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가 흔히 접하고 있는 책은 속지 보다 조금 두꺼운 종이를 사용한 겉표지가 책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입니다. 이는 책이 입고 있는옷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저에게는 책의 겉표지는 책등과 책 양팔을 감싸고 있는 카디건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기 편한 패스트패션의 옷을 입고 있듯이 현대의 책 또한 펼쳐 읽기 쉬운 패스트패션 형태의 실용적이고 저렴한 옷을 많이 입습니다.별로 두껍지 않은 책 표지가 그런 식이지요.
하지만책도 속옷 같은 얇은 형태의 속지만을 절대 겉에 입지는 않지요. 사람이 속옷 위에 겉옷을 입듯이 책도 속지 위에 두툼한 겉표지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그 이유는 책들의 마찰과 부대낌에 의해 책이 찢어지거나 손상될 수 있기 때문에 겉옷의 두께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처럼 체온을위한 것은 아니지만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은 옷이나 책의 표지나 마찬가지죠.
양장판이라고 부르는 더 고전적인 책은 더 두껍고 장식이 가미된 옷을 입었습니다. 이는 흔히 입는 일상복이 아닌 결혼식이나 행사에서 입는 예복의 형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단권으로 나오는 책들과 달리 전집 형태는 양장점에서 예복을 맞추어 입 듯 책도 보다 정성을 들여 두꺼운표지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제본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특별판의 책 경우에도 이 특별히 맞춘 양장본이 선호되곤 합니다.
양장본
그런데 양장본의 형태는 그 두께로 말미암아 책의 두께는 더 두껍고 무게는 더 무거워 지지요. 그러나 겨울 외투처럼 외부의 추위와 같은 충격으로부터는 훨씬 더 책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책은 원래 특별한 신분이었으므로 예복을 갖춰 입고 겉에 외투까지 걸쳐 입는 것이 한때는 당연한 것처럼 보였었지요.
양복에 외투까지 걸친 양장본 보다 더 시대를거슬러 올라가면 책은 정말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귀한 비단옷을 화려하게 말이지요. 패스트패션 처럼 얇은 티셔츠만 걸친 현재의 책 모습으로는 옛 조상의 모습을 거의 믿을 수 없겠지만,책은 비단옷 아니면 걸치지도 않는 콧대 높은 존재였습니다.
비단뿐만 아니라 보석으로 꼼꼼하게치장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야흐로 책이 귀족의 신분이었을 때의 이야기지요. 지금의 책은 그때에 비하면 혁명을 통하여 귀족의 지위를 잃고 아주 누구에게나 평등해진 셈입니다.옷도 평등하게 아무거나 입고 아무나 책을 읽을 수 있게도 되었으니까요.
돋을새김 표지와 닫힘쇠가 있었던 책
실제로 활자 인쇄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에는 많은 책들이 수제로 제작된 가죽이나 비단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갑옷 같은 판자 위에 가죽이나 직물을 씌워 놓은 모습은 흡사 기사의 갑옷을 연상케도 하였으며, 금속으로 돋을새김을 하거나 조각을 하고 보석을 달아 책은 귀족의 일원으로서 위엄과 권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었지요.
보석으로 장식된 표지의 책
심지어 수도원을 약탈했을때 예배용 책에 있는 금은을 벗겨갈 정도로 화려한 치장을 뽐내는사제 같은 책들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금은이나 보석으로 장식되고 비단옷을 입은 책들은 보관도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보석보다 더 귀중한 책은 잃어버리거나 도난 당하지 않도록 안전하게 보관할 궤나 방이 따로 필요하기도 했으니까요.
같은 방안에서라도 귀중한 책들을 다른 일반 책과함께 꽂을 경우 화려한 장정과 보석이 다른 책의 옷을 찢거나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책은 경사진 독서대에 진열하거나 쟁반, 탁자, 서랍 등에 따로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책을 위한 방 의자와 식탁, 전용 쟁반을 사용했으니 귀족다운 대접을 원 없이 받았다고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옛 고서들도 비단옷을 입고 있었을 까요?과연왕의 책은 왕의 대접을 받았을까요?
프랑스에서 장기 임대 형식으로 국내로 다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에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의궤는 조선 왕실에서 주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왕이 지시한 왕의 전교에서 부터 관청 사이 오간 문서, 왕과 신하들이 논의한 내용까지의 기록입니다. 여기에 보면 같은 내용이라도 왕이 보던 '어람용 의궤'와 일반 관원이 보던 '일반 분상용 의궤' 차이를 통해 같은 내용이라도 책이 신분에 따라 어떤 옷을 입었는지를 유추해 볼 수가 있습니다.
어람용 의궤 / 분상용 의궤
과연 왕의 어람용 의궤는 초록 비단 표지에 제목은 별도로 붙이고 황동으로 철한 뒤 국화 모양 장식까지 더해 왕족다운대접을 받았습니다. 이에 비해 일반 분상용 의궤는 삼베에 먹으로 쓰고 철판으로 고정하였네요. 일반 백성의 옷을 입고 있다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책들의 비단옷을 입은 귀족 생활은 혁명 전까지 계속됩니다. 책은 원본 한권이거나 필사를 통하여 겨우 몇권 밖에 없고 왕이나 귀족들이나 읽을 수 있는 귀중한 것이 바로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을 수 있은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활자와 인쇄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런 책의 귀족의 지위도 사라지게 되지요. 혁명은 인간의 세계뿐만 아니라 책들의 세상에서도 일어났던 것이지요. 덕분에 책은 비단옷과 보석 장식을 버리고 지금 우리 손에 가볍게 들려있는 것입니다. 책들의 입장에서는 혁명 전 귀족의 시절이 그리울 수도 있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