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키 맞추기
사실 지난 글 '책은 왜 항상 등을 돌리고 있을까?'에서 책등에 대하여 살펴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책을 꽂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함이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책등'과 '책배' 그리고 '책머리'와 '책발'이 책의 어디쯤의 부위인지 정확히 알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책등과 책머리는 책을 꽂는 주요 기준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책은 책꽂이에 그냥 대충 가지런히 꽂으면 되는 것 같지만, 책에 진심인 까다로운 인간들에게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단 몇 권의 책이야 그냥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처럼 책 키 순서로 쭉 세워놓거나, 그냥 이름의 가나다 순으로, 혹은 먼저 온 선착순으로 꽂아 넣으면 그만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책장에 책이 가득, 그리고 정갈하게 꽂힌 멋진 모습을 갈구하는 이라면 더욱 책 꽂는 방법은 중요할 수밖에 없지요.
그것은 책들에게 "이제 너희들은 야생의 책한권이 아니라, 방목되어 길을 잃은 양떼가 아니라, 양치는 목동아 있는, "학교는 처음이지?"라도 담임 선생님이 있는, 더 나아가서는 당나라 군대가 아닌, 사령관이 있는, 그러므로 일사불란한 도열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적어도 책의 키에 맞추어 책을 꽂으려 했습니다. 서재를 갖춘 대군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친구들이 잘 훈련된 소수 정예군의 모습을 갖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그러려면 키가 삐뚤빼뚤 파도를 치면서 줄을 서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키 순서대로 질서를 잡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책을 몇 번이고 넣었다 뺐다 하며 키를 맞추었지요.
그런데 책은 책머리까지의 높이만 다른 것이 아니라, 책등과 책배 사이의 넓이도 다 달랐습니다.
책을 다 똑같은 사이즈로 만들면 이런 문제가 없을 터이지만, 역시 책들은 자유롭게 사유해서 그런지 자유로운 크기로 태어나는 존재들입니다. 실제로 서재를 멋지게 꾸미기를 원하는 옛 장서가들은 책을 똑같은 크기로 다시 인쇄해서 꽂아 넣었다지요. 책을 다시 만드는 김에 책의 크기는 물론이고 의상까지도 통일했다고 하네요.
이럴 경우 서재에 꽂힌 책은 정말 왕이나 귀족의 정규군 다운 위엄을 자랑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천편일률적이어서 책에 붙은 명찰이 아니면 책들이 잘 구분되지 않았을 것이지요. 이러한 호들갑은 단지 책을 장식품처럼 보이기 위한 목적이 너무 앞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같은 키에 같은 넓이에 같은 의상의 책이라?" 책마다의 개성은 보이지 않았고 장식용 군대에 불과했겠지요.
옛 장서가처럼 책을 다시 다 찍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책의 넓이 문제 또한 고민했어야 했습니다.
책을 책꽂이 가장 깊숙이 까지 밀어 넣어 꽂는 경우, 즉 책장의 등받이까지 말이지요, 그럴 경우 책의 책등 부터 책배까지의 넓이 차이 때문에, 책이 앞으로 튀어나온 녀석, 뒤로 들어간 녀석 등 갖가지 모습이 연출 되게 됩니다.
보통은 책의 키가 크면 책의 넓이도 넓은 편이어서 이것은 어느 정도 질서를 갖게 되는데, 문제는 키는 작은데 옆으로 넓이가 넓은 책들이나, 또는 넓이는 홀쭉한데 키만 큰 책들이 있지요. 이럴 경우 너무 도드라져 보여 그런 책은 키대로 꽂아 넣을 수는 없었습니다. 따로 빼내어 열외를 시켜야 했지요. 군 면제 사유입니다.
그러나 책을 책꽂이 안쪽까지 꽂아 넣는 것이 꼭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더라고요.
때로는 책을 책배가 책꽂이 등받이에, 아니 책배를 받치니 배받이라고 해야겠군요, 닿도록 깊게 꽂는 게 아니라, 책등을 기준으로 쭉 일렬을 맞추어 꽂고, 책장의 깊숙한 곳, 보이지 않는 책배 쪽은 공간을 띄워 놓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럴 경우 책은 책등이 일직선으로 도열해 있는 것으로 보여 훨씬 더 정열 된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비록 책배쪽은 책꽂이와 공간이 있어서 책에 조금 힘을 줄 경우 쑥 밀려들어 갈, 그래서 열이 흐트러질 위험이 있게 되긴 하지만, 옆 책들이 강한 정신력으로 잡아주면 어느 정도 뒤로 밀리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책을 꽂을 경우 책 뒤쪽과 책꽂이 사이에 공간이 생겨 뭔가 마치 숨 쉴 공간을 얻게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 방법은 책을 장식용으로 쭉 꽂아 놓을 경우 일열로 가지런히 늘어선 책등의 방어선이 무너지지 않으나, 책을 자주 넣었다 뺐다 할 경우 그 열이 흐트러지기 쉽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다시 책을 앞으로 끄집어내어 그때마다 책들끼리의 책등의 선을 가지런히 맞추어 주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지요.
그러므로 결국은 책을 그냥 책꽂이 안쪽까지 깊숙이 꽂아 넣어 보다 안정감이 있는 쪽을 택하게 됩니다.
서재에나 장식용으로 책을 꽂아 놓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책을 넣고 뺄 때마다 책등을 다시 맞추어 주어야 하는 수고를 반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책들은 책머리까지의 키에 맞추어 가지런히 꽂혀 있습니다. 넓이가 튀는 책들은 따로 모아 책장의 다른 칸에 꽂혀 있지요. 일종의 열외인 녀석들입니다. 그렇다고 면제는 안되고 신체 사이즈가 독특해 특수 훈련을 받아야 하지요.
그런데 책을 이렇게만 꽂다 보니 책장의 양쪽에 균형이 맞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책의 키 순서대로 쭉 세워놓았으므로 책장의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갈수록 책의 산 높이가 높아지는데, 왼편은 낮고 완만한 산이므로 무게가 더 가벼워 보이는데, 오른편은 높고 험준한 산이므로 무게가 더 무거워 보여, 전체 풍경으로 볼 때는 비 대칭으로 보인다는 단점이 있었지요.
그래서 이제 책장의 단에 따라 제일 윗 단은 왼편에서부터 키가 작은 책 순서대로, 그리고 책장의 그 다음 아랫단은 반대로 오른편에서부터 키가 작은 순서대로 책을 꼽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균형을 어떻게든 맞추어 보겠다고 책장의 가장자리에는 키가 큰 책을, 그리고 책장의 가운데 부분은 키가 작은 책을 꽂아, 가운데 계곡을 만들어 지혜의 샘물이 그리로 흐르게 배치하기도 했다지요.
아무튼 책들은 이렇게 수많은 훈련을 겪게 됨으로써 당나라군 처럼 보이는 것을 막고, 소수지만 질서 정연하게 도열한 정예군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안 그래도 집안에 많은 것이라고는 돈이 아닌 책뿐이었으므로 이렇게 라도 굴러다니는 책들로 위엄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지요.
책들을 꽂는 이 훈련법은 집안에서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도입되게 됩니다.
책상에 군기가 잔뜩 잘 잡힌 책들이 도열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몇 권 안 되는 책이라도 이 책상의 주인은 무척 까다롭고,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죠.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책상에 때아닌 책들이 도열해 있는 것을 못마땋애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별로 가진 것 없는 소수의 군대로 대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의 전략이었긴 하지만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