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책장
어릴 적부터 집에는 커다란 나무 책장이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규모가 큰 책장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높이는 키보다 크고 넓이는 두 팔을 벌려야 끝이 닿을 듯이 느껴졌으므로 집안의 가구 중 이 나무 책장이 기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가득했습니다.
책장에는 그것의 용도가 처음부터 책장이었는지를 궁금케 하는 미닫이 문이 양쪽에 한 짝씩 두 짝이 있었고, 단의 개수만큼 유리창이 달려있었습니다. 문까지 달린 책장이었으면 고급 책장이 연상될 것 같지만, 이 책장은 매끄럽고 윤이나는 것보다는 직접 짜기라도 한 듯이 투박하게 보였다는 것이 가까울 듯하네요. 유리가 달린 미닫이 문은 여닫기가 조심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부드럽게 열리지도 않아 초칠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장을 그냥 사각형의 나무틀 책장이 아니라고 특징 지을 수 있는 부분은 여닫이 창문 말고도 제일 아래에 서랍이, 하나, 둘, 세 개나 나란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서랍이 세 개라는 기억은 이 책장의 넓이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단서이지요. 그리고 그 서랍들 밑으로는 높은 굽 구두를 신은 것처럼 밑단이 좀 높은 발이 있었습니다. 그 밑단 밑으로는 연필이나 펜 같은 것이 굴러 들어가 없어지곤 했지요.
그리고 하나, 둘, 셋, 넷, 단은 정확하지 않으나 요즘 책장과 비교해 보니 네 단쯤으로 그려지네요. 다섯 단이 아닌 것은 자라다 보니 이 책장보다 키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맨 아랫단에는 높이가 보다 높아 아주 큰 책이나 사전과 옥편 같은 뚱뚱이 책이 꽂혀 있었고 제일 윗 단은 높이가 낮아서 작은 책들이 올망졸망 주로 꽂혀 있었지요.
책장에는 항시 책이 한가득 넘치도록 꽂혀 있었습니다. 책 사이에 어떠한 장식물도 놓을 순간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은 채 오직 책만으로 그러하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책 복은 있었던 셈이었지요. 그러나 이것이 문제기도 했습니다.
책장은 서재 같은 방이 아니라 어울리지 않게 거실을 차지하고 있었고 집안의 크기에 비하여 너무 책이 많았었으니까요. 책이 많으면 책장을 늘리거나, 집안을 늘려서 서재를 만들면 되지만, 안타깝게도 책 복만 있었지 그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러므로 이 책장에 어떻게든 책을 밀어 넣었지만 곧 넘쳐나는 책을 어떻게든 처리할 방법을 궁리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
책들은 오래된 것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전공한 것으로 보이는 공학 책은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기도 했는데 이런 책들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것으로 보이는 소설 같은 책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에는 호기심이 좀 가긴 했지만 읽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요. 미루어 보건대 일찍이 이과는 전혀 아니었고 문과 적성이었는데 그 간단한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지요.
책장이란 공간은 어렵고 재미없는 책들로 가득한 것 같았지만 점차 흥미 있는 책들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책의 시절은 기억이 잘 나지 않고 친척형에게 물려받은 위인 전집이 한 동안 그 책장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생각이 나네요. 그리고 점차 문학전집 같은 소설류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책은 계속 늘어가는데 책장은 계속 이 하나였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요.
책들이 늘어감에 따라 책장에 책들의 입석 자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책들은 이제 가지런히 11자로만 앉지 못하고 인기가 떨어진 책들은 책장 유리 미닫이 문 밖으로 경치를 감상할 수 없는 책 뒤의 자리에 앉거나 누어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11자로 서 있는 책들 위에도 책들이 차곡히 누워서 열차에 올라야 하기도 했지요. 이제 책들은 비 좁은 책장 안에서 어떻게든 밀려 떨어지지 않겠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래도 입석이라도 괜찮다고 다 같이 책장에 매달려 앞으로 앉고 뒤로 앉고, 심지어 위에도 누워 달리는 이 나무 책장 열차는 낭만이 있었습니다. 다만 몇몇 책들이 이 책장 열차에서 떨어져 내리기 전까진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