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령.”
“왜?”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 이별해왔어?”
“나랑 헤어지려고? 위자료부터 가져와.”
“헤어지지도 않을 거지만, 위자료도 안 줄 거야.”
“농담이야. 근데 갑자기 그건 왜?”
“그냥. 내가 첫 번째 여자 친구도 아니잖아.”
“보자, 몇 번째더라.”
“거기서 하나만 더 접으면 접은 손가락 다 부러트린다.”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면 해피엔딩.”
“응?”
“이게 내가 이별하는 스타일이야. 이별에 해피엔딩이 어디 있겠냐만, 사람이잖아. 헤어져도 살아야지. 그래야 미련이 덕지덕지 남은 그 사람을 다시 만나든 아니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든 하지. 그래서 내 이별엔 항상 희망이 따라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라든가. ‘더 좋은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될 거야’라든가. 어쨌든 긍정적인 미래를 그리며 이별하게 돼.”
“좀 괴로운 스타일이네.”
“그렇지. 괴롭지 않은 이별은 없지만 말이야. 그 희망이 나를 더 괴롭히는 고문이 되기도 하고, 때론 스스로를 다독이는 핑계가 되기도 하고, 인연의 단절이 가져오는 통증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도 하고 그래. 어쨌든 나는 희망이 없으면 누구 하고도 못 헤어져. 그게 진짜든 가짜든. 설령 껍데기뿐인 거짓 희망이라 해도 어쩔 수 없어. 거짓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면서도 진짜인 것처럼 철썩 같이 믿고 매달리는 경우가 많아.”
“그럼 항상 그런 식으로 누군가와 이별했어?”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그건 왜?”
“사람마다 이별의 방식은 다 다르니까. 상대가 내 방식에 맞춰줄 때도 있었고, 내가 상대에게 맞출 때도 있었고.”
“그런 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겉으로 보이는 게 누구의 이별 방식인가는 별 상관없어. 중요한 건 겉으로 드러난 방식과 상관없이, 두 사람이 이별을 할 때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별한다는 거야. 겉으로 드러난 건 단지 어느 한쪽에 맞춘 것뿐이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그럴 리가. 내게 이 개념을 알려준 게 아기씨인데.”
“내가? 그랬나.”
“응. 다른 얘기 하다가.”
“그래도 바로 와 닿지가 않은 걸.”
“내가 말을 너무 어렵게 꼬았나.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 예전 여자 친구 쪽에서 먼저 이별을 통보했는데, 이 여자는 고민할 수 있는 거 다 하고, 자기가 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보기 전까지는 티도 안 내다가, 그걸 다 하면 정말 끝이었어. 뒤도 안 돌아보고 훗날을 기약하지도 않지. 마치 다음 날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돌이킴이 없었어. 그런 사람이었지. 근데 나랑은 정 반대잖아. 헤어질 거라 상상조차 안 했었으니까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 정말 하늘이 노래지면서 세상이 무너졌어. 안 된다고, 절대 안 된다고 그랬어.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아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나 혼자 중얼거리는데, 그 사람이 내게 그랬어. 일 년 뒤에,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만나자고. 그때 우리는 고등학생이었으니까. 내가 정말이냐고 물으니 정말이라며 웃었어. 그 얘기 듣고 겨우 겨우 그 집에서 나왔지. 그리고 그 뒤에 몇 번이나 달리는 차에 뛰어들고 싶을 때도 그 약속 하나로 견뎌냈어.”
“그래서 다시 만났어?”
“아니. 그리고 끝이었어. 그 사람을 본 건 그 날이 마지막이었지. 처음부터 그 사람에게 그 약속은 의미가 없었던 거야. 그 사람은 본인의 방식으로 헤어졌고, 나는 나대로 헤어진 거지. 단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게 그 사람은 공수표를 준 거야. 나는 그 공수표를 목숨처럼 끌어안고 이후의 긴 시간들을 버텨낸 거고. 이제와 보면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지, 무슨 방식으로 헤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사람이 사람과 헤어질 때는 본인의 방식이 아니고서는 절대 인연을 단절시키지 못해. 그래서 원치 않은 이별은 시간이 걸리는 거야. 상대의 방식으로 불쑥 들이닥친 걸 실컷 부정하고 밀어내다가, 결국 내 방식대로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미련을 놓는 거지. 만약 그때 그 사람이 공수표를 주지 않았더라도, 나는 어떻게라도 거짓 희망을 만들어내 끌어안았을 거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좋은 대학, 훌륭한 직장, 시간이 지나면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런 식으로. 그 사람에게 있어 나와의 인연은 그 날이 끝이었는데.”
“그렇구나.”
“어차피 속으로는 자신의 방식이 아니면 납득 못하는 게 인간이라, 겉으로는 어느 방식으로 헤어져도 상관없어. 지금 이 헤어짐이 결국 좋을지 나쁠지,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날지 못 만날지, 인간이 그런 것까지는 모르지. 그러니 상대가 무슨 소리를 해도 맞춰주는 거야. 돌아서서 가는 길, 외로울지언정 마음이라도 조금 덜 아프라고. 무너지고 싶을 때 힘내서 조금 더 살아보라고. 그렇게 그 사람은 그 순간 이별의 방식을 내게 맞춰준 거고, 나도 살다가 남에게 맞춰줄 수 있고. 그런 거지.”
“왠지 슬프다. 이별하는 것도 슬픈데, 서로 방식마저 다르다는 게. 한 명은 상대에게 맞추느라 아프고, 나머지 한 명은 거짓 맞춤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 받아들이고. 그러고도 결국 마음속으로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별하고.”
“원래 그런 거야. 두 사람이 만나서 사귈 때도 완벽히 부합될 수 없듯이, 헤어질 때마저 마찬가지야. 애초에 인간 자체가 남과 많을 것을 나눌 수 없게 설계됐으니까. 독립 개체인 인간이 가진 슬픈 한계지.”
2013.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