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주문이 자라는 시간
영어 강사일을 전업으로 하게 되면서, 학생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영어를 시작하는지 새삼스레 궁금해졌고,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 학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말은 통하는 청소년들과 수업하다가 말이 많은 초등학생들을 내 발로 찾아가다니, 그 시절의 나는 참 호기로웠다.
초등 1학년 반, 서로를 영어 이름으로 부르며 파닉스를 배우고 있었다.
미취학 아동과 초등 저학년 영어 교육의 시작에 등장하는 phonics. 당시만 해도 학년마다 파닉스 반이 있었다. 학년이 올라간다고 파닉스 과정의 레벨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었고, 예시 단어나 문장의 길이가 길어지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3학년과 수업하는 1학년은 으쓱하겠지만, 1학년과 수업하게 된 3학년의 머쓱함을 배려하는 분반이었다.
그리 오래진 않은 시간만 돌아봐도, 영어를 처음 시작하는 시기가 지금보다 늦거나, 다양했다.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고, 영어 교육에 있어서는 단연 파닉스의 중요성, 필요성, 적절성에 대해 가장 먼저 묻고 답하게 되므로 이 과정이 아이의 영어 인생을 결정지을 절체절명의 교육 과정으로 믿게 된다.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하고, 가능한 한 서둘러 완성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든다. 때문에 파닉스의 적절 연령은 점점 낮아지고, 어린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바쁘다.
평생 과업 영어를 위한 교육은 다수를 약자로, 시작하기도 전에 의문의 패배자로 만든다. 실제보다 과장된 위기를 먼저 접하고 불안한 보호자들에게 수아를 소개한다.
헤르미온느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좋아하던 수아는 3학년이었다. 수아는 아직 알파벳도 끝까지 제대로 외우질 못해서, 새로 열리는 3학년 파닉스 신입반 (C반)에 들어가야 했지만, 소개해준 친구와 함께 다니기 위해서 기존에 있던 3학년 반(A반)으로 등록했다. 수아는 뽀글거리는 긴 머리를 양 옆으로 흔들면서, 아빠가 나무를 깎아 만들어준 지팡이를 휘두르고 마법 주문을 외치며 학원 복도를 누비고 다녔다. 첫날부터.
학원에서까지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헤르미온느처럼 진짜 말로(발음의 차이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문을 걸고 싶었던 수아는 친구가 스토리북을 읽는 모습에 마음을 바꿨다. 스스로 학원에 가겠다고 한 것이다.
수아의 보호자는 다른 친구들이 1학년 때부터 꾸준히 해 온 반에서 아이가 버텨낼 수 있을지, 시작이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수아의 이유가 공부를 계속하게 할 수 있을지, 유창하게 읽으려면 얼마나 걸릴지, 학원 경험도 공부 머리도 없는 아이가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많으셨다.
“한 달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왜 이렇게 어려워요?"
"연산에서는 덧셈, 뺄셈 배우고, 그다음에 곱셈을 배우잖아. 파닉스도 순서가 있는데, 수아는 앞에 걸 모르니까 지금은 어려울 수밖에 없어."
수아가 그 반에 합류했을 때, 이미 이중 모음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1학년 반으로는 절대 안 가고, 새로 시작하는 3학년 반도 안되고, 친구랑 같은 반이어야 학원에 다니겠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등록만 하길 바라는 것은 보호자의 바람이기도 학원의 입장이기도 했다.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기존 학생들의 수업에 방해가 돼서는 안 되었고, 수아를 위해서도 보충이 필요했다. 수아는 한 발 물러나 추가 수업을 약속한 뒤 합류했다.
"맞아. 수아야 규칙을 배우면 어떻게 해야 하지?"
"지켜야죠."
3학년 수아는 파닉스 설명이나 수업의 전반적인 흐름을 힘들이지 않고 따라왔다. 친구도 있고, 보충까지 있으니 초반에 자주 드나든 덕분에 학원 생활에 적응하는데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수아는 '규칙'을 지켜 낯선 단어들을 읽어내는 배움을 몸과 머리로 동시에 이해했다.
어린 연령의 아이들은 새로운 규칙을 배우고 나면 앞서 배운 규칙을 금세 잊기 때문에 돌아가 다시 확인하며 수차례 반복한다. 열 살 수아는 이미 배운 규칙들은 '당연히’ 기억하면서, 마음껏 응용하며,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 모를 단어들을 마구 만들어내 주문처럼 읽어냈다. 규칙에만 맞으면 우리끼리는 정답이었다. 설명하고, 이해하고, 직접 네댓 개의 단어를 읽으면 끝이었다. 자연스럽게 외워졌다. 지루함을 떨치거나 반복을 늘리기 위해 놀이와 게임이 필요하지 않았다. 40분이 한 타임이었는데, 보충 수업 네 번만에 수아는 본 수업의 진도를 완전히 따라잡았다. 그 반의 친구들이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을 보내며 도달한 진도였다.
"쌤, 이 주문들을 영어로 써주세요. 진짜 영어로 말해야 주문이 걸리죠."
수아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주문을 한글로 쭉 적어와서는 영어로 옮겨달라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배운 파닉스 규칙을 찾아 동그라미 치고, 하나씩 소리 내어 맞춰갔다.
마법의 힘이었을까, 알고 보니 머리가 엄청나게 좋은 아이였을까. 물론 수아는 열심히 했다. 하지만 힘들이지 않고 짧은 시간 안에 파닉스를 배워낼 수 있던 이유는 수아 스스로 시작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른 아이들처럼 더 일찍 파닉스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은 그냥 흘러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배움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긴 시간을 들여 반복과 연습의 과정을 거치고, 비로소 체화된 학습의 결과물은 소중하다. 이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서의 영어의 경우, 파닉스의 경우, 주변을 의식한 보호자의 기준보다 늦었다고 생각할 즈음이어도 아이에게는 적절한 타이밍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학생이 어리다고 해서 영어를 지금 여기서, 모국어처럼 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영어 공부는 배우고 익히고, 외우고 응용하는 학습 능력이 자랄 때까지 조금 미뤄두어도 된다.
아이들의 몸이 신나게 노는 동안 머리는 쑥쑥 성장한다. 잘 자란 머리로 잘 생각하며 수월하게 배워낼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성장 속도에 어울리는, 그래서 지쳐 떨어지지 않고, 아이 스스로 도전을 이어가는 배움이 출발의 모습으로는 더 근사하지 않을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도 3년을 손 놓고 지냈다 해도, 준비된 아이라면 3개월 만에 얼마든지 파닉스를 마칠 수 있다.
고등학생이 되면, 소리 내어 영어를 읽을 일이 별로 없다. 한 번씩 지문 읽기라도 시키면, 더듬거리는 소리 덕분에 교실엔 웃음이 터진다. pale [페일], male [메일], sale [세일] 은 읽으면서도 stale [스떼일]에서 갑자기 [스탈레]를 찾는 일도 예사다. 조기 교육 시절을 떠올리자며, 파닉스 규칙 몇 개를 알려주면 여전히 키득거리면서도, plake [플레이크] 도 mistaken [미스 테이큰]까지 그 자리에서 해결한다. 그쯤 되면 '규칙'이라기도 민망하고 이해하고 말 것도 없어진다. 너무 쉬우니까. 아마 그들이 파닉스를 배운다면 3시간, 아니 30분이면 충분할 것이다.
준비된 학생에게, 바로 그 학생의 타이밍에 잘 맞는 배움은 수고를 덜어준다. 가벼우니 더욱 즐거울 것이다.
영어, 천천히 시작해도 즐거울 수 있다.
나의 낙관은 수아를 만나 시작되었고, 여전히 변함없다.
진짜 자기 공부에 몰두하는 입시생이 되었을 때, '영어가 그땐 재미있었지.' 하는, 과거의 자신이 남겨둔 응원에 학생들은 큰 힘을 얻는다. 남들보다 이른 시작 시기보다 낯선 언어를 배우며 낯선 세상을 알아가던 즐거움, 배우는 일의 뿌듯함이 더 큰 응원이 될 것이다.
유난히 초등학생들에게 유창하기를, 자연스러운 말하기를 기대한다. 그 기대를 부디 접어주길. 오히려 학습의 형태로 배워야 하는 현실을, 일정 수준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는 편이 보호자도 학생도 부담을 던다.
그런 노력과 수고를 아이 스스로 해낼 수 있게 되면, 어울리는 목표도 정할 것이고, 앞으로 달려 나갈 것이다. 아이가 공부의 주인이 되면, 보호자는 응원하는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
3학년 수아의 얼굴엔 장난기 어린 웃음이 가득했다.
그 의미를 알뿐만 아니라, 헤르미온느와 다름없는 진짜 말로 수아의 주문이 걸려온다. 지팡이 끝을 보던 우리는 웃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