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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Nov 22. 2024

갔던 길을 다시 걸었습니다.

목도리 찾아 8000보

 10월의 어느 주일, 예배를 마친 그이와 나는 예배당을 나와 정동길을 걸었다.

가을이 오는지 은행나무가 열매를 떨구기 시작했고, 덕분에 우리는 은행을 밟지 않기 위해 돌다리를 건너듯 가을 길을 껑충껑충 걸어야 했다. 늦더위가 물러가지 않았지만 공기는 분명 선선한 기운을 띄기 시작했다. 언제나 사람이 붐비는 길이지만, 시간이 이른 덕분에 아직 한산했다. 우리는 나선김에 덕수궁 둔덕전에서 열리는 젊은 작가와 디즈니의 협업 전시를 보러 나섰다.

  

   덕수궁은 시청 주변 빌딩 벽에 비하면 낮은 담을 가졌지만, 일단 그 안으로 들어서면 바깥세상은 완전히 차단된다. 무례한 확성기 소리가 넘어오더라도, 궁을 지킨 오랜 나무들이 무심히 흡수해 버린다. 걸음은 느려지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하늘과 땅이 훨씬 크고 넓은 곳을 걷고 있자니, 여유가 넘치고 평안해졌다. 돌계단을 반대로 올라가 활짝 문이 열린 즉조당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사진도 찍었다. 전시는 귀여웠다. 기대 이상으로 둔덕전의 색감이 너무 멋져서 우리는 또 사진을 찍었다.

   아이가 청소년이 되면서, 둘이 남는 시간이 늘어난다. 24시간 전담 마크하는 보호자일 때 그토록 그리워하던 시간인데 아직도 어색해서 적응 중이다. 둘이 보내는 시간을 누리고 즐기자고 손가락을 걸어둔 우리는, 모처럼 들떠서는 제법 그 약속을 잘 지켜냈다. 사진마다 활짝 웃은 사람 둘이 있는 걸 보니 정말 그런 듯하다.


   궁을 나와 다시 교회로 갔다. 지인을 만나 함께 식사하고 북카페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이 너무 좋아, 그대로 집으로 가기 아쉬워 커피를 사들고 우리의 비밀 아지트 배재 빌딩 앞 벤치로 갔다. 각자의 책을 꺼내 한 시간 남짓 읽고, 읽은 부분을 이야기하고, 흘러가는 구름을 정처 없이 바라봤다. 주일이면 가는 동네인데 마치 처음 방문한 데이트 코스였던 것처럼, 그 동네를 걷고 누리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었다. 일상 행복이 이런 건가 하며 오는 내내 그날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__

   화요일 밤, 잠들기 위해 불을 끄고 침대에 눕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자기야 우리 목도리 어딨 지?”


   불을 켰다. 그이는 그 길로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안을 확인하고 올라왔다. 내내 웃으며 즐겁게 보낸 그날, 우리는 쇼핑백 하나를 들고 다녔더랬다.  캐시미어 목도리 두 개와 내 이름이 적힌 메모지가 들어있는 쇼핑백. 10월 초 교회 바자회에서 새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였고, 현장의 지인에게 부탁해 두 개를 구입한 뒤 그날 오전에 전달받은 것이다.

   

   그이는 몇 해 전부터 하나의 목도리를 겨우내 두르고 다녔다. 더 이상 포근하기보다는 까칠까칠해져 따뜻하지 않은 목도리였다. 이제 그만 새 걸 사자 했지만, 차로 다니는 시간이 더 길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이는 사용하던 물건이 못 쓰게 되기 전에 새것을 들이지 않는 편이다. 아껴 쓴다기보다 험히 쓰지 않고, 오래 사용해 손에 익고 몸에 익는 걸 선호하고,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 않아 길게 가지고 있곤 한다.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나는 괜찮아.”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는 안 괜찮으므로, 겨울 목도리를 좋은 걸로 하나 사줘야지 하고 있었는데 사진으로만 보아도 맘에 쏙 드는 물건들이 바자회에 나온 것이다. 가격까지 착해서 내 것도 하나 샀다. 두 개의 목도리를 득템 했고, 겨울맞이 선물이 준비되었으며, 바자회에서 구매하기까지! 완벽했다. 목도리가 든 쇼핑백을 손에 들고 얼마나 맞춤 맞는 구매였는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뿌듯하고 기분이 좋은지, 이번 겨울에 우리가 누릴 포근함이 기대되는 마음까지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그이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


“응. 알겠어. 고맙게 할게. 내 선물이니까 쇼핑백은 내가 들을게.”


   쇼핑백을 그이가 들었다. 그날의 나들이가 그렇게 들뜨고 즐거웠던 건 아마 신난 시작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쇼핑백이 사라진 것이었다. 주차장에 다녀온 그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일단 자자며 진짜로 불을 껐다. 눈을 감고 누워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신기하기까지 했다. 행복했던 그날의 출발이 되었던 쇼핑백이 그날의 기억에서 까맣게 사라져 버렸다. 아니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흩어져 버린 건가.

   

   카페에 앉아 익명으로 존재하는 동안에도 옆 테이블의 사정을 파악하는 관찰 유전자를 타고났으며, 다이어리를 쓰는 습관 때문에 일상의 대부분을 기억하는 게 자연스럽고, 어지간한 기억들은 아직 쨍쨍해서 그때 있잖아, 하는 이야기들의 대부분을 따라가는 사람인데. 내가 말이다. 그런데 쇼핑백‘만’ 사라졌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고, 말 그대로 별 일이었다.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도 안 보였다. 어디일까, 어디에 두었을까, 그날 걸었던 길을 침대에 누워 걷고 또 걸었다. 다음날 아침에 카페로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 식탁에서 그이는 다른 것보다, 기억이 나지 않는 사실에 화가 난다 했다. 나처럼 밤새 그날을 걷고 또 걸었는 모양이다. 선물인데 잃어버려 미안하다고 했다.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우리는 쇼핑백을 고이 들고만 다녔지 목도리는 꺼내보지도 않았다. 실물의 색은 어떤지, 잘 어울리는지, 정말 부드러운지도 확인도 않은 상태였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이 안 나니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막막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받자마자 꺼내서 둘러보기라도 할걸.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교회에 맡겨두고 다녀올 걸 아니 차에 가져다 놓고 돌아다닐걸. 이럴 줄 알았으면 목도리 쇼핑에 얽힌 사연을 그리 신나게 이야기하지 말 걸. 이럴 줄 알았으면 너무 많이 좋아하지 말 걸.

   이럴 줄 몰랐다.


   물건을 잃어버리고, 그런 실수를 했다는 사실에 자책하고, 기억이 나지 않아 막막하기까지. 실로 오랜만이었다. 소란한 밤에 우리를 본 아이가, 아빠 엄마도 주의를 좀 들어야겠네, 했다. 그간 물건을 잃어버리고 들어와 들었던 온갖 잔소리를 그 한마디 담아 던지고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어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스스로 혼을 낸단다, 아이야. 밤 사이 그이도 나도 혼쭐이 났음이다. 다들 나가고, 오전에 시간이 비어 옷을 입고 갔던 길을 다시 가보기로 했다. 이미 사흘이나 지났지만,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목도리는, 쇼핑백은 없을 것이었다.

모르지 않았다. 심지어 전 날 가을을 부르는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헛걸음이 될 확률이 100에 가까웠다. 교회는 교인도 있지만, 외부인들도 많이 드나든다. 그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자꾸 피어났다.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며 카페 의자를 옮겨 앉았는데 그때 바닥에 두었다면 직원이 보았을지도, 교회 북카페 어딘가에 흘렀는지도, 내 이름을 아는 누군가 메모지를 보고 챙겼두었는지도, 공원 벤치에 덩그러니 남은 쇼핑백이 경비실에 맡겨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없어도 어쩔 수 없고, 그게 훨씬 당연하다고 소리 내어 말했다. 평소와 다른 곳에서 산책을 하는 것이라고 애써 가볍게 마음을 먹었다. 그날 우리는 정말 즐거웠으니, 그 길을 다시 걸으며 추억하리라 하며, 나는 집 밖으로 나섰다.  


   카페에는 최근 일주일 사이에 들어온 분실물이 없다고 했다. 그날 우리의 주문을 받은 안경 쓴 직원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믿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배재 빌딩 경비실에선 너무 오래되지 않았어요? 하고 되물으셨다. 식당은 이미 말끔히 청소가 되었고, 교회의 북카페나 분실물 함에 쇼핑백은 없었다. 덕수궁 분실물 사무실에다 (정문 초소) 내 연락처와 물건에 대한 메모를 남겨두는 중에도, 글쎄요 하는 말을 계속 들어야 했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집을 나설 때의 다짐을 잊고는, 본 적 있으신지 스친 적 있으신지 물으며 혹시?! 하는 기대가 생겼다. 성실한 기대였다. 매 번 아니요, 하는 대답을 들으면서, 번번이 아쉬워했다. 없을 게 뻔하다는 걸 알았는데도.

   되짚으며 걷는 동안에, 그 하루를 다시 걷는 동안에 쇼핑백에 대한 기억만 깜깜했다. 여기서 이 자세로 사진 찍었지, 커피는 라테를 마셨지, 여기 앉았을 때 누가 지나가는 걸 봤는데, 심지어 구름 모양이 그랬지 하는 생각들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쇼핑백에 대한 기억만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나 즐거움으로 가득 차버린 날은, 어떤 물건에 대한 기억이 들어설 틈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한다. 늘 말간 눈으로 기억이 안 나요, 하던 아이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부주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기억은 다른 기억에 밀려나는 것이었다. 혹은 너무 재미있게 보낸 어떤 하루에, 소소했던 일들은 웃고 즐기느라 미처 저장을 못하기도 그래서 그 자리가 깜깜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비가 온 뒤 추워진 때문인지 이틀 전만에도 반팔을 입고 정동길을 걷던 사람들이 목도리를 두른 채 걷고 있었다. 나만 목도리가 없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진첩을 열어 그날의 사진들을 다시 보았다. 여전히 활짝 웃고 있는 두 사람. 심지어 쇼핑백을 달랑달랑 들고 찍은 사진도 있다. 웃는 사진을 보니, 터덜터덜 걸으며 웃음이 났다. 이런 일이 일어났고,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꽤 괜찮았던 것이다. 잃어버린 물건이 목도리라, 차라리 비닐도 뜯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어차피 선물이 되려던 것이니 수신인이 달라졌다 생각하기로 했다. 지구상의 누군가는, 적어도 두 사람은 올 겨울을 포근하게 나게 될 테니.

 

   아쉬운 마음은 걸었던 길에 조금씩 흘리며 다 털고 지하철을 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잃어버린 목도리를 찾으러 갔던 곳을 다시 걸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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