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룬 Nov 04. 2021

전기세 담당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승연이의 자세는 언제나 같았다.

한 팔은 의자 등받이 뒤로 걸치고 다른 팔은 책상으로 뻗는다. 몸의 방향은 정면이 아닌 쪽으로 틀어졌고, 턱은 삐죽 내밀돼 시선은 내리깔았다.

  중학생 강의실에는 그런 학생이 늘 있는데, 몸에 안 좋은 것을 알면서도 '바로 앉자.'는 말을 번번이 삼킨다. 일단 수업이 바쁘다. 걱정의 말이 의도 그대로 온전히 가 닿기도 어렵고.

   삐딱하게 앉아서 수업을 듣는다 해도, 잘 따라오고 있다면 그런대로 괜찮았다.  


"오늘도 너 열공하라고 내가 이렇게 교실에 불을 켜주잖냐."

“이 반 전기세 담당이 너였구만.”


   승연이의 자세는 참을만했는데, 그 말은 참아지지 않았다.

전기세 담당. 학원에 나와 그냥 그렇게 거기 앉아 자리만 채우는 학생들을 이르는 못된 말이었다.

   아이들은 낄낄거렸다.

자기가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니 해가 되지 않는다 여긴 걸까,  아니면 생각 없이 그저 나오는 대로 말한 걸까. 어느 쪽이든 속이 상했다. 낄낄거리는 소리가 민망하도록 혼을 냈다.


   승연이의 학교 성적은 웬만했다.

   그 동네는 전국 평균과 비교해 상향 평준화된 지역이므로, 학년은 중2였지만 중3 수준의 학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승연이의 목표는 안정적 전교권도, 과정을 우수하게 마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학교 수업 시간에 망신당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 또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도의 목표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학생이었다. 수업 중 한 번씩 눈빛이 바뀌며 집중 여부를 표현하고,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돌리기 바빴던 펜이 멈칫하는 순간이 있었다. 불편한 자세를 모르는 척 한 건, 앞에서 바라보는 나만이 감지할 수 있던 배우고 있음을 보여주던 작은 몸짓들 때문이었다.


  "승연아, 오늘은 어떻게 왔어?"

  "엄마가 등록을 해서?"


   날씨가 궂은날, 걸어왔는지 평소처럼 자전거로 왔는지 물었는데, 승연이는 엉뚱한 대답을 하곤 했다.


   “처음에 출석부의 네 이름을 연승이로 잘못 읽고는 단번에 외워지는 바람에 한동안 얼마나 헛갈렸는지 몰라.”

   “지금은 제대로 아니까 다행이네요.”


  더 이상 헛갈리지 않으려고, 여러 번 제 이름이 불려졌다는 걸 알고 승연이는 피식 웃었다. 등록이 계속되며, 출석이 이어지는 날이 1 년이 되고 2년이 지나서 승연이가 중2가 되고 우리는 스몰 톡도 하고 그러며 지냈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을 다 건네지 못했다. 단 하루도 맨 뒷줄을 벗어나지 않았고, 고유의 자세를 지켰다.



   학원은 왜 다니는가.  


   배우러 다닌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원하거나, 잘 알지 못하는 답답함을 해결하려고’ 학원을 찾는다. 현실적인 문장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이렇다. ‘선행 학습을 하려거나, 떨어진 학교 성적을 따라잡으려고’ 학원으로 간다. 학생 본인인지, 보호자인지, 과연 누구의 의지로 학원의 문을 여는가에 따라 목적에 대한 의미와 차이는 근본적인 배움을 구할 수도, 현재의 성적에만 관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사이는 커지고 멀어진다.


  많은 경우, 학원은 스케줄 관리를 위해서 다닌다.

입시 교육에 들어서면 시험 기간을 기준으로 공부량과 범위, 교재 진도 등의 효율적 관리가 요원하다. 해야 할 공부의 늘어나는 속도와 양은 예정되어있지만, 현실의 학업이 벅찬 학생들 입장에선 새 학년, 새 학기 닥칠 때마다 매번 갑작스럽다. 망친 시험이 학생 기록부에 남는 걸 차마 두고 볼 수가 없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부담이 커지니, 시행착오를 줄이고자 관리를 일임한다.

   

  엄마가 가라고 해서 다니고.

   주변 애들이 다 다니니까 다니고.

   학교 선생님이 앞으로 어쩔 거냐 물어오니 다니고.

   원래 다니는 거 아닌가 하며 다닌다.


   사교육은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니니, 학원을 찾는 학생 수만큼의 이유들이 있다. 그런데 일상 안전과 보육을 목적으로 학원을 다녀야 하는 연령이 지나, 슬슬 입시 교육에 발을 내딛는 초등 고학년에서 중학생의 나이가 되어 학원을 찾는다면 잠시만 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란다.

   교과목에 상관없이 사교육을 시작할 때 학생들은 반드시 자신만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 학원을 찾는 저마다의 사정이 무엇이든 간에 학생 스스로가 그 목적과 이유를 생각해보고 말해보는 기회를 얻어야 한다. 긴 여정은 어른들의 눈에만 보이고, 아이들은 감도 잡지 못한다. 그들의 대답은 어설프고 미숙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다소간의 부담을 지고 고민한다. 엉뚱한 고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보호자는 아이 입에서 나오는 대답을 길게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느라 출발이 좀 늦어진다 해도 대답 없이 가는 출발은 목적지 없는 경주와 같으니, 차라리 늦어지는 편이 괜찮다. 보호자의 안내와 도움이 가능한 길이지만, 결정적인 출발은 아이들의 몫이어야 한다. 아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출발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본격 입시 공부를 하는 학생 중에 공부 방법이나, 스케줄 관리 요령도 영리하게 잘 배워가는 이들이 있다. 학원을 점점 늘려가며 성적이 오르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목적을 분명히 알고 학원에서의 시간을 한정한다. 학생의 수업은 강의를 듣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런 학생이 많아질수록, 학원은 더욱 학원다워지는 것 같고. 스스로 고민하고 대답을 찾아본 아이들은 중간중간 샛길로 다녀오더라도, 그렇지 않은 아이들과 다르다.  


  승연이의 얼굴을 보면, 내가 조급해졌다. 공부할 생각이 없다기보다, 무기력한 시간들은 어떤 생각을 일으킬 여지가 없었다. 마음 잃은 학생을 공부시키기는 참 어렵다. 할 마음부터 찾는 게 우선이라며 마주 앉아 속 얘기를 하기엔, 경쟁 치열한 동네의 학원 쌤의 역할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를 전기세나 내러 다니는 학생으로 생각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친 아이를 달래고, 가진 능력을 다듬으면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공부를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고등학생들은 직접 대화하면 대부분의 문제들이 개선되는데, 중학생들은 아직 보호자의 개입이 필요하다. 남이 하는 말은 뼈가 아플 수 있으니, 어느 한 편의 완벽한 지지와 격려가 아직은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마침 수강 등록을 위해 학원을 찾은 승연이 보호자와 잠시 마주 앉았다.


  "승연이가 요즘 힘들어 보여요. 꾸준히 해와서 더 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는데, 본인이 굳이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좀 지친 것 같아요. 학원 생활이 너무 오래되어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등학교 가면 지금보다 더 힘을 내야 하는데,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잠시 쉬어보면 어떨까요.

   동기 부여만 된다면, 잠깐 쉬는 정도는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 학생이니까요."


   너무나 조심스러웠지만, 진심 아닌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선생님! 그러니까 지금 우리 애가 학원에 나와서 생각 없이 자리 나 차지하고 앉아서 학원 전기세나 내고 있으니 그만 다니는 게 낫다는 건가요!!!"  


   첫마디 고성 이후 나는 말을 잃었다.

이후 보호자의 목소리는 상담실을 뚫고 나갔고 원장님의 중재로 상담은 끝이 났다. 보호자 입에서 바로 그 ‘전기세’가 나오는 바람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잠시 말을 잃었는데, 말문이 트이기 전에 원장님 출동으로 다시 입이 막혔으니 차라리 다행이었으려나. 고민은 깊었고, 한마디 한마디 충분히 조심스러웠지만 학원을 쉬는 게 좋겠다던 학원 강사의 아이러니한 상담은 거칠게 거부당했다. 그런 상담은 처음이었는데.

 

   학부모 상담은 학부모가 원할 때, 학생은 잘하고 있다는 정도로만, 출결 지각 관리 정도로만 하라는 원장님의 이를 악 다문 경고로 그날은 일단락되었다.



  어쩌면 학원은 아이들에게 두 번째 학교다. 학교와 학원의 구분이라야 저녁 식사 시간 전후 정도가 되려나. 하지만 학원은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지를 다들 자주 잊는다.


   내가 만난 학생들은 하나같이 자기 인생에 대해 진지했다.

고민의 크기와 무게는 내가 잴 수도, 짐작할 수도 없었다. 고민의 답은 당장에 손에 떨어지지 않고, 끝도 없지만 스스로 묻고 답하는 작은 질문들은 아이들을 점점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자라는 존재들에 대한 희망 담은 믿음을 갖게 되었다. 내가 만나지 않은 학생들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어느 곳의 어떤 아이라도 그런 믿음을 얻을 수 있길 바란다. 고민의 기회를 갖길 바란다.  


  그날의 상담이 선을 넘었는지도 모르겠다. 십 년이 넘은 일이지만 교실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보호자의 고성이나 차마 적지 못한 문장들은 여전히 생생하고 슬프다. 다행히 그날은 승연이의 수업이 없었는데, 여기저기 소란함에 대한 사과를 하는 중에 사실 가장 미안한 건 승연이었다.  


  얼마 못 가 나는 그 학원을 그만두었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승연이는 여전히 학원을 나왔다.

   







 




        

이전 05화 공자의 제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