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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Jan 13. 2023

#09. 향초

네 시간을 내어드려요

★★★

완전한 동그라미는 없지만 :)




   반가운 손님이 오는 날이면 간단한 청소를 마친 화장실에 초를 켜둔다. 살랑이는 불빛과 스치듯 풍기는 달콤한 향기로 당신을 환영한다는, 나의 작은 인사.

잠시 들르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곳에 인사를 켜둔다. 그렇게 내어준 시간이 시작된다.

  

  초라고 하면, 전기가 나갔을 때 사용하는 물건이니 길고 하얀 양초 말고 작고 예쁜 초들이 다 무슨 소용이람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선물을 고를 일이 있을 때, 더 이상의 고민은 하고 싶지 않을 때, 그래도 예쁨은 놓치고 싶지 않을 때, 그럴 때 사게 되는 소품 정도였달까.

  그러다 우연히 들른 어느 카페에서 구석구석 스며든 은은한 향을 만났고, 반했다. 그리고 그날 그곳의 향기에 냄새뿐 아니라 포근한 기운이 배어있던 이유는 향초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뿌려 놓은 향수나 1분에 한 번씩 분사되는 방향제와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어떤 장소를 냄새로 기억하는 경험은 소중하다. 어느 장소나 좋은 냄새와 역한 냄새가 공존하는데, 먼저 치고 들어와 자리잡는 건 대게 반갑지 않은 쪽이다. 집으로 돌아와 코 주변의 냄새를 서둘러 닦아내다보면 어떤 기억들은 가려내기도 전에 지워지고 만다. 그런 날이 잦았기에, 그날 그곳, 기분이 좋아지는 향으로 나를맞던 장소는 특별했고, 덕분에 나는 초대를 한 날 초를 켜게 되었고.

   

   그 날 이후로 가래떡 모양의 양초는 물론 예쁨을 뽐내는 초들에 관심을 가졌다. 다양한 향기를 맡았다. 우드 심지의 타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촛불멍에 빠지기도 하고. 귀엽고 작은 초들은 아까워서 불을 붙이기까지 수개월이 걸리니, 다 사모으지는 말자 다짐하였는데, 그러고 나서도 그런 것들을 만들고 포장하는 계정에 들어가면 코가 빠지도록 한참을 구경한다.


   초를 켜는 일은 초가 타 들어가는 동안의, 가까운 미래의 소소한 행복을 보장한다. 마치 화병에 꽂아 테이블에 올려둔 한아름 꽃다발처럼 말이다. 환대의 장소를 떠올리며 그곳의 분위기를 지금 내가 있는 여기로 데려오고, 일렁이는 빛으로 밤을 더욱 밤답게 누리고, 창밖의 빗소리를 더 크게 밝히며 말이다. 초가 촛불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나만의 작은 의식을 치르는 기분이 든다. 근사하지 않은가. 아,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고 난 흔적이 내일 아침까지 남아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향초는 꼭 필요하다. 향기로운 아침 공기 못 잃어.   


  그림의 초는 '네 시간 향초'라는 이름을 가졌다. 동그란 초 하나를 바닥까지 태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네 시간. 오전 혹은 오후의 한 때를 채울 정도의 시간이다. 초의 표면이 균일하게 녹기 전에 꺼져버릴까 신경 쓰거나, 갑자기 자리를 비워야 해 타는 초를 아쉽게 끄지않아도 되는 적절한 크기와 시간이다. 분위기와 분주함을 모두 잡았으니, 일단 잔뜩 사두고 아껴가며 불을 붙이는 중이다.


  심지에 불씨가 닿으면 초는 일을 시작하고, 물처럼 흐르다 공기처럼 흩어진다. 녹아서 일렁이는 초의 몸을 보며 얼마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혹은 남았는지를 가늠한다. 촛불은 가만히 흔들리고, 머리로는 자꾸만 흔들리지 않음에 대해 생각한다. 바람이 불면, 시간은 좀 더 빠르게 흐르기도 한다. 그대로인 것 같은데 어느새 기울어진 심지가 아슬아슬하다. 초는, 놓인 공간의 공기를 모두 차지하고 나면 결국 끝이 나지만, 스며든 향을 맡으며 완전히 사라지지 않음을 안다.


   손님맞이의 시작에 켜져, 함께 웃고 떠드는 동안 가만히 타오르다 손을 흔들며 모두가 떠나고 나면 초는 꺼진다. 초는 네 시간을, 나는 내 시간을 내어주고 우리의 환대가 끝이 난다.


   완전한 동그라미의 덫에 걸려 오히려 시점이 어색해졌지만, 빛을 그리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지워내야 하는 것을 배웠다. 향기와 함께하며 네 시간 향초를 그려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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