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이게 다 양자역학 때문이야
양자역학이란 무엇인가?
양자역학이라고 들어보셨을까요? 저는 이게 무슨 엄청난 과학인줄 생각했습니다. 양자 컴퓨터가 나오고, 양자 관련 주식이 나오고, 그러다가 갑자기 양자역학의 시대가 도래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지요. 왜냐하면 이 양자 역학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지금도 빠른 컴퓨터의 연산 능력이 양자컴퓨터의 등장으로 무한대로 빨라져, 그 무한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AI가 더 빨리 신의 능력에 접근하면 어쩌나 걱정하였습니다. 게다가 양자 역학 관련주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지요. 믿지도 사지도 않았습니다. 최첨단 과학의 시대에 원시시대를 사는 문과의 시각으로는 적어도 그랬습니다.
양자역학에 대해 알아볼까?
그래서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양자 역학을 한번 알아보기로 합니다. 그 방식은 역시 원시적으로 책을 통해서지요. 그래서 그나마 고양이가 그려진 조금 친근해 보이는, 그러나 양자 역학이라고 분명히 제목에 쓰인 한 책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양자역학은 고양이 그림만 그려진 게 아니라 진짜 '고양이'였었습니다. '개'도 아니고 '고양이'라니 양자역학의 세계는 역시 혼란스럽습니다. 책을 읽어 가는 내내 고양이가 있었다, 없었다, 살았다, 죽었다, 이런 내용이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양이의 존재론에 대한 선문답이 계속 오갔습니다. 과연 양자 역학은 도교의 무위자연 같은 것일까요?
슈레딩거의 고양이
양자역학에는 '슈레딩거의 고양이'라는 이상한 고양이가 한 마리 등장하는데 이것이 양자역학의 시작이자 끝인가 봅니다. 이 '고양이'가 살았냐, 죽었냐, 혹은 살았는데 죽었냐에 대한 논쟁이 양자역학의 모두라고 보이지요. 아 어디부터 잘못 이해한 것일까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최근도 아니고 무려 90년 전인 1935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양자 역학의 불완전성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사고 실험입니다.
밀폐된 상자 안에 고양이와 방사성 원소, 독성 물질이 담긴 병을 넣고, 방사성 물질이 붕괴하면 감지 망치가 작동해 독성 물질이 담긴 병이 깨져 고양이를 죽이는 구조입니다. 뭐 사실 이것은 특별한 실험이랄 것도 없습니다. 방사성 물질의 붕괴라는 절차가 복잡한 것처럼 보여서 그렇지 그냥 사건이 발생해서 독이 퍼지면 고양이가 죽는 것이고, 사건이 발생하지 않아서 독이 퍼지지 않으면 고양이가 살아있는 당연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철학이라고도 말하기 뭐 한 말장난이 등장합니다. 그 말장난은 여러 가지 이론으로 발전하는데 코펜하겐 이론에 따르면 관측 전 고양이는 생존과 사망 상태가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고 설명되며, 관측 시 확정에 의해 상태가 결정됩니다. 뭐 말이 복잡해서 그렇지 직접 보기 전에는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직 모르고 봐야 확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어의 이론에 따르면 관측자는 사람이 아닌 측정 장치로 간주되며, 이때 고양이의 상태가 이미 결정된 것으로 봅니다. 뭐 이것도 당연합니다. 그것을 꼭 봐야 알겠냐는 것이지요. 사람이 꼭 보지 않아도 측정 장치가 고양야기 독을 흡입하고 죽었다고 하면 벌써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세계 이론에 따르면 관측 시 고양이가 있는 우주가 분기되어 생존과 사망이 각각 존재하는 멀티버스 개념으로 해석됩니다. 이거야 말로 재미있는 것인데 세계는 고양이가 죽어있는 세계와, 살아있는 세계가 사실은 분리되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뭐 평행우주 이런 것입니다.
이 실험은 고양이로 이해하면 사실 혼란스럽지만 고양이 대신 '양자'를 대입하여 고양이 중첩 대신, 양자 중첩으로 설명하면 차라리 났습니다. 괜히 고양이를 끌어들여 과학이 도교가 되었지요. 그러나 이래 봬도 이 이론들은 세계의 경계를 탐구하는 대표적 사례로, 현대 양자역학 연구와 철학적 논쟁의 핵심 주제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양자역학자들 실망이야
그런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양자 역학은 분명 과학인줄 알았는데 철학 같고, 철학이지만 사이비 종교 같은 이상한 소리로도 들리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를 각각 주장했던 과학자들은 자신이 내세운 이론과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다른 과학자나 제자들과 평생 앙숙이었다는 찌질함이 슈레딩거의 고양이를 죽이기 위해 독성 물질이 담긴 병을 때리듯 머리를 내려 치리요. 솔직히 양자역학에 실망했습니다. 뛰어난 천재였을 것으로 여겼던 물리학자들이 이러한 선문답을 말하며 자신의 논거를 기득권처럼 지키기 위해 "흠칫뽕" 속 좁은 밴댕이처럼 삐져 있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손오공
책을 읽은 후 거의 최초로 답은 없고 혼란을 남겨둔 책이 남고 말았습니다. 역시 양자역학은 문과가 쉽게 탐낼만한 분야가 아니었는지도 모르지요. 다만 그래도 도움이 되었다면 드라마에서나 봤던 다중 우주(멀티 유니버스)에 대한 사고에 대한 힌트나 조금 얻어 갔다고 할까요? 다중 우주에 오가는 소설을 쓰고 그냥 양자 역학에 같다 붙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양자 역학에 관해서라면 아무리 헛소리라도 가능할 듯싶습니다. 고양이 대신 'Emile's Dog' 이론이라도 하나 만들어 낼 수 있을 듯싶지요. 이론은 양자 고양이 보다 더 뛰어날 자신이 있습니다. 분명 양자 역학자들보다 상상력은 뛰어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왕 분신술을 하는 고양이라면 이중 삼중이 아니라 백중 만중 멀티 손오공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다만 과학자들과 다른 것은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해 내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문학에서는 '양자'가 아리라 '다자' 역학도 가능하니까요.
그래도 고양이는 귀여우니까
그래도 양자역학에 대해서 읽었으므로 괜찮습니다. 앞으로 양자 역학 관련 주식을 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주식으로 돈을 잃어도 잃은 것과 동시에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이론을 시전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아니면 잃은 돈은 다른 세계에 존재해서 언젠가 다시 찾을 수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고양이를 볼 때마다 이 고양이는 다른 우주에서 존재하기도 하며, 이미 죽었거나 그러면서도 다른 세계에서 살아있고,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게 다 양자 역학 때문입니다. 그래도 고양이는 귀여우니까 괜찮습니다. 귀여운 건 무엇보다 역학이니까요.
이게 다 양자역학 때문이야
한줄 서평 : 양자역학은 개 아니라 고양이 (2025.06)
내맘 $점 : $$$
제레미 해리스 지음 / 박병철 옮김 / 문학수첩 (202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