그런가.”


“그렇죠. 내가 지금 여유가 되니까 당장 50인 사람보다, 지금은 15여도 나중에 85인 사람을 만날 생각도 드는 거죠.”


“당신 눈에는 내가 그럴 것 같아요?”


“그러니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지. 나 인기 많아요.”


“뭐 하는 사람들이래. 봉사단체인가?”


“죽을래요?”


“살려줘요.”


“당신만 그래요, 당신만.”


“신기하다. 서로 성격이나 성향, 그리고 살아온 환경을 비교해보면 우리 사이에 딱히 접점이 보이지가 않는데. 어디서 그런 걸 느낀 거지?”


내가 어찌 살아왔는지 당신이 아직 다 모르니까. 내가 어떤 성향인지, 성격인지도 아직 다 모르잖아요.”


“하긴. 그건 죽을 때까지도 다 모를 것들이죠.”


“나야 당신이 그동안 어마무시하게 토해놓는 글을 보면서 그래도 당신에 대해 정보라도 더 가지고 있지만, 당신은 뭐 없잖아요? 나에 대해. 어디에 뭔가가 있었겠죠.”


“그게 뭔데요?”


“그건… 아직 말하기 싫어요.”


“뭐, 좋아요.”


“찜찜해 보이는 대답이네.”


“아니, 당신을 폄하하거나 매도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내 경험 상, 다들 이런 식으로 접근했고, 아니, 접근이라는 단어는 어감이 이상하네. 다들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다가왔다가, 나중에는 뭐야 이 쭉정이는, 라며 실망하고 떠나서요. 당신도 그럴까 봐 좀 걱정이 됐어요.”


“또 이런다, 오지랖이랑 지레짐작. 어디서 이거 수술해주는 병원 없나?”


“그런 데 있었으면 내가 먼저 했겠다.”


“나는 다른 건 잘 몰라요.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사람들 속에서 어떤 기대와 실망을 받으며 지금까지 살았는지 그건 몰라요. 나는 그냥 내 마음만 보고, 내 눈만 믿어요. 내가 보기에 지금 당신은 솔직히 너무 '찌질'해서 내 스타일 아니야. 근데 이 시기만 넘기면 나중에는 겁나 멋있을 거야. 연애를 안 할 거면 모를까 할 거면 큰 사람이랑, 큰 사랑을 주고 큰 사랑을 받으며 살고 싶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럴 거야. 다행히 난 지금 심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여유가 있으니까, 당신이 말한 그 삼투합인 거죠. 투자라고 해도 맞고. 그리고…….”


“왜 그래요?”


“…….”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요?”


“…너무 솔직했나 후회 중이에요.”


“무슨 이미 말 다 해놓고.”


“물어봤잖아요!”


“맞아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래도 이상적인 대답 역시 사실이에요.”


“알았다니까. 수습하지 마요.”


“아니 진짜라니까요. 아, 나 뭐 신나게 떠든 거야.”


“알아요, 진짜인 거. 그럼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지금의 나보다 미래의 내게 더 흥미가 있겠네요.”


“지금도 있어요. 이랬던 사람이 어떻게 변해가고, 어떻게 다시 일어서고, 결국 어디까지 가는지. 그리고 그걸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도울 수 있다면, 내 연애의 형태는 아마 그런 식이 아닐까요?”


“여유가 있을 때 당신의 연애 형태, 인 거죠?”


“콕 집어내지 마요.”


“알았어요. 솔직한 답변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나 기록하는 사람인 거 알죠? 요즘은 더.”


“전혀 상관없어요. 은밀한 침실 이야기도 아니고. 그리고 난 전혀 기록하지 않는 사람이라 어디든 내 기록이 남는 건 오히려 반가워요.”


“오케이.”


“대신.”


“대신?”


“만약이지만 당신이랑 연이 끝까지 닿지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가 각자의 길을 간다면 그땐 나인 거 숨겨줘요.”


“어떻게?”


“지우라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없는 거 아니까. 그냥 그때 당신 옆에 있던 사람이 나라는 걸 숨겨줘요. 이름을 빼든, 아니면 픽션이라고 하든, 누가 봐도 나인 줄 모르게.”


“알았어요. 약속할게요.”


“그것만 지켜주면 내가 했던 말, 우리 대화가 어디에 남아도 난 상관없어요. 오히려 기쁘겠죠. 어쨌든 당신이라는 왕이 나라를 다시 재건할 때 도왔다는 증서 같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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