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발견
해마다 생일이 되면 H는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장소를 묻는다.
그중 하나라도, 여차하면 한 번에 다 해버리자고 한다. 집에서 만나거나 온라인으로 하는 쇼핑은 안된다. H는 동생, 가장 가까운 이인데 외출 준비를 해야 만날 수 있는 사이다.
한 때 나는 생일이면 온갖 알람을 다 끄고 꽁꽁 숨어 하루를 보냈다. 해가 넘어갈 무렵이 되어야 맛있는 걸 먹어볼까, 하루가 다 갔네, 오늘도 결국 같네, 하면서 생일을 맞이하기보다 보내기를 조금 더 편하게 느꼈다.
어느 해인가, H는 일찍 홍대로 나오라더니 이른 아침부터 애프터눈 티 세트를 파는 브런치 카페에서 나의 생일 파티를 시작했다. 영국에서 온 차의 은은한 향기가 여유를 부르고, 전용 트레이에 담긴 달고 고소하고 작고 예쁜 브런치 겸 디저트들은 활짝 웃는 사진을 남겼다. 가만히 보내던 생일만큼, 그날 역시 내 생일 같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생일을 ‘맞이하기‘도 한다. 여행도 가고 파티도 하고 시끌벅적한 모임도 가지면서. H이 물어올 때, 빼지 않고 기꺼이 답을 내놓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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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실 때, 머그컵이 좋다.
두 손으로 감싸 들었을 때 손바닥 전체를 따뜻하게 데워주는 컵 모양이 든든하고, 직접 만든 컵받침을 깔아 둘 수 있어서다. 혼자 한 생각이 읽혔는지, 생일이 다가오는 걸 알았는지, 며칠 째 인스타의 알고리즘이 머그컵 피드를 띄우기 시작했다. 특히 북유럽의 빈티지 스타일 찻잔이 쏟아졌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 상세 페이지를 보았나 보다. 유럽을 열두 번도 더 다녀온 듯 한 피로감이 몰려올 즈음, 직접 보고 사야 끝나겠다 싶었다. 올해 H와의 생일파티 장소가 그렇게 결정되었다.
우리는 경기도 외곽에 있는 북유럽 빈티지 샵으로 향했다.
아주 작은 머그의 가격치고 십만 원이 훌쩍 넘으니 과했지만, 피드의 사진만 봐서는 우리 식탁과 아니 우리 책상과 아니 우리 집 어디 두어도 너무나 적당할 것 같았다. 분위기는 전혀 과하지 않았으니까. 직수입이기도 하고 빈티지라는 명목이 있으니 가격이 그런 거지, 부탁도 않은 전후 사정을 이해하면서 오히려 부디 딱 하나만 마음에 들기를 바랐다.
도착해 보니 매장은 굉장히 넓었고 3층에 걸쳐 있었다. 촬영은 가능하지만 음료는 반입이 안 되는 웅장한 공간으로 우리는 입장했다.
황동 열쇠를 넣어 오른쪽으로 반바퀴 돌리면, 안쪽에 숨겨진 나무로 만든 걸쇠가 풀리면서 문이 열리는 근사한 캐비닛은 오백 사십 구만원. 오천사백구십만 원이었다 해도 고개를 끄덕였을 품격이 있었다. 평소엔 네 식구가 둘러앉아 사용하다가 친구들이나 대가족이 모이는 날이면 열 두 사람도 너끈히 앉을 수 있도록 변신하는 확장형 원목 테이블은 펼쳤을 때 이음새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섬세한 구조였다. 손에 닿는 감촉이 하나같이 너무 부드러워 그 위에서 잠이라도 자겠다 싶은, 이 멋진 가구들을 데려가기 위해 살고 있는 집을 상상 속에서 몇 번을 바꾸었나 모른다. 손 때가 묻어 잘 길들여진, 그럼에도 백 년은 더 건재할 것 같은 힘이 느껴지는 물건들이었다. 앉지 말라,는 안내가 놓인 의자들이 아쉬웠지만, 의자 오십여 개도 모두 돌아봤다. 가격표의 동그라미 세기를 멈추고, 이다음에 데려가마 하는 약속을 사진에 담으면서 우리는 신이 났더랬다.
드디어, 키친 웨어가 있는 공간.
부엌은 H에게는 최애 공간이고, 나로선 집 안에서 다섯 아니 여섯 번째 정도로 좋아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머그컵은 여기까지 나를 달려오게 했으니, 지그재그로 걸으며 놓치는 선반 하나 없이 전부 둘러보았다. 한 시간 남짓, 머그컵만 몇 십 개를 보았다. 채도가 낮은, 그러니까 초록이기보다 카키 내지는 올리브인, 노랑이기보다 오히려 가을의 은행나무 잎에 가까운, 장미의 빨강이기보다 벽돌의 붉음을 담은 그런 고운 색을 심플한 붓질 한 번으로 그려낸 컵들이었다. 여느 머그컵들과는 다른 손잡이 모양, 라인의 미묘한 차이, 특이한 용량 기준, 세트로 두지 않아도 꽤 괜찮은 저들끼리의 어울림.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런데 다만, 사진과 완전히 같은, 사진 그대로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피드로만 보았을 때는 직접 들어보고 싶어 몸이 들썩였는데…… 손잡이가 좀 작아, 구멍 위치가 애매한데, 컬러가 계절을 타려나, 에스프레소 용으로는 너무 크고 아메리카노 용으로는 너무 작지 않아? 컵을 손에 들고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매력에 끌렸다면, 나를 컵에 맞추었을 텐데 말이다. 멋진 물건을 한참 동안 보고 뭐라도 사겠다는 준비 자세를 갖췄는데 말이다. 직접 보고 하나만 사야 할 텐데 했거늘, 직접 보고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선반을 마지막으로 돌아보고는 입구 쪽으로 나가 H의 쇼핑이 끝나길 기다렸다.
분명히 알았다. 북유럽 빈티지 스타일의 머그컵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고유의 컬러와 디자인은 멋지나, 실제로 보니 내 눈에 예쁘지 않았다. 피드에서는 볼 때마다 점점 더 예뻐 보였는데, 그래서 피할 수 없는 나의 취향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고르기만 하면 결제로 이어질 수 있었는데, 그렇게 데려올 만큼도 아니었다.
잘 봤습니다, 인사를 하고 놀이동산에서 폐장 시간까지 놀다 나온 사람처럼 조금은 지쳐, 하지만 개운하게 매장을 나왔다.
나의 취향이 아니라는, 취향의 발견.
좋아하는 것이 취향이라면, 좋아하지 않음도 취향인데, 후자는 알아채기 쉽지 않다. 우리의 마음은 좋은 것, 나은 것을 선택하는 데 길들여져 있다. 그 안전함에 익숙해져 반대편에 있는 또 하나의 내 모습을 놓치곤 한다. 빈손으로 나오는 즐거움이 있었다. 아닌 건 아닌 거지 하며, 나를 가볍게 만드는 선택이었다. 알고 보니 내 것이 아니라는, 직접 경험하니 그건 ‘아니‘였던 순간은 새삼스러웠지만 반가웠다. 어쩌면 소소한, 그러나 여태껏 몰랐던 나에 대한 발견이 일어나기에 썩 잘 어울리는 날이었다.
H와 나는 돌아오는 길에 매운 짬뽕 맛집에 들러 면요리를 한 그릇씩 먹었다. 생일도 축하하고 새로운 발견도 축하하고. ‘취향이 아니라’는 취향을 발견하게 해 준, 북유럽 빈티지 샵에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