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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 중 일

[그데담 021] 호칭

by 이한얼

[3/7]





“도령이라는 호칭이 고유명사예요?”


“질문에 다른 소리해서 미안하지만, 진짜 예비동작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건 금방 적응이 안 되네.”


“무슨 말이에요?”


“그냥, 말하는 스타일 문제예요.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 뭔가를 듣기 전에, ‘근데 갑작스럽지만’이라던가, 혹은 ‘갑자기 생뚱맞은 질문이긴 한데’라는 말을 먼저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동안 무슨 말이 나오려나 대비도 할 수 있었고. 평소 대화를 할 때도, 이 말을 했을 때 혹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먼저 깔고 들어가는 형식을 주로 써요. 예를 들어, ‘그래, 그렇겠지. 이건 비꼬는 게 아니야’ 이런 어순이 아니라, ‘이건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해’ 이런 식으로요. 아, 분명히 말하지만 뭐가 맞고 틀리고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요. 단지 그런 스타일에 오래 길들여져 있다가, 단거리 투창처럼 질문을 던지는 당신 방식을 갑자기 접하니까 매번 깜짝 놀라서. 그게 재밌어서 말해봤어요.”


“전 여자 친구가 그런 스타일이었나 봐요?”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나도 다 그런 스타일이었어요.”


“…혹시 나도 그렇게 해주길 바라요? 들어보니 어려운 건 아닌데.”


“아니요. 이건 내가 적응할 거지, 당신이 바꿀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지 않길 바랍니다.”


“그래요. 아, 근데 무슨 얘기 중이었지?”


“도령 호칭 얘기 중이었던 것 같은데.”


“그랬죠. 원래 주제로 돌아와서, 도령이라는 호칭이 고유명사예요?”


“고유명사? 글쎄요. 지금은 그걸 고유명사라고 해야 하나, 대명사라고 해야 하나. 애매한 경계에 걸쳐있는 호칭인데. …대명사겠네요. 원래를 귀속된 임시 고유명사였지만 이제는 나를 지칭하는 수많은 대명사 중에 하나.”


“‘은수’나 ‘현수’처럼요?”


“은수는 개방된 확정 고유명사이고, 현수는 귀속된 확정 고유명사라서, 그것들과는 좀 달라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그건 좀 있다 물어보고. 아무튼 그럼 누구나 그걸 사용할 수 있겠네요. 예를 들어 내가 당신을 그렇게 불러도 되고?”


“되죠, 당연히. 대명사는 귀속할 수 없으니까.”


“어려운 말이 자꾸 나오지만 또 무시하고. 그럼 그걸 특정 사람만 부르게 할 수도 있어요?”


“음, 질문이…. 내가 한 발 더 앞서 나가면, 누구나 부르는 대명사를 특정 누군가에게 귀속하기 위해 고유명사로 바꿀 수 있냐는 건가요?”


“정확하네요. 속내를 들킨 것 같이.”


“가능하죠.”


“그럼 그렇게 되면 그 고유명사는 귀속시킨 한 사람만 쓸 수 있고요?”


“그렇죠. 내가 ‘아가씨’라는 보통명사를 개인적으로 고유명사로 취급해서 특정 독립 개체에게 귀속시키고, 그리고 그 단어는 그 상대를 지칭할 때만 쓰는 것처럼. 그 반대의 과정도 당연히 가능하죠. 나를 나타내는 어떤 대명사가 있는데, 이게 모두가 쓸 수 있는 대명사로 남지 않고 누군가에게 귀속시키기 위해 고유명사가 된다면, 그 호칭은 귀속시킨 딱 그 사람만 내게 부를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이는 그렇게 부를 수 없게 되겠죠. 이 부분이 궁금했던 거 맞아요?”


“맞아요. 앞서 다 설명해줘서 더 물어볼 게 없네요.”


“내가 또 너무 앞서 나갔나.”


“이번엔 아니에요. 그럼 아까 말한 확정 고유명사는 뭐예요?”


“그건 상대와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했다는 뜻이에요. 반대로 임시 고유명사는, 필요에 의해 대명사를 고유명사로 바꿔 누군가에게 귀속시켰지만 아직 상대와 합의하지 않았거나 그럴 필요가 없는 경우고요. 앞서 말한 ‘아가씨’가 상대와 합의한 '귀속된 확정 고유명사'고, ‘아기씨’가 합의 없는 '귀속한 임시 고유명사'였어요. 담화 글에 필요해서 특정 누군가를 지칭하는 고유명사화로 귀속시켰지만, 상대와 합의는 하지 않았죠.”


“그럼 개방된 건요?”


“귀속의 반대예요. 특정 누군가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전부 개방이에요. 은수는 나를 나타내는 고유명사지만, 누구나 나를 부를 때 쓸 수 있죠. 그래서 개방된 고유명사예요. 이건 호칭의 대상이 나라서 합의가 필요 없으니 당연히 확정이고, 그래서 '개방된 확정 고유명사'가 돼요. 현수 같은 경우에는 아기씨처럼 글에 필요해서 나에게 귀속시킨 고유명사죠. 청자가 나니 당연히 확정이지만, 그 글에서만 쓰이는 이름이기 때문에 개방이 아닌 '귀속된 확정 고유명사'가 돼요. 그러니 누가 지금 나를 현수라고 부를 수 없죠. 현수는 그 글에서 나오는 나만 나타내니까.”


“엄청 복잡하네요.”


“처음 듣고 이해하기에는 좀 어렵죠?”


“근데 이해는 다 하고 넘어가고 있어요. 그럼 만약에 귀속된 고유명사? 아무튼 그걸 그 귀속시킨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사용하면 어떻게 해요?”


“한 번도 그래 본 적은 없지만, 만약 누군가 모르고 사용한다면 설명은 하죠. ‘나는 이런 사정으로 당신에게 이렇게 불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호칭으로 대체해주세요’라고요. 그럼 보통은 바꿔주죠. 근데도 계속 그 호칭을 사용하거나, 혹은 사정을 들었음에도 무슨 이유인지 그 호칭을 고집하면 그땐 정중하게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해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그래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요?”


“그럼 안 봐요. 때려죽여도 나를 반드시 그 호칭으로 불러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사유를 가진 것이 아니라면 내가 말한 이 부분은 부탁하면 들어줘야 하는 범위예요. 즉, 종속 관계가 아닌 자유 관계에서 호칭을 선택하는 권한은 화자보다 청자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 역시 상대에게 그리 하고요. 그런데도 다른 사유 없이 계속 고집을 부리면 나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다고 판단해요. 그럼 그 자리가 그 사람과 나의 마지막인 거죠.”


“그럼 이게 마지막. 대명사를 고유명사로 만드는 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방법?”


“네. 누군가가 그러고 싶다고 하면.”


“간단한데. 누가 내게 ‘그러고 싶다’고 하고, 거기에 내가 ‘그래’ 하면 돼요.”


“그게 다예요?”


“그게 다예요.”


“그렇구나.”


“근데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 도령이라는 호칭이 괜찮은 것 같아서요.”


“이런. 나는 맞서 부를 만한 게 아직 생각 안 나는데.”


“그건 상관없어요. 내가 저 호칭에 집착한다는 게 중요하지. 귀속된 고유명사가 아니라 다행이에요. 왠지 그럴 것 같았는데.”


“아기씨에 대응하던 호칭이었는데 이제는 그 관계 자체가 사라져서. 합의한 것도 아니니 정리할 것도 없고. 그래서 담화 글에만 남았을 뿐, 귀속과 고유명사는 풀렸죠.”


“그건 다행이네요. 그럼 그럽시다.”


“뭘요?”


“도령.”


“…그래요.”


“왜 웃어요?”


“취향이 독특하다 싶어서.”


“내가 좀 구한말 스타일이에요.”


“그쪽 말고.”


“뭐 어때요. 내가 좋으면 됐지.”












“근데 웬 도령? 조선 시대 스타일인가?”


“귀엽잖아요, 도령.”


“허. 이 여자 위험한 취향이 있나 보네.”


“스톱. 그거 내놔요.”


“먹게?”


“아니, 버리게.”


“한 입 남았는데?”


“안 돼. 위험한 취향을 가진 여자는 그래도 버릴 거야.”


“잘못했어요. 정상적 취향의 사람은 줬다 뺏는 거 안 해요.”


“그러니까 나는 위험한, 악! 뱉어!”


“아. 맛있다.”


“내가 앞으로 다른 맛 다 사줘도 그건 다신 안 사줄 거야.”


“엉? 난 이것만 먹는데?”


“신 게 뭐 있었지? 앞으로는 레인보우 샤베트나 체리 쥬빌레만 사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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