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령.”
“응.”
“도령은 나한테 항상 최선이었어?”
“응? 갑자기 무슨 말이야?”
“예전에 누가 나한테 물어봤는데, 문득 생각나서.”
“…글쎄. 아니라고 대답해야겠네.”
“왜?”
“아기씨가 나한테 의지하거나 무엇인가를 물어볼 때, 난 늘 즉답을 해줬으니까.”
“그게 왜 최선이 아닌 거야?”
“몇 년 되었나. 예전에 나도 아버지랑 비슷한 문답을 한 적이 있었어. 나도 그리 물었지. 당신은 내게 늘 최선이었냐고. 몇 초 후, 아버지는 아니라고 하셨어. 왜냐고 여쭤보니 당신은 내게 늘 즉답만을 줬다는 거야. 심사숙고하고 다시 생각해낸 답이 아니라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을 말했대. 대답을 하는 이 순간까지도 말이야.”
“그래서 도령도 그렇게 생각해?”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지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모든 경우에서 심사숙고가 정답이진 않겠지. 때로는 즉답이 더 정확할 때도 있을 거야. 그건 반대로 모든 경우에서 즉답이 정답은 아닌 거니까. 어쨌든 질문을 받은 나는 아기씨의 문제에 대해 다른 것을 모두 제쳐두고 그것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잖아. 찬찬히 다방면에서 살펴본 것도 아니고, 그런 질문을 하는 아기씨의 심정에 충분히 공감한 것도 아니고, 시간을 두고 내가 내린 답을 검토한 것도 아니야. 그래서 늘 즉답했던 나는 아기씨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거지.”
“난… 잘 모르겠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른 거니까. 아기씨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다를 뿐, 틀린 것은 아니지.”
“그러면 도령은 왜 내게 최선이지 않았어? 스스로 정한 최선의 기준이 명확한데도?”
“그거야 사람은 타인에게 최선일 수 없으니까.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이든 다른 일이든 마찬가지로, 사람이 최선일 수 있는 부분은 스스로밖에 없어. 그조차도 단지 가능하다는 거지, 어지간하면 스스로에게도 최선이기 힘들지.”
“도령은 최선이라는 범위가 좁구나.”
“최선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다 그래. 협소하고 깊게 정해놨지.”
“그럼 사는 게 힘들지 않아?”
“그렇지. 그래도 그래야 한다고 스스로 정해놨으니까, 견뎌야지. 나뿐 아닌 누구든 그리 힘들게 살고 있는 것처럼.”
“그게 도령이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방법이야?”
“그런 셈이지. 내게는 최선을, 남에게는 차선을. 거기까지밖에 할 수 없으니까 거기까지만 하는 거야. 그런 점이 참 다행이면서도, 가끔 안타깝지.”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그게 최선의 정의 아니야?”
“맞아. 그래서 나한테 최선을 다하고 남에게 차선을 다하는 게 내가 가진 최선이야.”
“도령은 ‘스스로에게는 짜고 남에게는 관대한’ 스타일이구나.”
“반대로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짠’ 스타일이기도 하지. 어느 기준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