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넘어 발견한 좋은 것-겨울의 빨간 머리 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앤(Anne) 이 좋은 사소한 이유

by 보리똥

겨울의 정점인 1월, 하필 오늘 같은 날에 '빨간 머리 앤'이 읽고 싶은 건 뭐람?

영하 11도, 한파특보가 발효되었고, 창밖 어디에도 산책을 즐기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 겨울왕국이 돼버린 것만 같다. 나는 겨울왕국에서 춤을 추는 한 마리 나비가 되고 싶다.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한다한들 누가 뭐라는 사람 없으니 나는 지금 이대로의 삶이 좋다.

1월의 봄(?)이 찾아왔다. 사계절 중 봄이야말로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계절이 아닐까. 깡 마른 나뭇가지에 듬성듬성 연초록 잎사귀가 돋더니, 어느새 이름 모를 풀과 꽃으로 가득하다. 이때 날렵한 몸을 가진 삼색고양이가 나타나 꼬리를 연신 흔들며 풀벌레 사이로 걷는다. 고양이의 촉촉한 콧등에 가벼운 찬바람이 스친다. 하얀 털이 물결치듯 넘실거린다.


내가 알고 있는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은 고집불통에 상상력이 가득한 소녀이다.

앤은 보이는 것마다 아름다움을 찾아냈고, 둥그렇고 봉긋한 예쁜 원피스를 입고 싶어 했다. 하지만 만화 속에 비친 앤은 늘 회색빛의 단조로운 원피스만 입는다.


앤은 초라한 옷을 입고 있지만, 풍부한 상상력과 맑은 언어는 그 어떤 옷보다 화려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고 앤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음을 어루만진 언어 때문이었다.



만약 밤까지도 나오시지 않으시면 저 벚나무에 올라가 하룻밤을 보낼까 생각 중이었어요.
달빛 아래 하얗게 핀 벚꽃 속에서 잠들다니 얼마나 멋진 일이에요!


어릴 때부터 나는 걱정하고, 미리 포기하고, 좌절하는 아이였다.

남들 앞에서 내 이름 석자를 말하는 것도 두려워서 다리와 온몸이 후들거렸다. 가장 어려운 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따라오는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앤처럼 남의 시선 따위 생각하지 않고 내가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늘 생각과 말이 따로 놀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장벽이 크고 높게 느껴졌다.


초등학교 시절, 같은 동네에 사는 단짝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체구가 작고 날렵해서 달리기 시합 때마다 항상 1등만 하는 친구였다. 성격도 밝고 활달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 일이 하루 일과의 절반이었고, 하다못해 친구네 집에서 모든 끼니를 해결하고 왔다. 우린 학교에 가는 버스도 함께 탔고, 학교 당번도 함께였다.

당번은 학교에 제일 먼저 등교한 뒤 화장실 청소와 교실 청소를 했다. 그러니 당번이 되는 날에는 늘 첫 차(7시)를 타야 했다. 게으른 나와 다르게 친구는 무척 부지런했는데, 하필 그날따라 늦잠을 자버려서 첫 차를 타지 못했다. 친구는 나 없이 청소를 했고, 그 일이 있고부터 나와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고작 이런 일로 삐친다는 게 말이 돼?.'


우리 관계는 점점 더 어색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운 관계가 되었다.

네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더라면... 우리 관계는 나아졌을까.




앤은 자신이 초록지붕에서 함께 지낼 수 없다는 절망적인 말을 들었다.


절 원한 게 아니었군요!
사내아이가 아니라서 제가 싫은 거죠, 그렇죠?
지금까지 저를 맘에 들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이제 저는 어떻게 하면 좋죠?
눈물이 나올 것 같아요. 이런 절망적인 순간에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어요?




네가 함께하지 않아서 나는 늘 외톨이가 되어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다. 학교생활이 따분하고,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고 울먹이며 말하고 싶었다. 그저 앤처럼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더라면, 변함없는 벗이 되지 않았을까.


앤은 초록지붕을 떠나야 하는 날, 처음으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매료되었다.


나무는 모두 아름다워요.
정원도, 과수원도, 시냇물도, 숲도 저는 다 좋아해요. 보세요, 세상이 너무 아름답잖아요?
초록 지붕 집 근처에 시내가 있다니, 너무 기뻐요. 저는 실은...
아침엔 절망에 빠지지 않지요.




봄이 시작되는 1월, 나는 지금을 '추위 속 절망'으로 보지 않기로 했다.

1월은 다시 시작하기 가장 적당한 시기며, 늦었다고 말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착각이라고 했다.

1월은 네가 어떤 일을 시작하던 가능성을 응원하고 실제 해낼 수 있는 너를 칭찬했다.

앙상한 가지에 보송한 새잎이 돋아날 때 즈음, 나는 다시 빨간 머리 앤을 떠올리기로 했다.


하얀 벚꽃이 가득 핀 '환희의 길'을 걷는 자신이 보인다.

내 삶도 이제 곧 봄이다...







글밥 김선영 작가, 글벗들과 함께 1월-주 3회 글쓰기에 참여 중입니다.

매주 월, 수, 금요일에, 수요일은 제6화,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인 '고양이'로 찾아옵니다.

고양이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싶은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수요일 글을 목요일에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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