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도령, 핸드폰 어디다 버려놨기에 이리 늦어?”
“미안. 화장실 다녀왔어.”
“어딘데? 카페?”
“응. 배 아파서 응아 하고 왔어.”
“우와, 여기까지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도령은 장도 참 건강해.”
“건강하지 않아서 냄새가 엄청 났어.”
“그러니까 운동 좀 해. 뭐하고 있었어?”
“일단 아까 오후쯤 나와서 여기서 좀 놀다가, 친구 만나서 맥주 한 잔 하고, 친구 보낸 뒤에 다시 들어와서 글 쓰는 중.”
“뭐? 친구 만났어?”
“…응. 잠깐.”
“그런 말 없었잖아.”
“응.”
“뭐야, 이 배신자. 우리 누구 만나기 전에 누구 만난다고 먼저 말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응. 그랬어.”
“그건 우리가 정한 약속이지?”
“응.”
“그럼 그 약속 어긴 거네.”
“응.”
“…속상하려고 하네. 누구 만났어?”
“베프.”
“만난 게 베프 씨 아니었으면 진짜 엄청 싸웠다. 베프 씨한테 고맙다고 해.”
“응. 꼭 할게.”
“왜 그랬어?”
“…….”
“왜 미리 말 안 했어? 원래 이런 거 칼 같은 사람이잖아.”
“솔직하게 말해서?”
“이 상황에서 솔직하게 말 안 하면 싸우자는 거니까, 솔직하게 말해.”
“겁났어.”
“뭐가?”
“친구 만난다고 말하는 게.”
“왜?”
“우리 오늘까지 삼일 동안 친구 문제로 다퉜잖아. 누구 하나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친구가 많은 편인 나랑 친구가 적은 편인 당신이랑 같이 지내다 보니까. 내가 친구들 만나러 갈 때마다 당신은 소외감 느꼈고. 그것뿐만 아니라 다른 이런저런 일이 겹쳐서 결국 크게 터지긴 했지만, 어쨌든 주요 골자는 친구 문제였으니까. 그래서 나도 서로 진정될 때까지 당분간 누구 만나지 말아야겠다 싶었어. 근데 여자 친구랑 헤어졌대. 안 갈 수도 없고, 가자니 말을 해야 하는데. 점심에 겨우 정리 끝내서 둘 다 감정 수습하는 중인데, 거기다 대고 바로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할 수가 없었어. 한 시간 만에, 꺼져 가는 불에 석유 붙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일단 만나고, 그리고 헤어질 때쯤이면 당신도 어느 정도 감정 수습이 될 시간이니까 그때 말해야지 한 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까 말 안 되는 것 같아. 너무 내 위주로 생각했어.”
“내 말이. 그럴 거면 약속은 왜 있는 건데. 사정 따라서 바뀔 거면 애초에 약속할 필요가 없잖아. 물론 약속에도 융통성을 발휘할 수는 있지. 하지만 그건 그 약속을 어기기 전에 발휘해야 하는 거지, 다 저지르고 난 후에 설거지하듯 발휘하는 게 아니잖아.”
“응, 맞아.”
“내가 화가 나는 것은 그거야. 그래, 우리 싸웠어. 삼일 동안 연차로 심하게 싸웠지. 아마 우리 만나고 나서 이렇게 심하게 다툰 것은 처음일 거야. 그래서? 그 싸웠다는 게 약속을 못 지킬 이유로 합당해? 아니지, 싸운 것은 싸운 거고, 화해하고 넘어간 뒤로는 그건 이미 끝난 거야. 그럼 그 간격이 한 시간이든 30초든 약속한 것은 지켜야지. 그 이야기를 들은 내가 또 화를 낼까 봐 무서워서 말을 못 했다고? 도대체 날 얼마나 무시하는 거야. 당신 혼자만의 생각으로 날 재단하고 판단하고, ‘아마 얜 그럴 거야’라면서 혼자서 마음대로 약속도 저버리고. 난 그게 화가 나. 내가 당신한테 아직도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 것 같아서. 왜 날 좀 더 믿어주지 않아? 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 분별할 수 있는 애라고 생각 안 해줘? 그래, 싸운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도 미안해. 당신이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지. 당신이 친구를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날 버려뒀던 것도 아니야. 그냥… 당신이 친구들을 만나러 나갈 때마다 집에 혼자 있는 내가 너무 싫었어. 난 왜 친구도 없나. 이런 화창한 날 난 왜 집에서 당신 연락만 기다리고 있나. 하지만 그건 당신 탓은 아니지. 내 책임이니까. 그래도 속상해서 그냥 투정 부린 게 하필 다른 것과 겹쳐서 일이 커진 것뿐이야. 싸우게 된 것뿐이지. 그렇다고, 그런 투정 한 번 부렸다고 날 그런 분간도 없는 여자로 만드는 건 아니잖아. 난 그게 속상해. 왜 날 믿어주지 않아?”
“…미안해.”
“응, 이건 도령이 잘못한 게 맞아.”
“마음대로 재단한 건 미안해. 하지만 믿지 않은 건 아니야. 분명 나중에 알게 되면 화가 나겠지만, 반드시 왜 그런지 물어볼 거라 생각했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약속을 어기지 않을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최소한 이유라도 물어보겠지. 그때 이 일련의 과정을 말하면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어. 그건… 그래. 지극히 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으로 생각한 것이지만 당신을 믿기 때문에 그런 거야.”
“그래. 도령이 왜 그랬는지 들었고, 도령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걸 이해하니까 지금 이 정도인 거지, 그것마저 이해하지 못했으면 난 진짜 폭발했을 거야.”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래, 그럼 이 문제는 이걸로 끝.”
“끝? 끝이라고?”
“응, 끝이야. 뭐가 사태를 꼬았는지 둘 다 알고, 나 속상한 거 화난 거 도령한테 다 말했고. 거기에 도령은 사과했고 나는 도령의 속사정을 이해했어. 그럼 끝난 거지. 물론 감정은 남아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잔향 같은 거니까. 원인이 치워지고 난 후에 찌꺼기 같은 감정이잖아. 그런데 지금 또 이 찌꺼기로 다른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아. 그 후회는 지난 삼일 동안 절절하게 했어. 그러니 이 문제는 여기서 끝. 나도 이 문제에 대한 감정으로 다른 일에 영향 끼치지 않도록 주의할 테니, 도령도 지금 섣부르게 이 감정 들춰지지 않게 조심해줘.”
“알았어.”
“샤워나 하고 올래. 따듯한 물 쬐면 좀 괜찮아지겠지.”
“…고마워.”
“뭐가?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나는 잘한 일이 너무 많아서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모르겠네.”
“왜 그랬는지 물어봐줘서.”
“그건 당연한 거잖아.”
“나도 그게 당연하다 생각하고 살아왔지만, 지금까지 그걸 당연하게 받아본 적이 없었거든. 언제나 난 당연하게 그걸 해왔지만, 상대는 당연하게 그걸 안 했어.”
“또 재단하네. 그럼 내가 이유도 안 물어본 채 덮어두고 화낼 줄 알았어?”
“아니라고 생각하고, 믿으니까 한 거야. 근데 막상 이렇게 물어봐주니 좀 놀랐어.”
“나 참,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다시 화내?”
“아니. 그냥,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 물어봐줘서 고맙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줘서 고맙다고.”
“……도령이 어찌 살았는지 나도 아니까. 물어보지도 않은 채 덮어두고 어려운 사람이라 재단하는, 그런 주변의 폭력 같은 시선에 평생을 갇혀서 살아왔다는 거 알아. 그래서 도령을 만난 처음부터 나 역시 가장 다짐을 하고,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한 부분도 그 부분이고. 난 계속 물어봐야지. 이야기를 들어야지.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어떤 감정을 표출하는지 잘 살펴봐야지. 지금껏 그리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번도 그걸 포기한 적은 없었어. 더 알기 위해 노력했고, 여러 가지를 계속 물었고, 봐도 모르겠으면 다시 물어봤어. 나는 그랬는데, 쉽지 않았지만 늘 그래 왔는데. 정작 도령이 이번에 나한테 그래 주지 않아서 그게 속상했어.”
“응.”
“아, 끝내 놓고 자꾸 말이 빙빙 도네. 그만 할래. 나 샤워하고 올게.”
“응, 다녀와.”
“…도령.”
“응.”
“주눅 들어 있지 마. 잘하다가 어쩌다 한 번 실수한 거잖아. 난 도령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지만, 도령 역시 사람이라 실수를 하는 거야.”
“응.”
“이번에 실수했으면 다음에 하지 않으면 돼. 설령 같은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오늘보다 좀 더 빨리 깨닫고 좀 더 빨리 잘못했다 말하면 돼. 처음부터 계속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는 거잖아. 난 도령 좋아하니까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 오래 걸려도 괜찮아. 단지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만 보여줘.”
“응. 그럴게.”
“그래. 그러면 그렇게 풀 죽어있을 필요 없지? 나 샤워하는 동안 도령도 담배 한 대 피우면서 훌훌 털어버려. 그리고 평소의 시건방지고 잘난척하는 도령으로 돌아와. 난 그 모습이 제일 멋있더라.”
“…지금 아기씨가 하는 그런 말들, 그게 화난 사람이 화나게 한 사람에게 하기에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혹시 알고 있어?”
“알아. 그러니 내가 도령한테 아까운 멋진 여자지. 나 진짜 씻고 올게.”
2013.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