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말하지 않는 영어시간
고3, 유린이와의 두 시간 수업이 끝나면, 저도 나도 한숨을 몰아 쉬곤 했다.
꼿꼿하게 세웠던 허리의 긴장이 그제야 풀리면 조금은 개운한 기분으로 우리는 수업을 마쳤다.
수업은 정시 시작, 단어 테스트 10분, 채점과 과제 체크 5분. 그리고 남은 105분을 꽉 채워 텍스트 수업. 유린이는 한 타임 수업에 모의고사 1 회분을 해치웠다. 영어 모의고사 1회는 듣기 17문항, 독해 28문항, 모두 50문항으로 구성된다. 유린이의 경우 듣기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어서, 별도의 듣기 수업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텍스트를 해치우기엔 짧은 시간인데, 그걸 해낸 것이다.
유린이는 고2가 되는 겨울 방학부터 조급한 마음을 빡센 공부로 채우는 작전을 세웠다. 공부량을 늘리기 위해, 수업 시간에 진행하는 텍스트 해석과 어법 찾기, 구문 정리, 새 단어 외우기 등의 과정을 모두 과제로 돌렸다. 처음엔 양이 너무 많아 과제로 끝내지 못하고 수업 시간까지 끌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익숙해지면서, 나름의 체계가 생겼고 서서히 과제로 해야 하는 공부량도 줄어들었다.
그럼 수업 시간에는?
혼자서 과제를 하고, 혼자서 공부를 하다가 생긴 질문을 해결했다. 헛갈렸던 부분을 내밀고, 자신이 풀어낸 방식을 설명해 보이면 나는 잘못한 부분이나 틀린 부분을 찾아 설명해주었다. 유린이가 가져온 질문의 답이 끝나면, 평소 취약점이 출제된 문제들을 다시 언급하고, 어렵거나 중요한 내용을 강조해주었다. 절대 학습량이 쌓이면서 그 또한 줄어갔다.
우리는 각자 얼굴을 마주하는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수업 시간을 훨씬 넘는수업 준비의 시간을 가졌다. 그 준비는 사실 자기 공부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25개의 지문을 가지고 기본은 물론 그 이상의 수업이 가능했다. 전체를 충분히 공부하고, 중요하고 어려운 부분만 더블 체크하는 방식이었다. 과제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줄어가고 소화해내는 텍스트의 수는 늘어갔다.
수업 중 여유가 조금씩 생기면서, 특별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능 영어 문제나 모의고사 텍스트 중에는 우리말 해석을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지문이 한 둘이 아니다. 영어만 잘해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단어를 많이 외운 덕분으로 찍어 맞힐 수 있는 문제도 있지만, 어떤 문제들 학생이 가진 이해력, 문해력, 추론 능력 등 온갖 능력을 동원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능력은 아니다.
한 발 더 나아가기로 했다.
난도가 높은 텍스트를 선정해, 원문을 찾아 앞 뒤 내용까지 더 읽어두었다. 사회적 이슈가 기출문제로 나오면 한글 뉴스 기사나 관련 자료를 더 찾고, 해당 이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따로 기록했다.
빈칸 유형으로 출제되는 30번대 문제들의 경우 출제자의 의도와 요지를 손글씨로 직접 써두었다. 귀찮은 쓰기를 한 문제도 거르지 않았다.
언제나 새로운 질문이 생겨났고, 질문에 따라 수업의 방향이 달라졌다. 실마리를 제안하면, 구체적인 해결 방법을 떠올리는 것은 유린이 몫이었다. 시각의 차이가 있어, 주고받는 질문과 답이 토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수업 시간 내내 유린이도 나도 입이 마르도록 말을 했지만 영어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던 날들이 있었다. 영어 시간인가 싶은.
시험을 보느라 단어를 불러주거나, 녹음된 파일의 소리를 키워 듣거나, 필기하라고 동의어나 반대어를 불러주거나, 텍스트의 문장을 하나씩 읽으며 해석할 일이 없었다.
영어를 말하지 않는 영어 수업이었다.
더 많이 읽고, 더 깊이 몰두하며,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어냈다. 유린이는 그야말로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나도 그래야 했다.
모의고사 영어는 1등급이었다.
절대 평가가 되어서 만만해진 면도 있지만, 2등급이 그 위의 경계를 넘어서기란 여전히 만만하지 않다. 같은 등급 안에서도 안정적이냐, 어쩌다 받은 등급인가를 가르는 실력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1등급의 경우, 그 차이를 가르는 실력은 3점 배점의 문제를 찍지 않고 직접 풀어내는데, 문제뿐 아니라 선지까지도 제대로 읽어내는 데 달려있다. 유린이는 안정적인 1등급을 받는 고3이었다.
이런 유린이도 처음부터 우수했던 학생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잘하는 학생은 어디에도 없고.
다만 적극적으로 실천한 한 가지는 수업 시간에 질문하자 는 것이었다.
질문을 하려니, 무언가 궁금해야 하고, 그러려면 책을 뒤져봐야 했다. 직접 공부를 해야 질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단어의 의미나 문장의 해석을 물어왔다. 그날의 질문이었다.
단어는 사전을 찾고, 해석은 해설지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쌤이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되물었다. 유린이는 정말 어떤 질문이라도 괜찮은지 호기심을 가졌다. 자신의 질문들이 받아들여질지, 자신이 어떤 질문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유린이는 질문을 만들어 내는데 재미를 느꼈다. 단어 테스트나 과제 체크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 수업 준비가 철저해졌다. 단어나 문장 해석은 물론, 텍스트의 유형별 풀이까지 혼자서 공부하고 왔다. 질문을 찾아내기 위해, 수업 중에 하던 공부를 집으로 가져갔고, 그 공부를 혼자 하고 난 유린이의 질문은 달라졌다. 수업과 수업 사이, 유린이의 공부 시간이 얼마나 알차게 채워졌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느 날은 답지의 정답은 ③번. 아무리 생각해도 ⑤번도 답인데, 답이 하나인 이유를 납득하지 못해 화를 내었다. 습관적인 채점을 하다가, 해설지의 정답에 반기를 드는 순간은 반가운 신호다. 등급이 오르는 것만큼이나 의미 있는 성장이다. 내용 파악도 하지 않은 채, 질문을 위한 질문을 하는 경우만 아니면, 이런 경우 나는 학생들의 미숙한 논리와 서툰 의견들을 무조건 지지한다. 정답이 정답인 이유를 아는 이상, 우리끼리 두 개의 답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그런 학생들은 답지의 정답을 이기기 위해 자신이 선택한 답을 보고 또 본다. 고민하니까, 시키지도 않은 추론을 하니까, 그 과정에서 얻는 것은 정답지 위에 인쇄된 번호를 넘어선다. 그런 질문을 가져본 경험은 답지의 답만이 정답으로 인정되는 이유를 깨닫는다. 나아가 출제자의 의도를 간파하고, 시험이라는 시스템을 이기는 방법을 찾아낸다. 물음표의 답이 마침표는 물론 느낌표라도 상관없어진다.
자기 공부는 가속이 붙는다. 공부의 가속이 가져오는 변화는 놀랍다. 그렇기에 나는 모든 학생에게 기대를 할 수밖에 없다. 어떤 학생에게든 기회를 주고 지켜보고 싶은 이유다. 섣부른 짐작이나 성급한 단정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영어 공부의 목적은 모두 다르지만, 입시 영어의 경우 우선 배워둘 것들의 범위는 정해져 있다. 어차피 하는 공부, 자신만의 공부로 해낼 수 있길 바란다. 배우고 익히며, 배우고 익힌 것들로 새로운 질문을 피워낼 수 있길 바란다.
아이들은 질문을 찾으면서도 답을 구하면서도, 그 과정에서도 배울 수 있다. 누군가는 알지 못할 자신만의 즐거움이 공부의 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