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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Nov 11. 2021

내 눈에 콩깍지

소녀시대의 약속


   학원이든 과외든 선택했다면, 엄빠한테 혼나지 않으려면, 돈과 시간을 아깝지 않게 쓰려면, 제대로 해야 할 텐데 실제로 학생들은 쉽게 흔들려 게으름을 피우기 쉽다. 좀 성실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지만, 한 두 번의 불성실은 몸에 금방 달라붙어 수업 태도의 설정값이 돼버린다. 


   그래서 첫 수업의 날이면 학생들과 약속을 한다.

1. 과제는 함께 정하고, 그렇게 정한 과제는 반드시 해온다.

2. 수업 시간에 늦지 않는다.


   수업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이고, 학생들 스스로가 자기 수업에 대한 예의를 내게 보이는 방법이며, 우리가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줄 것이라, 약속의 의미를 설명한다.

   단, 지키지 않은 날은 수업 준비가 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약속을 잘 지킨다면, 언제든 무슨 일로든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망설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내어준다. 어색한 첫 만남에서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건다. 학생들은 손가락 거는 일을 부끄러워하지만, 마다하지 않는다. 첫출발로 충분하다.


   이 약속들이 잘 지켜지고, 쌓이면 결과는 언제나 긍정적이었다. 목표가 있다면 가까이 도달하고, 배우고자 했다면 충분히 알게 된다. 불안을 쫓아 일렁이는 사교육 시장에서 ‘된다!’는 확신의 말은 반가운 일이다. 정성을 들인 노력과 그로 인한 성취는 늘 어김이 없었다. 새롭게 손가락을 마주 건 학생들에게 나는 그 확신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싶었다.

  

   하지만 단순하고도 확실한 두 가지 약속을 지켜내기란 쉽지 않다. 학원이든 과외든 들쑥날쑥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잘 해낸 아이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드물고 소중한 일이다.   


   그 반은 발랄한 소녀 둘 (혹은 중간에 셋이기도) 이 열 명 못지않은 텐션을 가져 소녀시대라  불렸다.


  여름부터 시작된 그들의 수업이 한 학기를 무사히 보내고, 그 해의 마지막 날 마지막 수업을 하게 되었다. 12월 31일, 다른 반은 휴강을 원하던 그날, 소녀시대는 '공부는 1도 하지 않고 먹고 떠들기만 하는 수업'을 소원으로 내밀었다.


   "선생님, 너어어어무 힘들었어요. 수업 준비."

  “ 어, 왜들 이래~ 나는 그간의 성실함에 대해 칭찬과 감동을 말하려고 했는데.”

   "단어가 많아가지고 그런가... 가방이 점점 무거워지더라고요."


마음껏 하고 싶다던 얘기들은, 하소연이었나 보다. 과제가 시작할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건만, 아이들이 무겁다 느끼며 메고 다닌 것은 약속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거의 매시간 빠짐없이 과제를 해오고, 지각도 하지 않았다. 과제를 놓친 날은 납득할 이유가 있었고, 어쩌다 수업에 늦어지는 날은 미리 연락해 사정을 설명해두었다. 덕분에 수업 분위기도 좋았다. 계획한 진도를 나가는데 무리가 없었고, 공부 속도가 붙으면서 성적도 예상보다 빠르게 향상되었다. 신나게 가르쳤다. 소녀시대의 수업은 진도 외 다른 교재들까지 모두 꺼내 높이 쌓아두고 준비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여겨졌다.

   학생들의 힘들다는 하소연이야 날마다 듣는데, 소녀시대에게서 그것도 반년이나 지난 후에, 듣게 될 줄이야.  


  "쌤은 몰랐어. 너희들 힘들다는 내색도  는데…”

  "힘든 티 냈어요, 한숨도 많이 쉬고......"

  "한숨? 과제가 벅차다며 못해오거나 그래서 테스트가 밀리거나, 문제를 풀다  채로 두거나, 번호마다 대충 별표를 잔뜩 해서 가져온다거나. 그러지 않았잖아, 너희."


이 학생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핑계를 대거나 슬쩍 넘어가지 않았다. 미리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고, 부족하지 않으려 애쓰는 노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아이들이었다. 유난한 모범생들이기보다 그저 그 약속을 잘 지키는 아이들이었다.


   "쌤. 그래도 되는 거였어요?"

   "쌤! 막 안 해오고 못 해오고 그래도 되는 거였어요?"

   " 시간에  약속은 지키라고 했잖아요. 손가락까지 걸고.  지키면 집으로 보낸다면서요."

   "다 맞아. 반년을 꼬박  지켜낸 너희 대단한 것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기도 하니까. 덕분에 이렇게  해의 마지막 , 공부는 1  하고 먹고 떠드는 수업도 하잖아."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얼굴들, 억울한 얼굴이 한없이 귀엽던 그날의 기억.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원에 왔는데 기어이 집으로 다시 돌려보낸다는 말에 겁을 낸다. 보호자들에게도 우리의 약속을 미리 알려두고 실제로 이른 귀가가 자주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겁을 먹어 지키는 약속의 유효기간은 길어야 한 두 달이다. 집으로 쫓겨간 학생들은 집에서도 또 혼이 나지만, 그 역시 두세 번 반복하면 약발이 떨어진다. 우리가 걸었던 손가락은 어느새 헐거워지고 그런 학생들에겐 다음 작전(약속이 아니라)이 필요하다.

   

   소녀시대는 반년 동안 누구도 집으로 돌아간 적이 없다. 놀며 보내는 반년 말고, 공부하며 보내는 반년은 긴 시간이다. 잠을 미루며 과제를 하고, 숨이 차게 달려서라도 수업 시간 5분 전에 건물 1층에 도착했다. 단어책을 접어들고 시간에 맞춰 뛰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이 아이들은 자신의 시간을, 수업을 아끼고 스스로 꾸려나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수업은 더욱 열심히 알차게 준비하게 된다.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할 수 있게 나도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어려운 문법을 배우는 중에도 웃을 일이 생긴다. 알차고 즐거운 배움이 된다.  





   수업을 마무리할 때, 약속대로 함께 과제를 정한다.

   "얼마나 해올 수 있어?"


  때로 학생들은 호기롭다. 갑자기 엄청난 양의 단어를 외우겠다 하고, 독해 분량을 여러 장 추가하기도 한다. 학생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공부 속도가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으므로 그 과제들의 결과는 뻔하지만, 그런 날은 잘하려는 마음이 넘치는 날인가 보다 한다. 대신 호기인 걸 눈치채면, 기대를 키우지 않고 다음을 준비한다. 나름의 갈등 예방책이랄까.

   평소보다 엄살을 부린다면, 감춰둔 주말 약속을 눈치챘다면, 못 이기는 척 분량을 줄이거나 독해든 문법이든 한 영역의 과제를 생략하기도 한다. 한두 번의 아쉬운 소리를 귀담아 들어주면, (사실은 대부분) 선생님이 정하는 과제들도 함께 정한 것이라 생각하고 성실하게 해낸다. 아이들은 그런다. 어떻게든 공부를 시키려는 노련한 속임수가 아니다. 선택할 수 있는 아이들이 자기를 위해 하는 행동들이다. 교실에서의 우리는 주고받은 약속이 있어 더욱 가능한 일이다.     




   "지금 어디야?"

    수업 시간 10분이 지나면, 연락한다. 사실은 1분도 늦지 않길 바라지만, 셔틀이 막히거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있으니 10분은 기다려본다. 솔직히 말하자면, 소녀시대의 습관이 되어버린 ‘5  1 도착’이 매우 드문 일이다. '5 ' 몸으로 실현되려면, 마음속 약속 시간은 5 앞으로 정해두어야 하고, 이게 아마도 가장 어려울 것이다. 집에서부터, 책가방을 챙길 때부터, 학교에서 집으로 향할 때부터, 친구들하고  흔들며 헤어질 때부터, 약속을 지키기 위해   먼저 나서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3시 수업에 맞춰 3시에 집을 나서는 학생들도 많다. 그렇게 되면 교실에 5분쯤 늦게 들어오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데도 5분이 걸리고, 왜 늦었는지를 설명하느라 5분, 어떤 교재를 꺼내 어디를 펼쳐야 할지 기억해내는데도 5분이 필요하다. 그런 5분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그 수업의 주인이 되는 일도 5분 뒤로 미루고 만다.

  

   주어진 수업 시간을 꽉 채우고, 그 시간 안에 담긴 전부를 가져가는 건 어느 쪽일까.



   집으로 돌려보낸다는 말이 너무 무서웠다는 것도, 서로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것도 소녀 시대에겐 중요했다. 하지만 다른 어떤 이유보다 자신의 수업, 시간, 공부 나아가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힘을 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약속이 습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일로 바꾸었고, 쉽지 않았지만 노력한 아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단단해졌다.

   멋있었다.


   "처음 시간 약속은 나랑 했지만, 영어 외에도 학원 스케줄이 많잖아. 스케쥴링을 하는 건 너희 몫이었지. 그러니 이런 약속 결국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 되고. 너희는, 너희들의 약속  켜낸 것이다. 소녀시대여."

   "그렇게 깊은 뜻은 없었는데요."

  

   거창한 의미들은 낯설고 오글거리지만, 때로는 더 근사한 칭찬이 되니 나는 아끼지 않았다.


   하나 더,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학생들은 선생님의 시간도 귀하게 생각한다는 인상을 준다. 기분 좋은 일이다. 소녀시대의 수업 교재가 늘어나도, 아무리 수업 준비가 많아져도 고단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수업 태도가 충분히 큰 힘을 내게 했기 때문이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을 닮은 마음으로 채워나가니, 목표가 무엇이든 긍정적인 결과를 확신할 수 있었고 우리는 정말 신나게 공부했다.



  그리고, 소녀시대 반에만 추가된 약속이 하나 더 있었다.

3. 싸워도 티 내지 않기.

절친끼리 시작한 팀이었다. 친숙함에서 오는 안정된 분위기, 서로를 격려하는 마음, 드러나지 않지만 자극이 되는 경쟁 덕분에 수업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애정을 담보로 일어날 갈등 또한 필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부디 교실 밖에서 해결하고 오길 부탁했다. 그 반은 둘에서 셋, 셋이 둘이 되었다가, 다시 셋, 마지막에는 둘이 되는 변화를 겪으며 입시를 끝냈는데, 둘을 고정 멤버로 여럿이 들고 나는 동안에도 얼굴 붉히고 수업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쌤, 아닌데요."


   2학년 토론 대회날도 싸웠고, 학생회 준비한다고 지각할 뻔 한 날도 싸운 거고, 명절 끝에 만나기로 해 놓고 까먹어서도 싸웠고, 동생 얘기를 다른 친구한테 옮기는 바람에 한동안 말 안 하고 지냈고, 둘이었다가 다시 셋이 되었을 때 하나만 빼놓고 간식을 먹어서도 말 안 하고…… 그랬다고 수능이 끝나고야 들었다.  


  "몰랐네..."

  "질문대답하는  말고는 서로 한마디도   날도 있어요."


    감정적으로 굴까 봐, 뾰족한 말들이 나올까 봐 일부러 입을 꾹 다문 시간도 적지 않았단다. 꽤나 애를 썼을 텐데, 너무 늦게 알았다. 철석같이 약속을 지켜주어 정말 티 나지 않았는지, 내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씌어 미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안 보였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소녀시대의 이야기는 ‘성실했던 학생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였다’로 마무리 하기는 부족하다.


  나의 소녀시대는 내내 수업 시간을 미리 열었다. 수능 전날까지 자신들이 세운 촘촘한 계획대로 공부했고, 직접 입시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겪은 일로 백만 개의 영웅담을 남겼다. 갈 수 있는 학과와 마음에 드는 대학을 두고 고민하다 가장 원하는 곳을 스스로 선택했으며, 그 선택을 웃으며 소문냈다. 어리둥절 반 좌충우돌 반으로 버라이어티 한 대학 생활을 만끽하고, 노느라 바쁜 데다 나이를 먹어(?) 까먹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데 고딩 시절의 짬으로 살아남고 있다며, 알딸딸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새로운 문을 열 때마다 자랑을 하고, 5월이면 톡을 보내온다. 그들이 소식이 뜸해도, 한창 청춘을 사는 소녀시대의 바뀐 프로필을 들여다보는 일은 추억 가진 사람의 기쁨이다.  


아이들이 지켜낸 것은 우리의 약속을 넘는다.

너무나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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