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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Nov 18. 2021

통째로 외우기

따로 하는 영어 공부

   과외 수업의 여부를 결정하기 전, 나는 수업에 대해 소개하고 학생은 자신에 대해 소개하는 자리를 갖는다. 최근까지 공부한 교재를 가지고 나와달라 하는데, 선빈이는 영어 문법 문제집 두 권을 들고 나왔다. 한 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풀려있고, 나머지 한 권은 1/3 쯤이 띄엄띄엄 풀려 있었다. 다 푼 한 권의 교재는 열심히 공부했는지 책 장이 두 배는 더 부풀어있었다.


   "교재를 혼자 끝까지 푸는  쉽지 않은데, 대단하네. 심지어 여러  구나."

   "학교에서 그 책으로 시험 봤거든요. 그냥 통째로 외웠어요."

   

   초등학생의 문제집은 컬러풀한 그림이 있고, 글씨가 크고, 문장 간격이 넓지만 그렇다 해도 통째로 다 외우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보기>나 <예시>에 포함된 모든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를 전부 다 외웠다고 했다. 하도 많이 봐서, 어떤 문장의 위치가 그 페이지의 오른쪽에 위치했는지 왼쪽에 있는지, 위아래 위치까지도 모두 기억난다고 했다.

   

   " 내용  있는 교재전부 외웠으니 중학교 영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는데!"

   "어어, 잠시만요. 지금은 하나도 생각  나요. 진짜 하나도요."


   선빈이는 서둘러 내 말을 막아서며, 기대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더 자세히 자신과 영어에 대해 설명했다.

   시험 때문에 초등학생을 위한 영어 문법 문제집 한 권을 통째로 외운 것 말고는 영어를 '따로' 공부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중학교에 가면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할 텐데 ‘솔직히’ 지금껏 노느라 기초가 없어 큰일이고, 학원을 계속 다닌 친구들과 자신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도 잘 모르겠으며, 결론적으로 자기는 영어를 '전혀'  하기 때문에 너무 걱정이라고 했다.  놀았던 시간은 후회가 없지만, 조금씩이라도 공부하지 않은 건 후회가 된다고 했다.   


   "학교 영어 시간 수업은 어땠어? 수업은 잘 들었니?"

   "그냥 들었어요. 들을만했거든요. 그런데 6학년 때 갑자기 문법 시험을 본다고 해서 망했죠."

   "시험  보고 ."

   "처음에  번은 대충 버텼는데, 저는 영어를 따로  다니니까 답이 없더라고요. 마지막엔 교재 전체가 시험 범위라길래, 열받아서 그냥 외워버렸어요."

   "열받아서?!"

   "완전 폭망이잖아요. 창피당하기 싫어서.

     근데 지금은 다 까먹었어요."


   그리고 다 까먹은 건, 사실이었다.

   

   "학교 영어 수업을 들었으면, 수업하는 동안 무언가 차곡차곡 쌓였을 거야. 선빈이 아직은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지 확인할  없으니  모르는 것처럼 느껴질  지만, 미리부터 기초가 하나도 없을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혹시 그렇다고 해도 지금부터 해도 괜찮고."

   "수업은  빠지고 들었어요. 원어민  재밌었거든."

   

다행!

   "그런데 힘들기도 했어요.  학원도  다니고 혼자 학교에서만 해서 그랬나 봐요."

  

   선빈이는 학원이 싫어 버텼다. 막상 시작하려니 집 근처, 학교 근처의 학원에서 선빈이의 학년과 수준에 맞는 반을 찾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내다가 졸업하지만, 중학교는 다를 것이라는 주변의 말이 많아졌고, 덜컥 든 불안은 커져만 갔을 것이다.  



   영어는 한 번 시작하면 계속해야 한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 언어의 감각은 잠시라도 놓으면 빠르게 잊힌다. 흩어진 감을 되찾기 위해 이전보다 큰 시간과 수고가 필요할 수 있다. 고생할 게 분명하니, 차라리 멈추지 않는 것이 낫다고 다들 그리 말하는 것이다.

  초등학생을 아이로 둔 보호자들이 영어 학습의 시작 시기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 이유다. 길게 보아야 하는 일이니, 긴 공부의 출발을 가능한 미루어야 할지, 현실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이 또한 하루라도 빨리 겪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 일이다.  


   최근의 초등 영어 사교육은 보통 저학년 때 파닉스를 시작하고 어휘 암기 훈련을 주로 하다가, 3학년 즈음에 구문을 통해 문법을 가르친다. 가벼운 문법과 스토리북 읽기 수업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 문장에 익숙해지고, 고학년 때 예비 중 과정으로 들어가게 된다. 예비 중 과정이 끝나면 중학과정, 그다음은 예비 고등 과정이다.

   학원마다 커리큘럼 진행 속도나 교재, 운영 방식의 차이가 있지만 과정은 대체적으로 유사하다. 하지만 각 학원은 자신들만의 특정 교재를 이용해 커리큘럼을 운영하기 때문에, 학습 내용의 공백이 생겨 이미 수업 중인  반으로는 중간에 들어가기 어렵다. 그 공백이라는 것도 크게 보면, 나중에 다시 배우게 될 내용이지만 한 학원의 학년, 반 내의 범위에서 보면 이미 지나간 수업이 되므로 등록 시기가 어긋나면 진입이 쉽지 않은 것이다. 물론 보충 학습을 통해 공백을 채우거나, 학생 개인의 능력으로 따라가거나 뛰어넘을 수 있다. 초등학생의 수업 자체가 어렵지 않고, 한 회 수업의 학습 목표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의 경우 환경 적응 여부도 학원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개설하는 반에서 시작을 같이 하면, 비슷한 연령의 학생들이 같은 환경에서 비슷하게 적응하니, 심리적으로 안정이 된다. 그렇지 못할 때는, 낯설고 자신만 겉도는 듯한 기분이 배우려는 의지를 방해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초등학생들의 수업 태도는 어느 연령대보다 유연해서 분위기만 잘 이끌면 뒤늦은 한두 명이 얼마든지 함께 갈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봐주면서 운영하기보다는, 시기에 맞춰 등록을 해야 하는 시스템을 선호한다. 학원은.


  ‘아무리 늦어도 파닉스 막차라도 타려면 3학년을 맞는 겨울 방학 이전에는 반드시 등록을 해야 하거나, 파닉스를 하지 않았다면 현재 갈 수 있는 반이 없다거나, 5학년은 예비중 수업을 이미 시작했다는……’ 상담을 하고 나면, 초등학생 때는 실컷 놀고, 중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려던 학생은 기가 꺾이고, 보호자는 애가 탔단다. 

   길이 없는 것 같지만, 중학생이 되면 초등 교육 과정을 정상적으로 마친 학생들이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 교과서가 기다린다. 사교육도 가능하다. 오히려 중학생들이 가는 학원은 훨씬 더 많고 그 학원 중에는 당연히 학생이 골라서 갈 수 있는 반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초등학생 때 영어 공부를 맹렬히 하지 않았다고 해도, 의지를 가지고 영어를 시작하려 할 때, 자신만의 타이밍에 섰을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 미리부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위로의 말은 뜬 구름이 아니었고, 선빈이는 희망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수업에 대해 바라는 것들을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니 진짜 기초부터 배우고 싶다고, 수업 중간에 이해하지 못하는 건 절대 그대로 넘어가지 않겠다고.


   "그럼 진짜 처음, 알파벳부터 써볼까?"

   "그러게요, 알파벳을 제대로 써본 것도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우리의 는 첫 수업에서 알파벳을 썼다.

대문자도 쓰고 소문자도 썼다. 소리값까지 체크하면서도 길어봐야 십오 분남짓걸린 듯하다. 우습게 여기는 일이지만 잠깐 진지하면, 이 단순한 쓰기가 주는 자신감이 크다. 선빈이는 단정하게 쓰인 알파벳의 나열을 보고 뿌듯해했다.


   "영어 좀 하는 애가   ."


   애매한 상황에 놓여, 시작도 전에 이른 실망까지 경험한 선빈이는 이제야 한숨을 돌렸다.


   그런 일은 여전하다.

   그때도 지금도, 초등학교를 다니며 영어를 '따로' 하지 않아도 괜찮다.

물론 보호자의 계획과 학생의 의지가 있어 즐겁게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면 응원한다. 다만 자신만의 목적 없이 등 떠밀리고 있는지, 휘둘린 것을 서두르는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다.

   미리 배워두면 먼저 익숙해질 것이다. 먼저 익숙해지면,  깊이 배울 기회가 생기고 상대적으로 빠르고 능숙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준이 자신 아닌 다른 사람에 있다면, 목적 없는 결과는 학생 자신의 성취가  수 없다. 미리 배운 모두가, 빨라지고 능숙해지지 않는다.

         

   중학교에 가면, 영어를 진짜 제대로 배우는 게 맞다. 중요한 문법은 하나도 빠짐없이 교육과정에 전부 다 들어 있으니 새로, 혹은 다시 잘 배우면 된다. 다가올 시간의 다짐만 챙겨두자. 그럼 그때가 제 때가 될 것이다.    배워서도 만족할만한 성과를   있다. 중학생은 충분히 그럴  있다.    


   초등학생은 학교 영어 수업을 즐기면 된다. 초등 영어 교과서는 재밌고, 원어민 선생님과의 대화는 떨리지만 흥미롭다. 탁월한 환경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누리면 좋겠다.  

   혹, 아이가 속상한 얼굴로 학교에서 돌아와 '나는 누구처럼 학원을 안 다녔으니까 영어가 어렵고 잘 못할 수밖에 없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새로 배운 문장 설명이 낯설거나,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말할 수 없는 어휘가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문과 문장을 반복해서 읽으면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고, 익숙하면 어렵다고 느끼지 않는다. 어휘는 집에서 혼자도 학습할 수 있다. 학원을 가지 않지만, 공부를 ‘더’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한 가지, 보호자의 숙제가 되지 않도록 초반 세팅을 가볍게 하길 바란다. 보호자의 숙제가 돼버리면, 아이를 잘하게 '만들어야' 하는 일이 되고, 그럼 새로운 갈등의 시작될지도 모른다. 무리가 되는 개입이 아닌 일상적 관심으로, 아이가 배움을 겪는 과정을 나누고, 아이의 요청에 어울리게 돕고, 격려하면 된다.

   영어라고 다를 게 없다. 초등학생 시절의 작고 신나는 경험이 본격적으로 공부할 때 버팀목이 되어준다. 


   초중고 12년 내내, 반복되는 영어 공부에 끌려다니며, 이럴 줄 알았으면 어릴 때는 그냥 놀 걸, 하고 아쉬워하는 학생을 본다. 듣고 또 들었기 때문에 목적 없는 반복에 길들여져, 익숙함을 자신의 실력으로 착각하고 있다가 시험 때마다 비극을 겪는 학생도 본다. 본인의 의지 없이 남들 따라 시작했을 뿐인데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까지 다 잘 해내야 하는 엄청난 부담에 치여 결국 포기하고 마는 학생도 본다.


   지적 호기심을 감각하는 즐거움, 그 즐거움을 배워가는 아이로 두자. 초등학생 때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그 아이는 입시생이 된다.

  

    

   "어차피 늦어진 , 그냥 천천히 할까요?"


   어떤 과목을 공부할 때, 권장 연령보다 일찍 시작해 여러 번 반복할 수도 있지만, 한 번 할 때 천천히 깊이 이해하고 오래 남기는 공부를 할 수도 있다. 아닌 척, 상관없는 척 하지만 늦은 출발이 마음에 걸렸던 선빈이는 맘 편하게 후자의 방법을 선택했다.


   "하나도 늦지 않았다는   알게  거야."


   진심이었다.

선빈이는 공부 방법을 배우고, 속도를 내고 싶은 욕심에 흔들리고, 공부하는 자신의 모습에 낯설어하면서 일 년을 보냈다. 중1을 그렇게 애틋하게 지나, 본격적으로 어려운 내용을 배우고, 깊이 고민하며 배운 걸 이해하고, 그런 자신에게 감탄하고, 영리한 질문을 하면서 더 이상 혼란하지 않은 중2 시절을 보냈다. 노는 게 제일 좋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입시니 대학이니 하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누는 중3이 되었다. 그 무렵 선빈이는 그 반의 영어 멘토가 되어 다른 친구들에게 배움을 나누고 있었다.


 선빈이가 보낸 시간은 또 하나의 증거가 되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왔다.



   "일단 한 번 해볼게요."


   중간에 길을 잃거나, 조금 늦어져도, 결국은 해피엔딩일 것이다.


  아이들은 잘하고 싶어 하고, 잘할 수 있다.

  처음부터, 일찍부터, 잘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결국에는 그럴 것이다. 그 아이 자신이 아닌 우리는 얼마나 할지가 아닌 어떻게 할지를 궁금해하며 응원해주자. 그 정도만 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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