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새해 계획이 있냐고 물었을 때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무계획이 계획이다!"라고 당당히 말했었지요. 그렇게 대답하고는 조금 한심해 보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무계획이 계획인 남자라?" 면접이나 소개팅이었다면 바로 탈락할 대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원래 계획론자에 가깝습니다. 집착적 플랜맨 까지는 아니어서 세부를 촘촘하게 그리지는 않지만, 머릿속에 윤곽을 가지고 있는 계획을 좋아하지요. 무엇을 그릴지 그 윤곽의 계획만 있으면 언제든 작품을 세부적으로 완성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물론 거기에는 자신감이라는 무형의 마법이 필요합니다.그 마법 비법 소스통이 요즘 비어 가고 있어 문제지만요.
계획은 없지만 책은 한 권 또는 세권이나 준비했습니다. 한권은 평상시 대로 읽고 내맘대로 한줄 서평과 내맘 $점을 남길 지극히 개인적 취향의 책이지요. 그리고 나머지 두권은 실용서에 가까운데, 궁금증에 혹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아닐지 몰라서 골랐지만, 서평 목록에는 남지 않을 책들이지요. 그래서 준비한 책은 세권이지만 한권만이 새해를 여는 영광의 임무를 담당할 예정입니다.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한대 처 맞기 전까지는" 권투선수 마이크 타이슨의 말로 유명한 이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설사 처 맞더라도 계획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아무리 계획해 봤자 그렇게 가지 않는 현실에, 오히려 거꾸로 가서 계획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결과에, 그럴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지요 "누구에게든 계획은 없다, 책을 한권 읽기 전 까지는"
이는 어제의 계획과 오늘의 계획이 별로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무계획이 오히려 나은 계획이며 차라리 책을 한권 읽는 이유이지요. 그렇게 대답할 걸 그랬습니다. "책을 읽다 올해의 책이라고 부를만한 감동적인 책 한권을 발견하는 것과, 그와 같은 책 한권을 써보려는 것이 계획이죠"라고 말이에요.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좌절하지만 또한 계획대로 가지 않아서 기쁠일도가끔 생기곤 하지요. 계획대로 쫙 짜여져 있어서 그대로만 되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어요? 계획을 세우는 것은 마치 열심히 계획을 쌓게하고 결국은 무너뜨리기 위한 신의 젠가 보드게임 처럼 보입니다.
애써 골라 올해 처음 읽는 한권의 책조차 읽어보니 드럽게 재미없을 수 있지요. 실용서라고 끼워주지도 않았던 나머지 책이 오히려 감동과 실리까지 일석이조의 올해의 책이 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책은 한권이 아니라 세권을 준비한 이유입니다. 책조차 계획대로 안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또 다른 책을 계속 읽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책이 되든 죽이 되든 뭐든 쓰고 또 써 나갈 계획이지요. 이 보다 무계획적인 계획이 있을까요? 그렇게 윤곽을 그려 나가는 것이겠지요. 그 결과는 책이나, 그림이나, 음악이나, 몸이나, 물질이나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는 또 계획과 다르겠지만, 그 계획없는 계획에는 항상 책이 한권 또는 몇권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