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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 중 일

[그데담 007] 살아가는 방식

by 이한얼






“다 했어?”


“아니, 잠시 보류.”


“왜?”


“고쳐도 고쳐도 끝이 없어.”


“원래 퇴고란 게 그렇잖아.”


“그렇긴 한데, 이건 뭐랄까… 좀 달라.”


“어떻게?”


“고치면 고칠수록 점점 원래 내 글과 멀어지는 것 같아.”


“왜?”


“처음에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한 글이었는데. 고칠수록 점점 이상해져. 의미가 반전되는 것까진 아닌데 점점 퇴색되는 느낌이야.”


“근데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애당초 그 글을 처음 쓸 때의 아기씨와, 지금 그 글을 고치는 아기씨는 다른 사람이니까. 다음에 고칠 아기씨는 또 다른 사람이고. 그러다 보면 글도 점점 변해가잖아. 단순히 문맥이나 오자만 고치는 것이 아니니까. 퇴고하던 중 떠오르는 것은 넣고 보기 싫은 것은 빼는 첨삭도 있으니 초고와는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지. 그렇다고 무조건 퇴색되는 건 아니겠지만.”


“도령의 경우는 어때? 도령도 그래?”


“퇴고를 말하는 거야?”


“응.”


“나한테 퇴고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은 또 처음이네. 나도 비슷해. 과정만 조금 다를 테고.”


“어떻게?”


“보통 퇴고를 그렇게 하지? 초고가 있고, 시간이 좀 지난 뒤 읽어보면서 눈에 밟히는 것을 고치고. 그리고 저장하고. 다시 시간이 지나서 또 읽으면서 고치고, 저장하고. 맞지?”


“뭐, 나는 일단 그래.”


“비슷하네. 근데 내가 원래 퇴고를 잘 안 하려고 하잖아. 아예 안 하거나, 혹 하더라도 오자나 문맥 정도만 살짝 다듬는 선에서 그치고. 왜인지는 알지?”


“응. 초고의 그 느낌을 좋아해서 손을 잘 안 댄다면서.”


“맞아. 나는 사람이 순간순간 변해가는 동물이라 생각하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글 역시 마찬가지라고 봐.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밖에 쓸 수 없는 것이고, 마침표를 찍었다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왜, 그런 거 있잖아. 한참 글을 쓰다가 뭐 때문이든 쓰던 것을 훅하니 날려버린 거야. 진짜 분통 터지는 일이지. 근데 머릿속에 그 몇 페이지나 되는 내용이 완벽하게는 기억나지 않아도 얼추 남아있어서 다시 비슷하게 적는다고 해봐. 어때?”


“완전 최악이야. 다시 쓰기도 싫을뿐더러, 쓰더라도 전혀 다른 느낌이지.”


“그렇지. 나도 아직 어리고 경험이 많지 않아서 이런 말을 하기엔 부족하겠지만, 나는 글을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지점에 나를 찔러 넣는 행위라고 생각해. 그 순간과 그 자리, 그리고 나로 만든. 마치 삼색 불꽃놀이 같은 거지. 그 완성본이 초고인 거야. 초고의 의미는 잘 다듬어 놓은 퇴고로 짜낼 수 없는 것 같아.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니까. 그래서 난 초고를 무척 존중하는 편이야. 퇴고가 아닌 초고가 진짜 내 실력이라고 생각해. 초고 자체를 제대로 써낼 수 없으면 소용없다고 봐. 단지 내 실력이 그 정도뿐이라는 거지. 그래서 계속 글을 쓰고 또 쓰는 것도 멋진 퇴고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굳이 퇴고가 필요 없는 초고를 쓸 수 있게 연습하는 거고.”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보통은 보다 나은 글을 위해 초고를 다듬는 거잖아. 처음부터 퇴고가 필요 없는 초고를 쓸 수 있고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누구도 굳이 퇴고를 하지는 않겠지.”


“맞아. 방금 내 말은 그저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일 뿐이고, 부족한 나 역시도 지금 퇴고를 하니까. 아기씨는 그 방법을 물어본 거고.”


“응.”


“사실 다른 말을 한 것 같지만, 이 역시 대답의 일부야. 나는 그만큼 초고를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퇴고를 할 때도 고치고 저장하고, 다시 고치고 저장하는 반복은 아니야. 초고인 A가 있을 때 어느 날 그것을 손봐서 B라는 퇴고가 나왔다고 하자. 그럼 나는 A와 B를 따로 저장해.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초고인 A를 꺼내서 다시 퇴고를 해.”


“B가 아니라?”


“응. 퇴고를 다시 퇴고하는 게 아니라, 초고를 다시 퇴고하는 거야. 그러면 C라는 전혀 다른 퇴고가 나오지. 그럼 다시 놔두다가 다시 A를 퇴고해서 D라는 새로운 퇴고를 만들어. 즉, 요점은 그거야. 한 번 바꾸고, 바꾼 것을 다시 바꾸고, 그것을 또 바꾸고 하다가 바꾸고 싶지 않은 것까지 바꾸게 될까 두려운 거야. 건들 것과 아닌 것의 경계를 명확히 잡을 실력도 부족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실력과 상관없이 ‘내가 바꾸고 싶지 않던 것’이 나중에는 ‘바꿔야 할 것’이 되는 것에 대한 걱정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처음 내가 그것을 쓸 때의 마음은 네모난 핫도그를 만드는 거였어. 그래서 만들었지. 근데 다 만들고 보니 빵가루 껍질이 생각보다 너무 두꺼운 거야. 좀 깎아야겠어. 처음에는 소시지는 건들지 않고 껍질만 조금 뜯어내야지 했는데, 하다 보니까 소시지까지 조금 뜯어먹은 거야. 그건 구분을 못한 내 실수지. 있어야 할 것이 없으니 허전하잖아. 그래서 파인 소시지 위에 다른 햄을 잘라 덧대고, 그 부분을 피해서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른 부분을 뜯고 있는데 문득, 소시지 뒤쪽이 조금 탄 것 같아. 처음 튀겼을 때는 저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저걸 뜯어내고 싶어. 그래서 살짝 뜯었지. 그 부분 역시 빈자리가 휑해 다른 햄을 얹어. 그리고 다른 쪽 껍질을 뜯다가 이번에는 이쪽 부분에 딱딱한 소시지를 조금 뜯어낸 후 또 햄을 얹고. 껍질도 너무 많이 뜯었다 싶어서 다시 빵가루를 조금 덧씌우고. 그러다 보니 결국 둥그란 핫도그가 됐어. 내가 처음 생각했던 핫도그의 모양과 전혀 다르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퇴고의 반복은 이게 문제야. 글에 손을 댈 때마다 그 순간의 나는 계속 다른 사람이니, 글과 퇴고에 대한 기준도 계속 달라져서 처음에는 건들지 말아야 할 부분이 나중에는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되는 거지. 그 수정은 그 순간의 내 생각으로, 내 의지로 하는 거니 문제가 없어. 그러니 냉큼 바꾸게 돼.”


“어렵네.”


“어렵지.”


“그래서?”


“매 순간 변해가는 나를 붙들 수 없으니 글을 붙드는 거지. 두 가지 방식으로 강제 좌표를 잡는 거야. 첫 번째는 초고라는 시간. 두 번째는 10퍼센트라는 장소. 초고를 최대 10퍼센트 정도만 바꾸는 거야. 그리고 나중에 다시 초고를 꺼내 또 10퍼센트만 바꾸고. 그렇게 1차 퇴고가 여러 개가 되면, 이제는 그것들끼리 비교해봐. 그중에 여러 퇴고에 공통적으로 살아남은 부분은 그 글에서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이 되고, 공통적으로 수정된 부분은 바꿔도 될 것이 되지. 그렇게 여러 퇴고가 합쳐진 첫 번째 2차 퇴고가 나오면 그건 잠시 보관해두고 다시 초고를 건드리는, 앞에 했던 과정을 다시 밟는 거야. 여러 퇴고의 평균을 내는 이 과정의 핵심은, ‘처음 글을 썼을 때의 나’라는 본질이 단 한 번, 일순간의 판단으로 날아가는 것을 방지하는 거야. 어느 퇴고 중에 마음에 안 들어서 날렸다 해도, 다른 퇴고에서 살아남을 수 있잖아. 결국, 나 역시 글을 고친다는 점에서 퇴고는 맞지만 그 과정이 아기씨와는 좀 다른 셈이야. 퇴고를 하는 모든 기준은 초고이고, 초고는 모든 퇴고의 모태가 되는 거지. 그렇게 나온 마지막 퇴고도 다시 초고를 비교해보고.”


“엄청 복잡하네.”


“번거롭지. 근데 아직까지는 스스로 이 방법이 가장 낫다고 생각해.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변할 수밖에 없고, 퇴고를 안 해도 되는 실력도 아니니까. 그러니 꼭 손을 대야 한다면, 그나마 계속 변해가는 나를 모아서 평균을 내는 수밖에.”


“그럼 그 퇴고 하나하나는, 초고로부터 마지막 퇴고를 하는 그 순간까지 도령이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 알려주는 각자의 지표도 되는 거야?”


“그건 아기씨 방식. 내 방식은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내가 그 당시의 나를 보는 시선이 어떻게 달라져 가는지를 알 수 있지.”


“그런 방법도 있구나.”


“나는 그래. 이 방법이 정답이라 할 수는 없지만, 지금 내게는 최선이야. 그리고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최선을 가지고 있을 거야. 그게 우리 방식보다 더 좋을 수도 있고.”


“그럼 지금껏 내가 봤던 도령의 글들이, 그런 과정을 거쳤던 글인 거야?"


“그건 아니야. 남에게 보이는 글은 보통 초고이거나 혹은 오자와 맥락만 간단히 고친 것들이야. 퇴고를 거듭한 글은 아직 남에게 보이기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좀 어렵네. 맨살 드러내는 것처럼.”


“문득 떠오른 건데, 글을 쓰는 방식에 그 사람이 묻어나듯, 퇴고 역시 그 사람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구나.”


“그렇지. 만드는 것도, 깎는 것도, 버리는 것마저 주체를 벗어나기 어렵지. 없던 것을 있도록 만드는 거라면 더욱 그럴 테고. 그래서 내가 글, 음악, 그림, 조각, 사진 같은 것들을 좋아하나 봐. 언어, 음표, 물감, 매개체, 빛 등의 실물을 빌려 마음속 추상을 존재로 빚는 일은 행위자를 오롯이 드러낼 수 있으니까. 물론 간혹 너무 심하게 드러나는 부작용도 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고, 숨기고 싶어도 드러나고, 그로 인해 남뿐만 아니라 나 역시 지금껏 몰랐던 나를 알 수 있게 돼. 어느 때는 심상을 복사하듯 너무 많이 드러나서 치부를 들킨 듯 부끄럽기도 하고, 그걸 자주 접하는 주변 사람을 물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이라는 본체가 창작품이라는 그림자에 갇히기도 해. 그래도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드러내며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끊을 수 없는 중독과 같지. 그러니 어느 순간부터는 창작 행위가 아닌 생명유지 활동처럼 되는가 봐. 안 하면 죽지는 않지만 마치 죽은 것처럼 살게 되니까.”


“그래서 그런지 퇴고에 대해서만 들은 게 아니라 도령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도령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들은 기분이야. 속마음은 숨기고 남에게 보여도 된다고 도장 찍은 것들만 드러내는 도령의 그런 성향 있잖아. 글조차도 퇴고라는 마음을 숨기고 초고라는 생각만 보이는 것처럼. 물론 누구나 그렇겠지만 도령은 그게 유독 심하니까. 어째 얘기를 들을수록 좀 답답해진다 했더니, 그래서였구나.”


“그런가. 속상하라고 말한 것은 아닌데."


“속상하진 않는데. 글쎄, 잘 모르겠다. 좀 복잡한 기분이야. 한편으로는 방금 도령이 말한 것처럼 도령의 말과 글을 오래 접하다 보니, 이런 단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서적 사육을 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허, 마냥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멀리 간 거 아니신가."


“서로 영향을 줄 수 없는 관계란 없으니까. 안 좋게 생각하면 끝도 없겠지. 그리고 이건 말하다 보니 떠오른 건데. 도령이 가진 퇴고의 방식이랑, 도령의 초심을 찾는 방식이랑도 좀 비슷한 것 같아.”


“아마 그렇겠지. 보통 기준이나 진리 같은 것들은 얇은 꼬챙이 같아서, 비슷한 가치 수십 개를 관통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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