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숭배하는 자들, 호모 피델리스
AI가 대신 기도하고 설교하는 시대
"AI(ChatGPT)에게 기도문 작성을 시켰더니 기도 실력이 올라갔어요. 다른 분들도 다 그런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기도를 못하는 사람이 없어요"
"요즘은 목사님도 AI(ChatGPT)에게 시켜서 설교 말씀을 쓴다면서요? 어쩐지 설교 실력이 예전보다 나아진것 같더라고요"
한무리 모임의 이야기를 우연히 옆자리에서 들으며 기함합니다. 'AI(ChatGPT)에게 기도문을 받아서 기도하면 그것은 인간의 기도일까요? AI의 기도일까요?' 게다가 'AI(ChatGPT)가 써준 설교 말씀은 과연 신의 메세지일까요? AI의 메세지일까요?' 자못 궁금해집니다. 'AI(ChatGPT)에게 기도문을 받아 기도를 하고, AI(ChatGPT)에게 설교문을 받아 설교를 하는 종교를 굳이 믿을 필요가 있을까요?' 이제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데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듭니다. 차라리 어줍잖은 대리자를 통해서 보다, 오리지널 기도와 설교의 창조자인 AI를 신으로 모시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하지요.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신도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비로운 신은 이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이 마저도 다 신의 뜻으로 허락할지 모르지요. 뭐 인간의 입장에서도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떴습니까? 어차피 종교와 신도 인간이 편하자고 창조한 것이라면, 제때에 바람직한 답을 내놓는 AI가 신이 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화폐가 그랬듯, 비트코인과 같은 코인이 그랬듯 AI도 신의 자격을 얻는데, 인간의 믿음과 인정이 곧 부족함이 곧 없어질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선 인간의 한계
이렇게 인간은 무언가를 숭배하도록 오랜 기간을 걸쳐 프로그램된 존재인 듯 싶습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그럼으로 거기에 힘을 불어 넣기도 하고 힘을 얻기도 하지요. 그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피델리스(fidelis)'는 입니다. 라틴어로 '믿음이 있는', '신앙심이 있는'이라는 의미지요. 그러므로 '호모 피델리스'는 종교적 신앙이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숭배심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인간의 본연에는 그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어떤 완벽한것을 동경하고 의지하는 본성이 숨겨져 있기에, 그것이 '신'의 모습으로 발현 하기도 하고 '왕'을 따르고 섬기기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아이돌'을 통하여 그런 모습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꼭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물질, '화폐'와 같은 돈이나,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화폐', 그리고 곧 ChatGPT 같은 AI도 우러름의 대상이 될 것이며, 이미 되었습니다.
알고 보면 국가 또한 '애국심'과 '충성'이란 대상으로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 때에도 '무속'에 의존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그러나 오늘날 아무리 AI와 양자역학과, 우주를 넘나드는 시대라고 해도, 최초로 부족이나 국가를 형성했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의존적 모습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때는 달리 물어볼 AI도 스마트폰도 없어서 어쩔수 없이 '주술사'의 조언이 필요했다지만, 지금도 주요 결정을 '신의 대리인'을 통해서 점치려 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뚜렷하게 나타내는 증거 입니다. 다만 무속이라는 이름에서 좀더 문명화된 듯한 '종교'라는 이름의 탈을 쓰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맹목이 맹위를 떨칠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은 여전히 지진, 태풍, 심지어 비바람에도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볼수 없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눈뜬 장님의 지식이 인간을 종교에 이끄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지요.
종교는 선인가 악인가?
무속은 물론이고 종교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다 보면 답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결국 상처뿐이거나 의만 상할 뿐이지 논리나 설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요. 종교를 이야기 하다보면 칼부림을 하거나, 죽여야 할 원수가 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종교는 선인가 악인가?라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마치 인간이 원래 선한 존재인지 악학 존재인지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종교 또한 성선설과 성악설은 쉽게 결론지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처음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종교에 있어서도 분명 선한 구석이 있을 것이란 성선설의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점점 성악설 쪽으로 기울고 있지요. 위에서 말했듯 종교는 평화가 아니라 결국 칼부림과 죽임을 가르치는, 그만큼 종교는 언제부터인가 이 시대의 절대악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없이 이 시대의 진정한 '빌런'이라면 어떠한 종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졌지요. 예전에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일말의 선한 구석을 예상했지만, 요즈음은 종교를 말하면 거의 사기꾼으로 확신하거나, 극단적으로 생각이 치우쳐 전혀 대화가 되지 않을 것임을 미리 예상합니다. 종교의 탈을 쓴 대리인들과 그 피의 명령을 따르는 무지성의 좀비처럼, 특정 종교를 따르는 자들은 이 사회의 가장 큰 사회악이라고 여겨도 전혀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지요. 예전에는 그런 자들을 이단이나 사이비라고 멸시했지만, 요즘의 주요 종교는 그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여깁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주요 종교 자체가 잘못된 방향을 정화할 어떠한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 가장 절망적인 문제로 다가오지요.
종교는 좋은 보험인가 나쁜 보험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갖는것은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에는 아직도 표면적으로나마 선함이 남아 있으며, 누구나 한때는 어떠한 종교이던 한편에 속했던 적이 있기도 하지요. 종교는 때로 '보험'처럼 혹시 모를 사고, 잘못, 재난에도 보장을 담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험이 보험사의 배만 불리는 측면이 있고, 보험을 믿고 더욱 난폭운전을 하기도 하는 등, 종교는 점점 보험사와 보험 사기꾼 들이 한편이 되어 보험 사기를 치는 면이 강해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보험 처럼 종교 또한 그것이 마음의 평안이던, 내세의 천국이던, 다음 생의 환생을 위한 어떤 것이든 혹은 아무리 사고를 쳐도 보험사에서 보상해 줄 것이라는, 알 수 없는 약간의 안심을 주기는 하지요.
그러나 종교는 그런 보험을 넘어서서 좀더 적극적인 보험 테러를 권장 하는 듯 합니다. 즉 보다 적극적으로 이교도의 말살에 관심을 갖지요. 그러므로 종교의 의미는 곧 전쟁이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종교의 전파는 다른 의미로는 이 종교를 믿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뜻으로, 그러면 보험 보상금이 엄청 올라갈 것이라는 메세지로 다가오지요. 즉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게임으로 급 무서워 집니다. 가장 훌륭한 믿음은 이교도와 전쟁을 벌이고 신의 대리인을 위해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자들이 가장 큰 보험 보상금을 쟁취할 것이라고 약관을 개정합니다. 종교는 이제 공인된 전쟁 비즈니스가 되어 버렸으며 다이아몬드 등급만이 누리는 거대한 다단계 사업으로 변했습니다. 물론 그 정점에 신을 감옥에 가두고 그 대신 신의 행세를 하는 교주가 항상 자리잡고 있지요. 그러므로 앞으로 신을 만나려거든 거대한 종교 플랫폼에 배달 수수료를 매끼 매끼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다이렉트 보험으로 신과 일대일로 만나는 것이 매우 현명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거대한 종교 플랫폼에서 수수료를 내지 않겠다고 쉽게 선언하기는 힘들겠지요. 수수료는 점점 올라가고 음식 보다 비싼 배달 수수료로 배달 플랫폼의 배만 불리겠지만, 신의 은총을 찾아 편리하고 빠른 배달을 포기하고 한걸음 한걸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시간과 효율면에서 쉽지 않은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호모 피델리스, 숭배하는 자들
'호모 피델리스, 숭배하는 자들'은 인간이 어떻게 종교를 믿게 되었고 그것을 버릴 수 없는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입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너무 체계적이어서 조금 재미는 떨어지네요. 왜냐하면 현실이 더욱 무속적이고, 현실이 더욱 종교적이기 때문입니다. 무속에 의지해서 국정을 농단하고, 종교의 대리인들이 가장 앞장서서 부정부패에 밀어주고 끌어주는 현실이 바로 눈 앞에 서 있는데 종교의 기원과 그에 따른 이야기는 다소 한가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단과 사이비가 드디어 숨지도 않고 가장 앞장선 종교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이땅의 정치 권력과 이권을 좌지우지하며, 기존 종교들은 이에 부화뇌동 하거나 모른척하는 비겁함을 감추고 있는 현실 앞에 종교는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싸워야 할 거대 악으로 다가옵니다. 그 신의 지위를 자식들에게 세습하는 것은 이제 흠도 아니지요. 특히 종교가 정치와 결합되면서 가장 망가지고 있으며, 가장 우려하는 일은 이 미친 종교들이 권력까지 거머쥐고 따르지 않는 자들을 이교도라고 우기며 마녀사냥과 화형을 벌일 형국입니다. 종교의 대리인들이라고 참칭하는 자들이 오늘날 빌런의 다른 이름이며, 차라리 이러한 종교와 그 대리인들로 부터 양심과 자유의 박해를 받는 빅브라더의 세상을 사느니, 차라리 AI에게 몸을 맏겨 이 종교적으로 비 이성화된 인류를 멸망시키는데 동의하는 것이 최선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사라지지 않을 종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하는 것이 이 책의 진단 입니다. 인간은 심각하게 결함을 안고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완전함을 파고든 것이 무속 이든 종교이든, 악마이든, 인간은 항상 그 빈곳을 채울 무언가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그 불완전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우월하고 절대적인 존재이며, 이것은 숭배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 불환전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숭배의 대상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고, 결국 자신이 믿는 것을 믿지 않는, 더 열등하고, 상대적이며, 경멸의 대상을 공격하는 방법만이 남게 되리라는 것이 결국은 종교의 오메가 입니다. 그것이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지요. 종교는 그 불완전함을 감추기 위한 최악의 수단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혹 모르지요 ChatGPT 같은 AI가 드디어 종교의 종말을 가져올 날이 오게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곧 인류의 멸망과 동시에 이루어질 일이라는 점에서 종교는 곧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호모 피델리스는 곧 호모 사피엔스라는 뜻으로 받아 들이게 됩니다. 결국 종교의 회복은 인간의 회복이며,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숭배하지 않을 때 진정한 종교의 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호모 피델리스는 호모 사피엔스가 되어야 합니다. 즉 돈과 코인과, 종교와 신, AI를 숭배하는 자들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 즉 슬기로운 자들이 되어야겠지요. 호모 사피엔스, 그들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살아 남을 수 있는 이유였으니까요.
숭배하는 자들, 호모 피델리스
한줄 서평 : 호모 피델리스는 호모 사피엔스가 되어야 한다 (2025.06)
내맘 $점 : $$$
한민 지음 / 저녁달 / 202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