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 갔는데 좀 기다려야 할 듯싶습니다. 몇 권의 책이 보였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선뜻 없었는데, '박경리'란 저자가 눈에 확 띄더군요. 마침 책이 두껍지도 않아서 부담 없이 집어 들어 보았지요.
시간이나 때우려고 펼친 책이었는데 의외로 책장은 술술 넘어갑니다. 시집을 읽은 지는 한참 오래된 듯싶은데 시집을 집어 든 것도 의외의 일이었지요. 글들은 특별히 '시'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은 아닌 듯싶었습니다. 다만 짧게 짧게 생각들을 써 내려간 것 듯 보였어요.
'유고 시집'이란 것은 작가의 사후 명성에 기대어 공개되지 않았던 짧은 글들을 모아서 펴낸 것인 듯싶습니다.
여하튼 책장은 어느덧 반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미용실에 간 원래의 목적보다 책 읽기가 더 중요해졌지요. 이제 순서가 빨리 돌아오면 안 되었습니다. 조금 속도를 내면 끝까지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 책을 완주해 끝을 보아야겠습니다.
$ 기억이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지는
원래는 책을 펴낼 작정으로 일목요연하게 쓴 글이 아니었던지, 목차와 내용은 다소 두서가 없이 보였지만은, 역시 저자의 필력은 그런 것들은 이제 아무 상관없게 만들고 있었지요.
예전 기억들로 채워진 내용들은 따뜻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명쾌하기도 하여 페이지가 술술 녹아내립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러니지요. 책이라는 것이 시간이 있고 여유 있고, 햇살도 비추어서 밝은 분위기에, 차라도 있어 심심치 않고, 주위도 조용한 좋은 환경이라면 더 잘 읽힐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요.
오히려 이렇게 어수선하고 뭔가에 쫓기는 순간에 짬을 내어 읽은 책들이 오히려 집중과 짜릿함을 주고 있으니까요.
책의 내용 중에는 특히 어머니, 친할머니, 외할머니들에 대한 회상의 부분들이 인상적이었지요. 특별히 그분들에게 애착을 가지고 쓴 글이 아니라, 그저 기억을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이 더 솔직하고 정감 있게 와 다았지요. 그 기억은 직접 경험한 것뿐만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들은 할머니의 이야기, 그 할머니가 들었던 그 어머니의 이야기 일수도 있지요. 마치 전해져 내려오는 옛날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듣고 잊기 전에 기록해 놓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지 않나요?어머니로부터 듣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 그 할머니의 어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그 기억들이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점점 희미해 가는 것은 슬픈 일이지요. 그래서 저자도 그런 기억들을 남겨 놓았겠지요.
$ 시집이란 원래 그런 것
다행히도 속도를 엄청 낸 나머지, 순서가 오기 전에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해 책을 덮을 수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