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열두 번의 체크인
여행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행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행책에는 우선 글보다는 사진이 앞서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사진이 더욱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냐고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멋진 사진들로 날로 먹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막상 여행을 가 보면 그러한 사진조차도 실제로 보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여행이야말로 책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직접 가서 보고 느껴야 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뿐만 아니라 책에 나온 여행지를 가까운 시일 내에 방문할 계획이 아니라면 흥미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가 보지 못하니 책으로 라도 읽으면 좋을 것을 저렇게 좋은 곳에 가볼 계획도 희망도 없어서 화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을 만끽하고 있는 게다가 다소 허영이 묻어난 그런 글을 읽고 있노라면 여행으로 인해 기분이 좋아지긴커녕 우울해 지지요.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여행책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도 해외의 어느 곳을 다녀와서는 한껏 들떠 여행기를 떠들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풍광이 좋은 곳에 고즈넉이 앉아 와인이나 맥주를 한가하게 마시며 세상의 걱정일랑 미루어 두고 철학적 사색을 한 번쯤 늘어놓았을 기억에 부끄러워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또한 여행이기도 하지요. 여행은 흔히 돈 쓰러 가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먹고 죽을 돈은 없으면서도 그 잠시의 눈요기와 기억을 위해서 아낌없이 돈을 쓰는 것이 또한 여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배가 아픕니다. 나는 하지 못하는데 남이 그렇게 돈을 펑펑 쓰고 시간을 팍팍 축내가면서 쉽게 저지르기 힘든 모험을 밥 먹듯이 감행하는 모습이 몹시 꼴 보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유튜브에서는 호화로운 여행기보다는 짠내 나는 갈팡질팡 모험기가 더 인기를 끄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행책에 화가 나는 이유
아뿔싸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전혀 친해하지 않는 여행책을 골라 버렸지 뭐예요. 실수였음을 인정합니다. 다른 읽을 책이 마땅히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열두 번이라는 안정적인 숫자와, 체크인이라는 유혹의 단어에 홀딱 넘어가버렸지요. 그동안 여행이 그리워서였을까요? 아니면 책을 들쳐 보다 그 허영기 가득한 싫어한다는 사진들에 보이스, 아니 사이트피싱을 당해서였을까요? 아무튼 코로나 이후로는 여행을 떠나보지 못했기에 여행이 남의 일이 되어 버린 것은 사실인 듯싶습니다. 이제는 해외로 멀리 나갈 형편, 용기, 체력, 동경, 모든 것이 떨어지고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짠내 나는 모험기가 좋다지만 이제는 마법의 양탄자를 깔고, 타고, 누워서 호화로운 여행을 즐기고 싶어 지지요.
글은 저자가 유명 라디오 프로그램의 방송 작가라서 그런지 매끄럽습니다. 능숙한 여행 가이드처럼 여행지로 글을 유도해 가지요. 다만 방송을 듣지는 않아서 그런지 전혀 모르는 작가입니다. 그래서 유명세에 기대지 않고 더 객관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여행지는 시칠리아, 노르망디, 펠로폰네소스 등 이름만 들어도 내놓을만하게 모두 동경하는 여행지입니다. 이러한 보석 같은 곳들을 필자는 팔자 좋게도 무려 열두 번의 체크인을 통해 반짝이는 자랑을 늘어놓지요. 부족함이라는 전혀 없습니다. 작가는 여행에 아주 능숙해 보이고, 늘 함께하는 든든한 친구들이 동행하며 먹을 것 마실 것 부족함이 없이 풍족합니다. 아 작가가 부럽습니다. 원하는 만큼 즐기고 원하는 것을 먹고 마시고,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여유와, 지적 향연까지 있으니 이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화를 삭일 방법
책은 막상 잘 읽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화가 더 납니다. 기약할 수 없는 여행에 대한 계획과 저런 곳을 가 평생 보지도 못하고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을 수 있다는 분노 때문입니다. 예전에 여행을 떠나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참 힘들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렇게 좋은 자연환경에서 한 달씩 휴가로 즐기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구 반대편 천국 같은 곳이 있는 반면, 그 짧은 여행도 쉽게 떠나기 힘든 삶을 대부분 살고 있는 한때 지옥(헬)이라고 불렸던 나라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짧은 여행마저 사치로 여기고 꿈도 못 꾸고 평생 살던 곳을 한 번도 벗어나보지 못한 삶도 수없이 있었겠지요.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아마 대부분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은 여행에 더 집착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행기를 읽으며 화가난데에 작가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모두가 이 책을 잘못 선택해 화를 내며 읽고 있는 독자의 못된 결핍과 심술과 배아픔이 있을 뿐이지요. 낯선 여행지의 사진들과 글들은 항상 아름답게 보이지만 사진과 글들이 모든 것을 나타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익숙한 풍경조차도 영화 속에서 보면 너무 멋져 보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 영화와 달리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삶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벗어나 비현실의 세계로 빠져 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같은 공간을 두고 여행자는 비현실에, 원주민은 현실에 사는 커다란 간극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간극이 결국 시간여행, 아니 공간여행을 떠나는 환상의 원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글을 쓰고 나서도 화가 나는 것은 멈추지가 않습니다. 역시 이 화를 삭일 방법은 직접 여행을 떠나는 것 밖에 없을 듯하지요. 과연 어느 여행지가 이 화병을 싹 낫게 할 수 있으려나요?
열두 번의 체크인
한줄 서평 : 여행기를 읽으면 화가 난다 (2025.07)
내맘 $점 : $$$
김미라 지음 / 니케북스 (202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