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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존의 날씨

날마다 날씨

by Emile

긴 머리와 단발머리 사이의 어중간한 머리 길이의 상태를 '거지존'이라 하지요. 중단발 머리말입니다.

단발의 편함과 발랄함에서 샬랄라 한 긴 머리로 돌아가고 싶은데 머리를 기르는 것도 여간 귀찮고 인내해야 하는 기간이라서 그렇습니다. 수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다 긴 수염은 차라리 낫지만 조금 길기 시작한 수염은 거지꼴이 따로 없을 정도로 더 처참하지요.


요즘 나무들이 딱 '거지존'의 모습입니다. 날은 포근해지고 계절이 바뀌어가는데 나무에 잎새는 아직 하나도 없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덩그렁 가지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바람에 날아가지 않은 말라비틀어진 잎들이 붙어 있는 나무는 으스스하기도 하고 왕거지가 따로 없지요.


오늘은 비가 올 듯 잔뜩 흐린 데다가 강풍이 휘몰아치고 해는 구름이 삼켰다 뱉었다 하는 모양이 역시 '거지존'의 날씨입니다. 갑자기 기온이 올라 춥지도 않으니 정신도 흐려지며 오히려 더 우울감이 느껴지는 것이 거지 같은 기분이랄까요.


'거지존'은 인내의 시간입니다. 샤랄랄라 긴 머리를 휘날리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하고, 카이저수염의 꼬부라진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도 기다림이 필요하지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말라비틀어진 가지에서 초록빛 새잎이 돋아날 것을 믿고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하고, 구름과 바람을 아기고 새봄햇살이 찬란히 비추는 날을 기대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거지존'의 날씨라도 머리가 길었을 때의 찰랑임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꽃이 샤바랄랄라 피어 촤르르 나릴 날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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