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구.”
“왜요?”
“처음에 봤을 때는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어. 고작 스물인데 혼자 여행을 오고.”
“…….”
“그러다 올해 초, 몇 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는 아주 단단해 보이는 사람이었어. 아직 스물여섯인데 이미 사회에 본인의 자리를 만들고, 유지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여느 성인처럼. 물론 어딘가 흐트러진 느낌이 없지는 않았지만.”
“…….”
“그러다가 스물일곱을 앞둔 최근에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싶었어. 경직되는 대신 강직해지고, 날카롭기만 하던 눈빛이 동글게 또렷해지고, 건조하게 뻑뻑하던 생각에 부드러운 찰기가 생기는 걸 보면서 당신이라는 사람은 아주 빠르게 멋있어지는구나 감탄했어. 우스갯소리로, 일 년만 늦게 마주쳤으면 우리는 못 만날 수도 있었겠다 싶었는데.”
“싶었는데?”
“심하긴 한가 보네. 내가 봤던 것 중에 가장 우울해 보이네.”
“그래요?”
“사람이 와락 꺾인 것처럼, 착 가라앉아 보여요.”
“그렇구나. 사람 분위기에 예민한 편이죠?”
“아주.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신선할 정도야. 근데 혹여나,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응. 나도 사람인데 이러기도 저러기도 하는 거지.”
“좋은 자세야.”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해줘요.”
“후회는 실수에서 온다는 말까지 했었죠.”
“네.”
“예전에 그런 글을 쓴 적이 있어요. ‘하고자 하는 것’과 ‘했던 것’에 대한 괴리가 사람을 과거에 묶어두고, 무슨 수를 써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인간은 후회를 한다,라고.”
“하고자 하는 것과 했던 것의 괴리?”
“내가 생각하는 ‘이건 이렇게 해야 돼’라는 것이 있죠. 어떤 행동을 하기 전이든 하고 난 후든, 인간에게는 늘 모든 것에 대한 어떤 기준치와 예상 도달점이 있어요. 그것을 설정해놓아야만 무엇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죠. 근데 ‘이렇게 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실제로 했던 행동은 ‘그렇지 않은’ 거야. 혹은 ‘그렇지 않았던’ 거죠. 그러면 인간은 그 생각과 행동의 간극만큼 자신의 행위를 ‘실수’라고 판단을 내려요. 8만큼 하려고 했는데 5밖에 못했으면 3이라는 실수가 남은 거지. 근데 그것을 바로 수정할 수 있거나 아직 수정할 여지가 남았으면 괜찮아요. 후회도 하기 전에 ‘고치면 되지’라는 탈출구가 존재하니까. 근데 벌써 흘러가 버려서 혹은 시간에 떠밀려 지나가서 그것을 고칠 수 없을 때, 더는 손도 못 대고 그냥 그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할 때, 그때 인간은 후회라는 감정을 느끼게 돼요. 그것은 마음의 멍울이자 기억의 오점 같은 것이죠.”
“…끝이에요?”
“아니.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아서, 기다리는 중.”
“마저 말해줘요.”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 후회라는 감정을 되도록 느끼지 않으려고 해요.”
“왜요?”
“이미 내가 바꿀 수 없는 범위로 넘어가버려서 생각할수록 긍정적인 전망보다 부정적인 감정이 더 많이 들거든. 자책과 자괴감이 들고, 스스로 못난 부분만 계속 눈에 밟히고, 단점만 점점 부각되고. 끝내는 나 외의 다른 어떤 것을 원망하거나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도 해요. 게다가 그런 생각들이 한두 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도돌이표처럼 계속 처음으로 돌아가면서 반복되는 거죠. 그럼 결국 전부 내 손해더라고요. 나를 갉아먹는 거예요.”
“…….”
“나는 이것을 지극히 ‘받아들이는 방식’, 즉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생각을 해요. 나는 인간이니 당연히 실수를 하죠. 그러니 후회라는 감정이 들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같은 과정을 거쳐 같은 감정이 들어도 그것을 좀 다르게 받아들이려고 해요.”
“어떻게요?”
“나를 좀 덜 갉아먹고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는 ‘내가 한 행위에 책임을 진다’라는 평소 신념으로 내 후회를 무마해요. ‘후회해봤자 소용없다!’라고 나 자신에게 강력하게 못을 박는 거죠. 그럼 똑같은 과정과 감정을 건너와도 최소한 도돌이표는 찍지 않게 돼요. 내가 하고자 하는 건 이런 건데, 나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네. 왜 그랬을까? 그래, 이런 점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거구나.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 끝. 너무 익숙한 과정이죠?”
“누구나 그러지 않아요?”
“그렇죠. 누구나 그런 과정을 거쳐 결국 같은 결론을 내요. 하지만 스스로에게 얼마나 강력하게 못박느냐에 따라 도돌이표의 개수가 정해져요. 아주 오래오래 돌고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번도 되돌지 않고 바로 오는 사람도 있죠. 나는 후자가 되도록 훈련을 한 거예요. 하지만 그 단거리 질주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키워드가 있어요. 혹시 그게 뭔 줄 알아요?”
“내가 본 도령 글에는 ‘왜 그랬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적혀있었어요.”
“맞아요. 내가 왜 실수한 건지. 뭐 때문에 내가 하고자 한 것과 다른 행동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해요. 이유를 알아야 원인을 찾을 수 있고, 원인을 알아야 대처를 하고, 대처를 해야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다짐을 할 수 있죠. 반드시 그럴 거라는 ‘미래의 사실’이 아니라 ‘다짐’을요. 그래서 나는 내 실수에 대한 이유를 알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후회를 하는데 그걸 후회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짧게 하는 거죠. 큰 걸음으로 빠르게 스무 번 앞으로 나간다면 그건 ‘달리기’지만, 두세 번만 나가면 그건 ‘달리기’라고 부를 수 없잖아요. ‘도약’이나 ‘멀리 뛰기’에 가깝지. 그런 셈이에요.”
“듣다 보니 이런 글 있던 거 기억난다. 난 지금 그걸 자세히 풀어서 들은 거네요.”
“맞아요. 혹시 궁금한 거 있어요?”
“아니요. 지금은 없어요.”
“그럼 다시 돌아와서, 나는 후회라는 것을 안 해요. 아주 짧게만 해서 스스로 그것을 후회라고 정의하지 않죠. 물론 내 실수에 대한 이유를 모를 때는 나도 후회할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서른 해쯤 살면서 그런 경우는 딱 네 번,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어요. 그래서 태반은 후회 없이 살아왔고 살고 있죠. 후회에 대한 내가 가진 프로세스는 단순해요. 첫째, 내가 실수를 했구나. 둘째, 이래서 그랬구나. 셋째, 내 생각과 의지로 한 것이니 내가 한 행위와 결과에 책임을 지자. 끝이에요. 이런 과정을 정립해서 내 사고체계 일부로 만들어놓으면 좋은 점이 두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방금 말한 ‘없다고 할 만큼 후회 적은 삶을 살고 있다’라는 것. 두 번째는.”
“두 번째는?”
“두 번째는 그런 과정마저도 즐길 수 있다는 거죠.”
“그런 과정?”
“실수에 대한 후회를 하는 과정마저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처음 말했던 것이 이미 발생한 마이너스의 크기를 줄이는 과정이면, 이건 그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뒤집는 과정이에요.”
“어째서요?”
“예를 들어 볼게요. 어떤 사람이 있어요. 내 지인이라고 칠게요. 이 사람이 내일 힘든 일을 하러 간대. 어려운 일인데,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고 합시다. 근데 사람 손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해요. 그래서 나는 긴 고민 없이 ‘그럼 내일 내가 도와줄게’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내일이 됐어요. 지인을 따라갔는데 이게 내 생각보다 훨씬, 몇 배는 힘든 거야. 적당히 몸 쓰다 오면 될 줄 알았는데 그런 수준이 아니라 막노동 수준인 거지. 그럼 나는 그쯤에서 후회를 해요. ‘이 정도’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만큼’이나 해야 하네. 괜히 온다고 했다. 이렇게 힘들 줄 미리 알았으면 어제 그냥 모른 척할걸. 할 수만 있으면 어제로 돌아가서 되돌리고 싶다. 지금이라도 그냥 집에 가고 싶어. 이런 순서로 의식이 흘러가요. 하지만 무엇 하나 그럴 수 없죠. 어제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일의 양을 내 마음대로 줄일 수도 없어요. 지금 당장 손에 쥔 똥 기저귀를 내팽개치고 집으로 갈 수도 없어요. 지인과의 관계, 시설 관리자가 느낄 곤란, 다른 봉사자에게 가중되는 부담 등등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자존심 때문이라도. 여기가 첫 번째 분기점이에요. 나에게 후회에 대한 프로세스가 없었다면 그 상태 그 마음을 가지고 일이 끝날 때까지 계속 힘들어하며 후회하게 돼요. 불만을 궁시렁거리고, 내내 인상을 쓰다가, 종래는 어제 내게 말을 한 지인, 그리고 내게 이런 일을 시키는 이 시설의 사람들, 더 나아가 똥오줌을 못 가리는 그들에게까지 원망의 화살을 돌려요. 그러면 끝나고 나서 개운함은 아주 조금뿐이에요. 태반은 드디어 끝났다는 해방감, 내가 왜 왔을까 하는 자책, 그리고 다음부터는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비장한 결심, 오늘 고생만 했다 싶은 허탈감만 품고 집으로 돌아가요. 약간의 비약을 덜어내더라도 정도의 차이일 뿐 저렇게 흘러가요. 그럼 결국 오늘 하루는 내게 엉망인 날이 돼요. 물론 나중이 되면 또 어떻게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죠. 시간이 많이 지나 이 힘듦과 괴로움의 기억에 옅어진 후라면 오늘을 좋게 추억할지도 몰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최소한 지금 당장은 내게 오늘은 최악의 날이에요. 후회뿐이죠.”
“…….”
“근데 프로세스를 정확히 만들어놓은 나라면 아까 분기점 이후부터 다를 거예요. 지인과의 관계, 혼란, 부담, 스스로의 자존심 등등의 이유로 도중에 그만 둘 수 없던 나는, 아주 짧은 후회의 과정을 거쳐 ‘내가 결정한 거 책임을 진다!’라는 다짐을 해요. 사실 그건 그 당시 거의 오기로 빚어낸 감정이야.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 오기 섞인 다짐에서 파생되는 감정은 불만이나 원망이 아닌 위안이라는 점이에요. ‘그래도 끝나고 나면, 시간 지나고 나면 이런 고생들도 모두 좋은 추억을 되겠지?’라는 긍정적인 기대를 억지로라도 되뇌게 돼요. 이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에요. 인간의 생리 상, 투덜거릴 수도 없으면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낙관적인 전망을 가져다 붙여야 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서 정신에 얹히는 부담이 너무 커지니까. 그 알량한 인간의 생리가 우리에게 위안 이상의 좋은 현상을 가져다주는 거예요. 여기가 두 번째 분기점이에요. '지금 힘든 이 일도 언젠가 끝이 날 거야.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훗날 나는 분명 오늘을 좋게 추억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이 일이 아까만큼 힘들게 느껴지지 않아요. 결국 나에게 좋은 경험이자 추억이 될 테니까. 심지어 되레 재밌어질 때도 있어요. '내가 지금 이 힘든 일을 하는 이유가 뭐지?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야. 지인을 위해서도 아니야. 결국 나를 위해서잖아. 오늘은 언젠가 좋은 경험과 추억이 될 거잖아. 근데 이런 힘듦으로 만든 추억은 필요없다고? 없어도 된다고? 아니 그럼 뭐 어쩔 거야? 당장 그만 두고 갈 수 있어? 없잖아. 그럼 지금와서는 추억으로 삼는 수밖에 없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그게 나한테 가장 이득이지?' 항상 말했듯이 인간에게 1순위는 자신의 안위고, 그런 이기적인 인간에게 자신 이상의 동기부여가 없죠. 그럼 내 결정에 대한 책임감, 되돌릴 수 없는 현실, 그런 기대효과, 이 세 가지를 섞여서 그날 일을 그럭저럭 해낼 수 있어요.”
“근데 그 프로세스가 없어도 결국 같은 지점에 도달하지 않아요? 그 순간 후회하고 원망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후회에 대한 프로세스가 없는 사람들도 결국 추억으로 기억하게 되잖아요.”
“맞아요. 요점을 정확히 잡았어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도 그거예요. 잘 보면 후회에 대해 정립해놓은 사람이나 안 한 사람이나, 프로세스 유무와 상관없이 결국은 모두 같은 결과로 귀결돼요. 아까 말한 두 번째 분기점은 그래서 중요해요. '지금 힘들다'라는 시작점과 '결국 추억이 되었다'라는 종점은 양측 다 똑같아. 그러면 시작점에서 종점으로 가는 과정 동안 나는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건지, 어떤 감정으로 지낼 건지, 이게 이 프로세스의 핵심이에요. 시작점과 종점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느냐에 따라 과정은 전혀 다른 느낌이 돼요. ‘지금 힘들다- 결국 추억이 되었다’는 내내 그저 힘들다가 아주 나중에 추억이 돼요. 추억이 되기 전까지는 그저 불쾌하기만 한 기억이죠. 하지만 ‘결국 추억을 될 거야-지금 힘들다’는 스스로 퇴로를 막고, 인간의 생리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기대를 만들도록 하고, 그 기대가 미래의 감정을 빌려와서, 결국 지금 힘든 것을 경감해줘요. 즉, 현재와 미래의 구분 없이 내가 반드시 느낄 두 가지 감정의 순서를 바꾸면 현재에서 나중으로 흐르려던 생각의 방향을 미래에서 지금으로 흐르도록 바꿀 수 있어요. 그럼 현실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게 돼요. 당신 말대로 양쪽 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과정을 거쳐,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만, 현재를 내가 어떤 과정인지는 정반대인 거는 거예요. 지금 그저 힘들게만 버틸 것인지. 아니면 좀 덜 힘들게, 좀 더 쉽게, 어쩌면 즐겁기까지 할 것인지. 그리고 우리 인생은 온통 ‘지금’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 '지금'을 바꾼다는 것은 인생 전체를 바꾼다는 뜻과 같아요. 이것이 프로세스가 있을 때 두 번째 좋은 점인 '후회의 활용법'이에요. 첫 번째 좋은 점이었던 ‘후회의 양을 줄이는 것’이 후회 그 자체를 써먹는 일이라면, 이 '지금을 덜 힘들게 만드는 것'은 후회 뒤에 반드시 따라오는 부산물을 내가 유리한 방향으로 쓸 수 있도록 뒤집는 일이에요. 아까 말했듯 마이너스의 크기를 줄이는 것과,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것이죠.”
“...아까 ‘같은 과정을 거치지만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된다’는 말을 풀어낸 거구나.”
“맞아요. 후회라는 감정은 중요해요. 맨 처음 말했듯이 아주 훌륭한 이정표이자 화살표지. 그리고 동시에, 후회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을 보다 효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살게 해줘요. 후회를 느끼지 않으려고 그저 거부하기만 하면 후회는 후회대로 느끼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삶이 돼. 이런 식으로 써먹지 않으면 우리 일상은 똑같은 과정과 순서가 빚어내는 지난하기만 한 반복이 돼. 반대로 잘만 활용하면 사람이 꾀를 부리고 요령을 부리게 해서 내 하루와 내 일상을, 더 나아가 내 인생을 주무르고 다독이고 포장해줘요. 손해 보기 싫으니까. 힘들고 보람 없기 싫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은 후회를 또 하거나 새로운 후회를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이 포장은 질소뿐인 과대포장이 아니라 실제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거예요. 같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해서 결국 새로운 무엇을 얻게 만드는 거예요.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후회의 숨겨진 기능이에요. ‘사무중생유死無中生有’의 활용법 중 하나죠.”
“그건 뭐예요?”
“이건 내가 '무중생유' 개념을 조금 뒤틀어서 사용하는 어구인데, 간단히 말하면 '무중생유'가 내가 해석하기로는 '0'과 '+'간의 개념이라면, '사무중생유'는 '-'와 '+'간의 개념이에요. 즉 ‘가상의 마이너스로 실제의 플러스를 얻는 방법’이에요. ‘생각하기 나름’의 다른 말이기도 하고. 아무튼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것이 후회가 가진 본래의 의미이자 아까 말한 깊은 부분에 너무 깊게 빠지지 않게 하는 거라면, 방금 말한 부분은 높은 부분에서 너무 높게 튕기지 않게 잡아주는 거예요. 후회를 이런 방식으로도 활용하지 않으면 인간의 삶은 너무 많은 실수와,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으로만 점철되거든. 그것은 그대로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멍울이 되지. 그래서 요즘 보면 그런 사람이 자주 보여요. 안 좋았던 모든 기억을 트라우마로 남기고, 모든 실수를 징크스로 만드는 사람들.”
“…….”
“일단 얼추 끝났는데.”
“응. 근데….”
“근데?”
“도령이 말한 대로, 실제로 그게 잘 돼요, 도령은?”
“나는 만족스러울 정도로 잘 되고 있어요. 내가 후회 중일 때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부분은, 과거의 내 실수 자체도 아니고 바꿀 수 없이 미리 지나가버렸다는 점도 아니었어요. 그 상태로 계속 후회하고 있어야 하는 ‘당시의 내 상태’였어. 그게 나를 가장 힘들게 괴롭혔어요. 하지만 프로세스를 만들고 나서는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꾸면서 생각도 함께 바뀌었어. 그런 내 실수도, 바꿀 수 없는 과거도, 그래서 너무 힘든 지금 이 순간과 내 상태마저도 즐길 수 있게 되었어요. 이유를 모르니 후회를 하고 있지만 어쨌든 결국 이 모든 것은 경험이 되어 나를 이롭게 할 거고, 추억이 되어 내 일생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 생각이 후회 중인 나를 가장 많이 위로해주고 힘들었던 당시 내 현실을 달래줬어. 대부분의 크지 않은 후회들은 그렇게 해결했지.”
“…만약 어중간하지 않고 엄청 크면?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추억이 되지 않을 만큼 크면?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쓸 만한 방법을 찾지 못할 만큼 크면?”
“...그럼 뭐, 그건 욕 한 사발 걸쭉하게 내뱉으면서 일단은 견디는 수밖에 없지. 언젠가 지금 느끼는 마음의 크기가 작고 작아져서, 그 프로세스에 포함시킬 수 있을 만큼 작아질 때까지. 그건 나도 뭐 별 수가 없네.”
“도령에게도 그런 커다란 후회가 있었어?”
“…있었지.”
“도령은 어떻게 했어? 그냥 견뎠어? 지금도 견디고 있는 중이야?”
“예전보다 많이 작아졌지만, 그렇지, 아직은 견디는 중이야. 끝내 추억이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대신 내가 살아있는 동안 다음 사람에게 다시 그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렇구나.”
“…오늘 내가 한 말이 지금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을까?”
“…….”
“지금 당신에게 최대한 겹치는 부분이길 바랐는데, 아닌가.”
“아니요. 맞아요. 나는 사실, 아니….”
“…….”
“그냥… 서울에 올라온 지 6년이 조금 넘었어요. 내 고향도 가족도 친구와도 떨어져서, 나 혼자 긴 타향살이를 하느라… 좀 많이 지쳤나 봐.”
“…….”
“…….”
“......충남 여자가 향수병은 재미교포 급이네.”
“그러게. 고작 세 시간 거린데. 근데 이런 건 거리랑 상관없다 싶어.”
“그것도 그렇겠네. 아무튼, 그거뿐?”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그렇구나. 하긴 그건 집 떠난 사람들에게, 그리고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꾸준히 들이치는 파도 같은 감정이죠. 그러다 때때로 파도에 암석 절벽이 갈라지듯 돌 부스러기가 흩날리는 날이 있고. 그게 오늘이었어요?”
“네. 마침 비도 오고.”
“그러네. 타향살이를 하지 않는 나도 간혹 그런 심정에 몸 뒤척이는데, 당신은 오죽할까. 아직 어린 나이인데.”
“…….”
“…창 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
“그대의 핼쑥한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
“…….”
“…….”
“…아. 방심하고 있다가 터졌네. ㅋㅋ”
“나도. 이런 걸로 웃을지 몰랐어.”
“…고마워요”
“이번에야 말로, 별말씀을.”
201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