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mile Jun 17. 2024

이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feat 철학의 위안

솔직히 대학교 입학 원서를 쓸 때 철학과에 대하여 아주 잠깐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를 적, 철학이라는 것이 뭔가 근사해 보이긴 했거든요. 나름 성격에 맞는 것도 같았었구요. 하지만 못지않게 철학을 전공했다가는 밥벌어 먹기에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스쳤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철학과는 패스" 했었지만, 그것이 반드시 옳은 선택이었다고는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일 어찌 될지 모르거든요.


그 이후 철학이 '밥벌이'에는 모르겠지만 삶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확신은 생겼습니다. 특히 '철학' 없이 갈대처럼 압력과 중력에 흔들리는, 또 '철학' 없이 불나방처럼 권력에 뛰어드는 수많은 식물과 곤충들의 힘없음을 보면서 든 생각이지요. 자고로 '인간'이라면 조금이라도 '철학'이 그 몸에 있어야 철의 무게와 강도로 견딜 수 있게 되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흔들리고 날아가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철학'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지요. 먹고살기도 바쁜데 절실히 고뇌했던 옛날 사람과 달리 먹고살만한데도 무뇌를 자청하는 것이 요즘 세태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철학'을 마냥 외면할 수는 없지요. 특히 길을 잃어가고 있을 때, 흔들리고 있을 때,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이 '철학'이란 전혀 무용할 것 같았던 놈이 불쑥 마법 구슬 같이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니까요.


이번에도 '보통'은 '보통'을 넘어 이러한 철학의 위로를 잘 잡아 냈습니다. '알랭드 보통'은 이름은 겸손하면서도 참 보통 이상은 한단 말이지요.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철학의 위안", 불안하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철학에 '위안'을 갖다 붙일 생각을 하다니, 그에게는 '철학'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작가에게도 '철학'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라니까요.


이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그렇다철학자들은 '철학'이 넘치는 자들이니 잘 살았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나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으로 '이 운명의 장난'과 맞서 싸워 철학 이야기 완성해 냈지요. 어디서 이름은 한번씩은 들어봤어도 사실 내용은 잘 모르는 이러한 여섯 명의 '철학자' 이야기가 이 책의 '위안' 되겠습니다.


후대에 결연한 죽음의 소재로 그려져 가장 멋진 죽음을 맞이했을 것 같은 '소크라테스'가 사실은 사형을 결정짓는 인기투표에서 패배해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나,  쾌락주의와 욕망의 대명사로 불리는 '에피쿠로스'가 그보다는 행복주의자였으며 쾌락이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물질이 아니라 우정이나 자유를 두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계속되는 실패의 운명 앞에, 네로 황제의 어릴 적 가정교사로서 언젠가는 저 무도한 네로가 자신을 죽이리라는 것을 알고도 '세네카'가 불안을 이길 수 있 힘 바로 '철학'이었고, '몽테뉴'가 가장 이성적이고 똑똑한 지혜의 '철학'을 추구했음에도, 인간의 한없는 부적절함을 인정하면서 결국 도덕에서 '철학'의 평범한 가치를 찾았던 것은 고뇌하는 철학을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존재를 일종의 오류로 생각하는 염세주의를 보이고 수많은 여성들에게 거절당하며 절망의 정수를 보냈지요. 그의 철학책이 겨우 수백 권 팔리다가 갑자기 골라 엮은 에세이가 뜻밖의 베스트셀러가 되며 명성이 급속히 퍼져 여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는 스토리는 철학적 코미디에 가깝습니다. '니체'는 철학자 대다수는 멍청이였어서 자신이 역사상 처음으로 품위 있는 인간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자뻑 증상을 보였고, 2000년 경이면 사람들이 자신의 저작을 읽도록 허용될 것이라며 근자감이 쩔었지만 처절한 고독과 무명, 가난, 건강으로 고통을 받았지요. 그럼에도 행복해지기 위한 '철학'의 치열한 신념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한결같이 '철학'이 있었음에도, 심지어 그것을 깊이 체득한 '철학자'였음에도 이들마저도 '위안'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무리 '철학'이 가득해도 바로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꺼질듯한 '운명'의 등불 '철학'의 방어막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얄궂은 운명에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자기 자신을 지켜 나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철학'이라는 글자 밖에 가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 앞 한계니까요.


그렇지요 인간은 자주 '인기 없고', '가난하고', '좌절하고', '부적절하고', '상심하고', '어려움에 처한'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면역제처럼 철학의 '위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심지어 지금까지 그 이름을 남긴 유수의 '철학자'의 삶이었다고 해도 절대 예외일 수가 없지요.


사실 인기 있고, 부자고, 성공하고, 모든 것을 가졌고, 언제나 인기 넘치고 사랑에 성공하는, 어려움이라고 모르는 존재에게 철학은 그리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난꾸러기 '운명'은 절대, 네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지요. 그래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연예인뿐만 아니라 약해 빠진 우리 같은 존재들에게는 어떻게라도 붙들어 잡아줄 '철학'의 '철의 무게와 단단함'이 더욱더 필요한 이유입니다. 심지어 운명은 이러한 '철학'을 질투했는지 '철학자'들에게는 더욱더 가혹한 것 같더군요.


그러므로 '철학의 위안'은 바로 '운명의 장난'과 짝아닐는지요?



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한줄 서평 : '철학의 위안"의 짝은 '운명의 장난" (2024.06)

내맘 $점 : $$$$

알랭 드 보통 지음 / 정명진 옮김 / 청미래 (2023.10)

매거진의 이전글 북 마조히스트(Book Masochist)의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