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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e Oct 05. 2022

고딕 양식의 책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책

떡제본과 양장본


지난 글 '적의 책 훈련법'에서 이야기 했듯이 책은 책머리부터 책발 까지 높이도 다 다르고, 책등에서 책배까지 넓이도 제각각이지만, 자세히 보면 등 모양도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책을 키 높이에 맞추어 완벽하게 꽂아 넣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미묘하게 책등의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는 아연실색하게 되었지요.


책등의 모양은 반듯하고 평평한 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책들은 책등이 진짜 등처럼 조금 둥글게 생겼습니다.

이 두 종류의 책등을 구분하지 않고 책을 꽂은 것은 크나큰 실수였지요. 왜냐하면 자세히 보면 이 직선과 곡선의 비대칭은 제 마음뿐만 아니라 열을 다 맞추어 섰다고 생각한 책들에게도 큰 혼란을 주고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건축 양식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책등이 반듯하고 납작하게 각진 책들은 마치 고딕 건축 양식을 떠오르게 합니다.


고딕 양식은 1514년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바티칸 궁전의 보수를 의뢰받은 화가 라파엘로가 공사 보고서에 처음 사용한 이름으로 원래는 천박한 고트족의 취향 같다며 프랑스 대성당의 건축 양식을 낮춰 부르는 말이었었습니다. 그러나 이 양식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빈의 슈테판 성당, 쾰른 대성당에서 볼 수 있듯이 수직적이고 직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웅장한 느낌을 주고 많은 건축에 사용되었지요. 글씨도 선의 굵기가 일정하고 세리프가 없는 것을 고딕체라고 부르는데 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 돋움체라네요.

노트르담 대성당 / 고딕 양식

반면 책등이 인체 공학적으로 둥근 책들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을 연상케 합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치처럼 좀 더 부드러운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고딕 양식이 발생되기 전까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유럽에서 교회 건축에 집중되었으며, 창문과 문, 아케이드에 반원형 아치를 모티브로 한 양식입니다. 이탈리아의 피사 대성당, 영국의 런던타워, 프랑스의 몽생미셀 수도원 등이 이 양식을 한 대표적인 건축물이지요. '로마네스크'란 말은 19세기 초 고고학자인 샤를 드 제르빌이 중세유럽의 건축 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글씨체는 고딕체는 있는데 로마네스크체는 없네요.

피사대성당 / 로마네스크 양식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책등 모양의 책을 한꺼번에 꽂아 넣을 경우,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번갈아 가며, 또는 불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혼돈의 건축 양식을 보이게 됩니다. 마치 다른 시대의 두 건축가가 한 건축물을 지은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고, 또는 고딕이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물을 지었다가, 종교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된 부분을 다시 다른 양식으로 복구한 듯이 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다시 돌아와, 이것은 어디까지나 건축물이 아니라 여전히 책이므로 이러한 건축 양식을 따랐을 리는 만무합니다. 이렇게 달라지는 이유는 바로 책의 제본 양식의 차이 때문이지요.


고딕 양식이라고 말했던 납작한 사각 책등의 형태는 낱장의 형태의 표지와 종이를 본드로 붙여서 제본하는 방식입니다. 요즘 책 제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며, 단행본의 경우 대부분 이 제본 방법을 사용하지요. 다양한 용지와 크기 선택이 가능하고, 제작비도 저렴하게 가장 빨리 책을 만들 수 있는 형태이기도 합니다.


페이지 수가 많은 책을 저렴한 가격에 출간할 수 있고 넓은 책등에 문구를 쉽게 넣을 수도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요즈음 책을 만드는데 가장 선호되는 방법입니다. 고딕 양식처럼 한때 볼품없는 싸구려 양식처럼 보이기도 했더라도 말이지요.


단 내구성이 좋은 편은 아니랍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옷과 마찬가지로 책이 떨어져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트렌드가 지나서 버리는 것처럼, 내구성이 약해서 책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은 듯하네요. 일명 떡 제본이나 무선 제본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떡제본, 무선제본 / 고딕 양식

한편 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말했던 둥근 책등의 형태는 접지를 실로 꿰어 떨어지지 않게 고정 후 하드커버 표지에 아교나 본드를 덧붙여 싸서 만드는 방식이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좀 더 고급스러운 아치형의 로마네스크 느낌이 나는 것이지요.


페이지 수가 많아 두껍거나 소장가치가 있는 책들에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고, 가격이 다소 비싸진 다는 점이 있으나 내구성이 강해 책을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명 양장제본이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고딕식과 독특한 차이점은 읽다만 페이지를 표시할 수 있는 가름끈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등판은 둥글게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사각의 평평한 등으로 만들기도 한다네요.

양장제본 / 로마네스크 양식

결국은 이 고딕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혼합된 건축, 아니 책으로 쌓은 건축 양식을 분리하기로 합니다.

방법은 책장의 분리된 각 칸마다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책을 모아서 나누어 꽂는 방식입니다.

이럴 경우 대략 4분의 3이 고딕 양식의 책으로 구분된 반면, 나머지 4분의 1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책이 분리가 되더군요.

한 책장에서 보면 여전히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모습이긴 했지만, 이러할 경우 그래도 유서 깊은 건축물을 마구잡이 식으로 그때그때 땜질하여 보수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지요.


이로서 책을 책꽂이에 꽂는 방법은 정리가 된 듯싶습니다.

책의 종류가 아주 많을 경우에는 이 보다 다양한 방법이 시도될 수도 있습니다. 서재나 도서관처럼 책의 크기가 아닌 책의 종류나 분류에 따라 책을 꽂겠지요. 책의 키나, 책의 넓이, 심지어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까지 구분할 일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겨우 책장 한두개에서는, 가지고 있는 책을 훤히 꿰뚫고 있으므로 책이 정렬된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도 책이 책장의 수용 범위를 벋어 나지 않을 때 일이긴 하지만요.


이번에 책의 종류를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이름 붙인 것도 마음에 듭니다. 떡 제본이나 양장제본의 명칭은 어쩐지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이 용어를 계속 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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