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평소부터 생각했던 건데.”
“뭘요?”
“난 돈 모으는 건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응? 무슨 말이에요?”
“있는 건 나름 낭비 없이 잘 쓰는데 모으는 건… 아니다, 나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뭐야, 돈을 못 모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돈이 없으면 안 버는 거거나, 아니면 벌어놓고 다 쓰는 거지.”
“그런가? 맞네.”
“근데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아요. 우리 회사에 비슷한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
“내가 되게 좋아하는 분인데.”
“그 상사 분?”
“네. 진짜 멋진 사람이에요. 근데 얼마 전에, 진짜 예고도 징조도 없이 갑자기 결혼을 했어요.”
“그래서요?”
“회사 사람들 다 놀랐어요. 정말 5년 안에는 결혼도 안 하고 일만 할 것 같은 사람이었거든요. 근데 결혼한 상대가 아직 직장이 없어요.”
“으음.”
“상대가 뭘 하는지 정확히 말을 안 해줘서 나도 자세히는 몰라요. 얼핏 듣기론 뭐 준비한다고 들었어요. 아무튼 결혼하고 그분은 계속 일하고, 상대는 집안일하고. 근데.”
“근데?”
“이상하게 그분이 뭐랄까, 그때 나는 이해 못했는데, 그냥 굉장히 편해 보였어요. 상대가 돈을 안 버니까 혼자 벌어서 결혼 생활을 하는데도 결혼하기 전보다 편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거예요. 왜 그럴까. 그때의 나라면 아예 결혼을 안 하거나, 아니면 닦달해서 얼른 취직을 시키거나, 그것도 안 되면 상대랑 끝장나게 싸우고 이혼을 하거나 할 텐데. 근데 그때, 그분 이하 우리들끼리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내가 슬쩍 물어보니까 그분이 그러셨어요.”
“뭐라고요?”
“상대는 돈을 버는 것보다 모으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고.”
“흠.”
“그땐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도령과 얼마 전부터 다시 보기 시작하고 몇 번 만났을 때, 문득 그분 말이 떠올랐어요.”
“어떤 말? 방금 그거?”
“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분이 사랑에 미쳤나 싶었어요. 근데 계속 지켜봤더니 뭔가 조금씩 알겠더라고요. 그분은 사실 혼자 오래 지냈고, 직급도 높아서, 그러면 으레 쌓이는 돈이 있거든요. 사람이 혼자서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뭐랄까, 되게 알량하고 부질없고, 어디에 쓰기 애매하지만 그래도 해외여행 정도는 갈 수 있는 목돈이 통장에 알아서 쌓여요. 근데 그분은, 친해지기 전에는 몰랐는데 가까워지고 보니 모아둔 돈이 없는 거예요. 나는 처음에 그분한테 무슨 돈 드는 취미가 있나, 명품을 좋아하셔서 새끼를 치시나, 그랬는데 집에 가도 비싼 가방도 없고, 구두도 없고, 그렇다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 술을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고, 만나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그렇다고 인테리어를 계절마다 한 번씩 바꾸는 것도 아니고, 집에 빚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일반적인 관점에서 돈이 샐 만한 구멍이 하나도 없는데 모아둔 돈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솔직하게 물어봤어요. 왜 모아둔 게 없냐고. 근데 그분이 알싸하게 취해서 그러더라고요. 자긴 돈을 못 모은다고.”
“왜요?”
“자기는 돈을 벌면 벌었지, 모을 수는 없대요. 이상하게 한 달 내내 집에만 있어도, 매일 나가서 지갑을 열었던 달이랑 비교해보면 월말에 잔고가 비슷하대요.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이리저리 돈이 샌대요. 근데 그걸 막을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하나 같이 다 필요하고, 그걸 안 하면 내가 나로서 멀쩡히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 수 없는 것들이라고. 보면 별 거 없어요. 그냥 친구 만나서 밥 먹고, 가끔 술 마시고, 후배들 밥 사주고, 화장품이랑 옷 사고, 영화 보고 나들이 가고. 남들 다 하는 그런 건데 이상하게 그걸 더 해도 덜 해도 항상 비슷하대요.”
“그렇구나.”
“그러다가 결혼한 상대를 만났는데, 이상하게 상대를 만나고 나서부터 잔고가 차오르더래요. 연적금, 주택청약, 보험, 월세, 부모님 용돈, 생활세금, 통신비 같은 고정지출 다 빠지고 계속 비슷하던 잔고가, 어느 날부터 늘어나는 거예요. 이상하죠. 돈 안 버는 상대를 만나서 돈을 더 쓰면 더 썼지, 덜 쓰진 않았을 텐데. 근데 이상하게 한 달, 또 한 달 지날수록 계속 늘었대요. 우리가 사귀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아무리 따져 봐도 딱히 다른 점도 모르겠고. 그래서 하루는 대놓고 물어봤대요. 내가 당신을 만나고 나서부터 지금 이렇다. 근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상대가 그랬대요.”
“뭐라고요?”
“당신은 이만 원과 사만 원이 별 차이 없는데, 나는 그 사이에 오천 원이 네 개나 들어간다고. 그 차이뿐이라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더래요. 그분은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거지. 이만 천 원과 이만 구천 원은 같은 이만 원 대고, 삼만 오천 원과 사만 오천 원은 모두 사만 원 근처라고만 여겨요. 돈을 일정 이하로 못 쪼개는 거야. 그러니 머리로는 두 배라는 걸 알아도, 쓸 때는 그게 구분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결혼했대요. 아직 준비 중이고, 뭐 합격한 것도 아닌데.”
“흐음.”
“그분 말을 듣고 나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바뀌었다기 보단 못하던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해야 하나. 도령이나 그분 표현을 빌리면 나는 돈을 버는 사람이에요. 솔직히 내 또래 치고 많이 버는 편이에요. 그리고 이것저것 하면서 잘 모아요. 적금부터 주식까지 골고루. 그래서인지, 그분 상대 같은 사람은 아니더라도, 내 신랑감에 대한 기준? 배우자에 대한 생각? 그런 게 좀 바뀌었어요. 내가 잘 버니까 사실 남편까지 나만큼 잘 벌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물론 둘 다 잘 벌면 좋죠. 돈 많은 거 싫은 사람은 없으니까. 근데 나는 지금 내가 버는 걸로도 나 하나, 만약 결혼한다고 해도 둘까지는 무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남편으로 누군가를 찾는다면, 돈을 잘 버는 사람보다, 조금 벌어도 잘 쓰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잘 쓰는 사람은 어떤 거예요?”
“표현이 이상했어요?”
“아니요. 긍정적인 의미로 놀라서. 일단 당신 얘기부터 들려줘요.”
“음… 돈을 잘 쓰는 사람은, 뭐랄까. 으, 갑자기 말하려고 하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냥, 나는 돈을 잘 못써요!”
“응?”
“나는 같은 돈을 써도 늘 후회해요.”
“아.”
“버는 건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번 돈을 남들과 똑같이 쓰고 나면 늘 후회를 해요. 남들과 비교해보면 이상하게 아쉬움이 남아요. 이거 말고 다른 걸 할 걸. 여기에 꼭 쓸 필요가 있었을까. 늘 그래요. 그게 심해지다 보니 언제부턴가 쓰지 않고 모으고만 있어요. 내가 살고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기본적인 것만 빼놓고. 나는 영화도 잘 안 보고, 물건도 잘 안 사고, 친구들과 여행을 가거나 술을 한 잔 하거나, 아니면 정말 흥청망청 쓰거나, 그런 것들을 모두 끊고 그냥 집에 혼자만 있어요. 그나마 우리 아기들한테 들어가는 돈만 아깝지가 않지, 나머지는 쓰면 쓸수록 아까워져서.”
“어쩐지 집이 고양이 테마파크 같더라.”
“쓰고 나서 아쉽지 않으려니까 방향이 자꾸 그쪽으로 쏠리더라고요. 나는 많이 버는 거지, 쉽게 버는 건 아니니까. 어렵고 힘들게 번 돈을 헛되게 쓴다고 생각하면 속에서 불이 나요. 그래서 안 썼더니 잔고는 차오르는데 반대로 내 생활이 말라 가는 거예요. 제대로 사는 것 같지도 않고, 돈을 왜 버는 건가 싶고. 그래서 좀 써야겠다 싶어서 지갑을 열면 다시 왕창 나가요. 그럼 또 후회하고. 계속 그 반복이라 돈이 있어도 못 쓰는 딜레마에 빠졌어요.”
“그렇구나.”
“반응이 왜 그래요?”
“아니에요. 그래서요?”
“그래서 어느 순간, 나는 내 배우자, 남자 친구 말고 남편으로서 어느 점을 가장 먼저 보게 되냐면, 돈을 얼마 버는지가 아니라 번 돈을 어떻게 쓰는지를 보게 되는 것 같아요. 후회 없이, 현명하게 잘 쓰는 사람. 그건 똑같이 100만 원이 있으면 내가 쓰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게 돈을 사용하는 거예요. 그분이 결혼한 상대처럼 잔고를 불려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단지 나보다만 가치 있게 써주면 돼요. 나는 100만 원을 쓰면 그걸 다 소비하고 나서 나 혼자만 웃고 있어요. 때론 울고 있기도 해요. 근데 내 남편은 나와 똑같이 100만 원을 쓰면 그와 나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이 웃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솔직히 그 사람 연봉이 적어도 돼요. 아니면 그냥 집안일해도 돼요. 내가 벌어다 주면 돼요. 그럼 그는 그걸 우리,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주변 모두를 위해 가치 있게 활용하면 돼요. 말하자면, 그게 내 내조인 거예요. 외조라고 해야 하나.”
“마인드 보니 인기 많을 만하네. 남자들이 좋아하겠다.”
“이런 말은 남한테 안 하죠. 똥파리 꼬일 일 있나.”
“하긴. 뭐 어쨌든, 그렇구나.”
“나름 나의 부끄러운 단점을 고백한 건데, 당신 표정은 전혀 다른 얼굴이네요.”
“아니, 좀 놀라서.”
“왜 놀라요?”
“나는 이 주제로 이십 대 초반부터 삼십 대 후반까지 수십 명과 대화를 했지만, 보통 서른이 넘고 결혼 후 삼심 년을 어찌 꾸릴지 고민한 사람만 이만큼 세세하고 심층적인 대답을 했거든요. 내가 어떤지로 시작해서 상대가 어떨지로 끝나는 대답은 스물여섯에게는 처음 들었어요. 그때는 보통 나와 일과 돈의 상관관계나, 내 성향이 유입과 소유와 소모 중 어디에 특화됐는지 같은 건 고민 안 하지. 먹고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벌거나, 할 수 있으면 남이 벌어다 주길 바라니까. 나도 열아홉부터 일을 했지만 당신 나이 때 그랬고."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당신에게는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게 가장 놀랄 일이지요. 덕분에 귀한 경험 했네요. 잘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