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숲 한 그루 나무
저는 안개가 자욱한 숲 속, 한 그루 나무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꿈 속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그저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던 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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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를 만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저를 심은 것도 그가 아닙니다.
저는 언제나 여기 있었죠. 나무이기 때문에요.
나무가 움직이는 거 보셨어요?
네. 그래서 계속 여기 있었죠ㅋ
제가 태어난 날, 눈을 뜨니 어둠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몸은 묵직하고 시원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나는 그 안정적인 것들의 보살핌 아래,
마침내 따스한 햇살을 맞이하는 순간을 마주했습니다.
깊은 숲 속이었습니다. 모든게 좋았죠.
나는 숲의 온기와 냉기를 모두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많은 일들을 경험하며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자라나갔습니다.
동물, 식물들에게 내 살을 주기도 하고,
내 피를 주기도 하며
그들이 살아남고 자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는 나날들이 되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외로울 때는
그들이 먼저 나에게 다가와 함께 있어주기도 했죠.
저에게는 묘한 기분이 드는 순간들이었습니다.
나의 몸을 집으로 쓰는 친구들,
나에게 잠시 기대어 쉬어가는 친구들,
나에게 말을 거는 특이한 친구들 등.
정말 많은 친구들을 만나며 지냈습니다.
때로는 내 몸을 많이 아프게 만들던 놈들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네요.
지나고 보니, 그 상처들이
이제는 조금은 단단해진 지금의 제가.
될 수 있도록 해 준 경험들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다 좋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죠.
모든 걸 보고 있어도 손댈 수가 없었고
도와줄 수가 없었네요.
내 친구가 당하는 걸 보고 있어도
막아주지 못하고,
반대로 내 친구가 다른 약한 친구를 괴롭힐 때에도
친구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지 못 했네요.
나는 움직이지 못 하니까요.
그렇게 조금씩,
마음을 비워가는 연습도 하게 됩니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그렇게, 저는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네요.
움직일 수 없으니,
다가오는 이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요.
그들이 떠날 때,
나는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난 그저 언제나처럼,
여기에 있어야 하니까.'
떠나가는 이들의 뒷모습도 사랑하게 되었어요.
가만히 있던 나에게,
다가와 주었던 그들이니까요.
정말 사랑했던 존재에게도,
조금은 피하고 싶던 존재에게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볼 수 밖에 없던,
그런 나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선물해준 그들이니까요.
저는 여전히,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겠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저 참 많이 커졌네요.
많은 이들이 저에게 의지하고 있네요.
숱한 시간들을 고독히만 보내온 줄 알았는데,
온 몸으로 받아내고 또 사랑하며 살아오다 보니
이제는 다른 이들이 나에게 기대고, 나는 그들의 안식처가 되어 있네요.
"너희도 지금의 고통에 너무 사무치지 마!"
"언젠가 그것들이, 너희를 행복하게 해 주는
순간이 올 거야!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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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저를 바라던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가 저를 심은 것도 아니고,
그저 최근에 만난 남자이죠.
그 남자의 마음 속 한 켠에는 꿈이 있었답니다.
깊은 숲 속,
물 안개가 자욱한 호수가 있는 어느 한 집에서
자연과 어우러져 귀여운 동식물들과 평화롭고 따뜻하게 지내는 게 꿈이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집 앞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남자가 최근에 이쪽 땅을 구매해서 왔다고 합니다.
꿈을 좇는 중인가 보죠, 뭐
그래서 이번에도 저는 제 의지와 달리
그저 그를 "만남" 당했죠.
그런데
그 남자, 와서 물도 주고,
앉아도 있다 가고 하더라구요.
노래도 틀어놓고 시간도 보내다 가고 하는 걸 보니
나름 낭만도 있는 놈이겠거니 생각했네요.
유튜브도 보고 가네요
그런데,
매일 와주네요.
저를 많이 아껴주려고 하는 것 같네요.
어떤 인생을 살았을는가.
저를 이해해주는 듯한 기분을 주는 사람은
이 녀석이 처음이네요.
많은 말을 걸지도 않고,
한 번씩 기분 정도 물어봐 주고,
조용히 앉아 있다 가더라구요.
그래서 요즘 기분이 묘합니다.
괜찮은 녀석 같아요.
그래도 좀 더 지켜봐야죠.
어, 저기 오늘도 또 오네요.
(...괜찮은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