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적으로는 개는 혀를 바깥쪽으로 구부려 물에 닿는 혀의 면적이 넓고 혀를 물속 깊숙이 담가 단면적이 넓게 물기를 끌어올릴 수 있게 하여 물을 먹는 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고양이보다는 한 번에 더 많은 물을 마실수 있게 되지요.
반면에 고양이는 혀를 거의 수직으로 세워서 그 끝에만 물을 살짝 댔다가 올리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표면장력으로 혀끝에 달라붙은 관성에 의해 물이 끌려 올라오는 순간 물을 먹게 되지요. 개에 비하여 한번에 올라오는 물이 적은 만큼 초당 4회에 이를 만큼 더 빠르게 혀 놀림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개와 고양이의 물먹는 법의 차이는, 고양이가 코의 후각과 수염의 촉각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물을 먹는 반면, 개는 이러한 걱정 없이 더 활발하게 빠른 속도로 혀를 빼며 물을 먹는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개는 고양이보다 물이 입 밖으로 더 많이 튈 수밖에 없는 구조이라고도 하네요. 개 보고 왜 고양이처럼 얌전히 물을 먹지 못하냐고 혼낼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사람은 어떻게 물을 먹을까요? 컵 같은 도구가 없다면 아마 고양이보다는 개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코끝을 적시지 못할 이유도, 예민한 수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한번 실제로 물을 개나 고양이처럼 먹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혀로 핥아먹는 것보다는 입술을 대고 쭈욱 빨아 들이키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인간은 키스가 가능한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사람은 "키스하듯이 물을 먹는다"이지요.
흥미로왔던 점은 개와 고양이의 물먹는 이야기보다 동물과 식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도 동물의 일종이기 때문에 동물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지요.
하지만 "이 지구의 진정한 주인은 동물이나 사람아 아니라 식물일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동물과 사람의 수명은 길어야 100년 남짓에 불과하지만 식물은 동물보다 훨씬 더 오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체는 나무이며, 므두셀라 나무는 거의 반만년에 가까운 수령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 '므두셀라'라는 명칭이 성경에 나오는 969살 까지 살았다는, 가장 오래 산 인물의 이름을 따 온 것이긴 하지만 약 1천 살과, 5천 살은 비교할 바가 못 되지요. 그리고 이 나무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 인간은 적어도 50번은 죽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나무를 비롯한 식물이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동물이나 인간은 들러리였고 오히려 식물이 이 지구의 살아있는 지배자였던 것이지요.
더군다나 동물이나 인간은 식물이 내뿜는 산소가 있어야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을 보면 누가 누구를 살리고 있는 것인지는 명백해집니다.
그러므로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보였던 식물을 빗댄 명칭, 식물인간이라던지, 식물정부 같은, 단조로움과 무기력을 뜻하는 말에 대해 식물에게 사과를 해야 할 판입니다. 맘씨 좋은 지구의 지배자 나무는 또 그 사과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 믿습니다.
문득 강인한 식물의 이미지로는 마블 영화에 나오는 그르투가 생각납니다.
"나는 그르투다"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이 식물인간은 원래 네덜란드어로 '크다'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하네요. 클 뿐만 아니라 강력한 힘과 생존력을 자랑하는 '그르투'는 잘리고 찢겨져도 나뭇가지 하나만 있으면 물을 뿌려 다시 소생할 수 있는 부활의 존재이지요.
한편으로는 글들과 책도 식물이나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나무로 만들어서도 그렇지만 글은 식물처럼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는 존재이지요.
동물이 후손을 통하여 종족을 보존한다면 글과 책은 식물과 나무처럼 영혼을 보존하는 도구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는 기억하지 못한 후손과 유전자보다 때로는 책이나 글이 더 훌륭한 후손이 될 수도 있을 듯도 하네요.
글은 또한 '그르투'이기도 합니다. 나뭇가지 하나만 있으면 물을 뿌려 다시 소생할 수 있는 부활의 존재 같기도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개나 고양이나 그리고 사람에게도 물 마시는 법이 중요하듯이 그르투와 글에도 물은 중요한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