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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e Mar 10. 2023

교주는 행복할까?

feat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

교주의 모습은 마냥 행복해 보입니다. 세상을 다 갖은 기분을 시시 때때로 느껴서 일까요? 환호하며 그를 신으로 떠 받드는 인간들이 많아서 일까요? 하긴 그런 지존의 왕국을 이루고 나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한마디로 생사를 여탈 할 수 있고, 원하는 인간들을 골라 시중을 들게 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정말 행복이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항상 거짓 속에서 살고 거짓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표정도 거짓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됨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만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지요. '만약 신이 있다면 이렇게 거짓 신 놀이를 하고 있는 자신을 이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텐데'라며 신을 비웃고 겠지요. 하지만 언젠가는, 혹 사후에서라도 진짜 신이 나타나 가짜 신의 행세를 한 대가를 호되게 물을까 하는 두려움이 언제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장은 행복해 보입니다. 꺼릴 것 없는 이 행복이 설사 거짓이라 해도 도저히 끊을 수가 없어 보입니다. 이것은 행복이라고 말하는 낮고 지속되는 감정보다는 도취와 흥분이라고 해야 할 높고 순간적감정에 가깝습니다. 거짓말을 멈추는 순간 이 환상에서 깨어날 것이기 때문에 이 강렬한 도취와 흥분의 핵심은 자기 자신마저도 완벽하게 속이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만 타인도 완벽하게 속아 넘어갈 테니까요.


행복이라 부르건 도취와 흥분이라 부르건 그 쾌락은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나옵니다. 특히 타인의 행복을 빼앗아 도취와 흥분이 채워지는 구조지요. 거짓으로 시작해 타인을 속이고, 이제는 타인의 마음을 훔치고, 그 약탈의 성취를 통해 더 강렬한 도취와 흥분을 느끼고 마침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고통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게 됩니다. 더 많이 속이고 더 많이 빼앗고 더 많이 고통을 안겨줄수록 자신의 짜릿한 행복은 배가 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타인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이루는 것이라그것을 과연 행복이라 함부로 부를 수 있을까요? 설령 행복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참된 감정일까요? 그 행복감마저도 거짓은 아닐까요? 더군다나 나아가 그 불행을 조장하고 고통을 안겨주며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신의 능력과도 같음에 도취와 흥분을 느끼는 자, 타인의 불행을 팔아 쾌락을 사고 있는 자라면, 그것은 신과 같은 존재는 맞지만 악신, 즉 악마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요?


없지만 악마는 많은 역신의 세상입니다. 신은 신인데 인간을 이롭게 하는 선의와 정의의 신이 아니라 미혹하고 빼앗아 욕망만을 채우는 악의와 불의의 신이 가득할 따름입니다. 행복이 아니라 불행한 시절이지요. 악한 것을 통하여 행복하다면 그것이 지옥이 아닐런지요.


이러한 악신은 비단 신을 가장하고 앞세워 거짓을 일삼는 교주뿐만이 아니지요. 교우의 행복을 폭력으로 갈취하고도 부모의 뒷배나 권력과 돈을 배경으로 신으로부터 쉽게 면죄부를 얻는 학폭도 그렇고, 타인의 행복을 갉아먹으며 교주에게 환호하는 신도들만을 채용하고 남겨서 부를 쌓고 싶어 하는 기업도 그렇고, 국민의 행복을 팔고도 고통을 외면하며 도취와 흥분으로 교주가 된 성취를 누리정치도 그렇습니다. 신을 참칭 하는 교주는 비난하지만 한편으로는 학교에서부터 기업과 국가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교주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난무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교주들은 과연 행복할까요? 행복이라는 것은 절대 타인의 행복을 앗아가며 고통을 통하여나, 자기 자신을 속여가며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도취와 흥분, 강하고 순간적인 쾌락, 그리고 그것을 만회하기 행복의 복적인 약탈이 계속되는 것이겠지요. 진정한 행복을 알지 못하므로 타인으로부터 빼앗은 가짜 행복 속에 계속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특히 타인의 고통을 통한 행복은 반드시 엄습하는 불안감으로 인해 언젠가는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교주의 행복했던 것 같은 마음은 사실 행복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교주도 그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아니 모르고 싶었고, 자신이 신이므로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마저 속인 이 거짓이 들통나서 산산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더욱 악랄하게 거짓으로 속이고 또 빼앗았을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속이고 빼앗은 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지요. 결국 자신의 행복을 빼앗은 고통을 통하여 도취와 흥분을 순간순간 쌓아갔을 뿐입니다. 자신이 쌓아 올린 것이 그동안 행복이 아니라 최악의 불행이었다는 론을 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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