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엄마와 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똥 Jun 23. 2021

매향리에 시집 왔시유

엄마, 당신을 이야기합니다


내 나이 스물네 살 되던 해, 허름한 다방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다.

쌍꺼풀이 없어 날렵해 보이는  눈매였지만, 깔끔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나를 보자마자 입가에 미소를 띠는데 이 남자다 싶었다.  동네 아줌마가 중매를 섰는데 착실한 남자니까 꼭 잡으라며 엄마에게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사실 시골에 살면서 남자를 만나는 게 쉽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부모님 따라 이 밭, 저 밭 다니느라 바쁜데 남자가 웬 말. 게다가 동네에는 그렇고 그런 총각들 뿐이라 에 차는 남자도 없었다. 남자들도 나를 보며 같은 소릴 지껄이겠지. 동네에는 마음에 드는 여자 하나 없어 장가도 못 간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동네 총각들은 한 트럭 갖다 줘도 별 볼일 없.


내게 신체적인 흠이 있다면 한눈에도 보이는  왼쪽 엄지손가락이었다. 당시 부모님은 황소를 기르셨는데 들에서 풀을 뜯어다 여물을 만들었다. 여물은 소가 풀을 먹기 좋게 잘라 놓은 걸 말한다. 그날도 아버지가 잔뜩 뜯어 온 풀을 절단기에 넣어 칼질을 하는데 작게 자른다고 시도한 게 그만 엄지손가락 절반을 절단한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을 느꼈지만 병원이 멀어 응급처치가 어려웠다. 다 늘어난 내복 바지로 흐르는 피를 겨우 막았다.  시간이 흐른 후 잘린 손가락을 들고 두 시간이 넘는 읍내 병원을 걸어서 도착했다. 아픈 손가락보다 긴 시간을 걸어온 탓에 이미 체력은 바닥나 버렸다. 의사 선생님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손가락 상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 되겠어. 시간이 지나서 신경세포까지 손상됐네. 아이고! 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 그랬어."

"..."

엄마와 나는 치료받지 못한 잘린 손가락을 다시 들고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없으면 뭐 어때! 밥 먹는데 지장 없고, 일하는데 아무 문제없는데!"

엄마는 씩씩한 내 모습을 보며 씩 웃음을 보였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웃음의 의미는 '아프다'였을 것이다. 아프지만 딸에게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숨은 웃음. 엄마가 돼보니 엄마의 진짜 마음을  알겠더라.



당신과 만난 다방 이야기를 하다가 손가락 이야기가 길어졌다. 자! 그럼 다시 다방 맞선 이야기로 가보자.

나는 잘린 엄지손가락이 당신에게 창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당당하게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고 그 손으로 쌍화차를 마셨다. 물론 당신 시선이 손가락에 잠시 머물긴 했다.

하지만 남자가 바라보는 눈길은 손가락이 아닌 내 모습이었다. 동시에 낮고 차분한 음성이 귓가에 맴돌며 왠지 모르게  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다방에서 남자는 내게 큰 호감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물론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당신이 마지막에 했던 한마디다.

"쌍화차가 식기 전에 어서 다 드세요."

당신과 만남은 여기까지인가 싶었다. 이후 놀랍게도 중매쟁이를 통해 남자가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표정을 떠올리면 내게 큰 호감을 느낀 것 같지 않았는데 결혼이라니. 지긋지긋한 농사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결혼뿐이었다.


스물넷에 당신을 만났고, 스물넷 겨울에 당신과 혼인을 치렀다. 당시 동네 사람들 보는 앞에서 전통혼례를 치렀다. 사진사를 불러 빵빵 사진도 찍었고 당신과 전통주도 마셨다. 폐백을 하는데 시어머니라는 여자는,  빨갛고 커다란 대추를 던지며 "잘생긴 아들 하나 주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럴 것이 당신에게는 누나들만 네 명이나 있었고 당신이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혼례를 치를 때 사진 기사가 여러 번 사진을 찍었다. 식이 끝난 후 사진값을 지불했지만 끝내 사진을 받지 못했다.   짐작컨데 사진사는 작정을 하고 필름이 없는 빈 사진기를 들고 컷컷 열심히 외치다가 돈만 받고 튄 것 같다. 평생 하나뿐인 혼례 사진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놈의 사진사, 잡히기만 해 봐라!



당신에게는 큰 형이 있었다.  당시 군대 휴가를 나온 날이었다. 군대에서 잠을 못 자게 하나? 할 정도로 밥도 먹지 않고 온종일 잠만 잤더란다. 이틀, 삼 일이 되어도 깨어나지 않길래 급기야 밥 먹으라고 몸을 흔드니 형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형이 떠나는 걸 지켜보지 못했고 그마저도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됐다. 소문에 의하면 형은 동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잘생긴 외모로 늘 여자들에게 화제의 대상이었고 군 입대를 하기 전에도 고민이 많았단다. 나는 형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미 내가 시집오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쨌거나 형의 자살 동기는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젊은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선택했고, 자신의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불효자가 됐다.


시아버지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시어머니와 함께 한 집에서 살게 됐다.   사실 시어머니 집에 숟가락 하나 들고 들어간 건 나니까 결혼 후 시어머니가 나와 함께 살아준 셈이다. 시어머니는 동네 사람들과 대화하는 중에 "내가 며느리 데리고 사느라 힘들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두 번 이야기하면 모를까, 동네 사람들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하니 듣기 거북했다. 시어머니는 듣기 좋은 말보다 싫은 소리만 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친정에서 농사일하는 게 싫어 결혼을 선택한 건데 이곳은 내가 살던 곳보다 더 일이 많았다. 눈 만 뜨면 몸뻬 바지에 양말을 신고 밭에 나간다. 시어머니는 본인이 일을 하는 것보다 내게 지시하는 일이 더 많았다. 햇볕이 따가운 한 여름에도 고추밭 풀을 뽑으라 한다. 집에서 놀고 있는 시누이들에게는 밭일하라 시키지도 않는데 말이다. 풀 뽑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홀로 밭에서 일하는 건 심심했다. 친정에서 엄마와 함께 밭일할 때는 동네 이야기며, 아빠 욕하는 재미에 힘들어도 참을만했다. 몸이 힘든 것보다 엄마와 했던 추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이마에서 송골송골 맺힌 땀이 콧등을 지나 턱밑으로 흘렀다. 눈에서는 알 수 없는 눈물이 땀과 뒤범벅되었다.  밭일을 끝마친 후 해가 지는 저녁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당시 시누이들은 시집을 갔지만 밥때만 되면 우르르 집에 몰려왔다. 부엌에 가서 큰 솥에 잔뜩 밥을 했다. 된장을 풀어 된장국을 만들고, 방금 따온 고추를 씻어 그릇에 담았다. 시골 반찬이란 게 별거 있나. 들에서 뽑은 나물이나 고추가 큰 반찬이지. 뜸 들인 밥이 완성되어 기존 식구 수보다 많은 밥을 그릇에 담았다.

"반찬이 이게 뭐야? 엄마 어떻게 고기반찬 하나 없어? 먹을 게 하나도 없네."

"얘야, 다음에는 신경 좀 써라. 읍내 좀 나가서 장 좀 봐야지. 이걸 반찬이라고 내왔냐?"

먹고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남편 돈 관리까지 시어머니가 다하면서 반찬투정은 왜 나한테 하나?

그렇다. 시어머니는 남편이 벌어오는 수입도 본인이 모두 가지고 있어야 속 시원한 양반이었다. 보통 다른 시집온 여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자가 돈을 갖고 살림을 한단다. 근데 시어머니는 내가 시집오기 전처럼 본인이 다 쥐고 살아야 직성이 풀렸다. 나는 그깟 돈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주면 주는 거고 안 주면 말고!


오늘은 바다에 나가서 바지락을 잡았다. 펄 깊숙이 들어가 있는 바지락은 무작정 땅만 파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바지락에도 숨구멍이란 게 있는데 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동그란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을 찾아 호미질을 하면 어김없이 통통한 바지락이 나왔다. 처음에는 바지락 잡는 게 신기해서 재미있게 잡았다. 시간이 흘러 같은 자세로 구부리고 앉아 바지락을 잡는 일은 들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큰 체력을 요구했다. 허리는 누가 쑤시고 간 것처럼 천근만근이었고, 다리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아팠다. 시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 바지락 바구니가 네 개나 채워져야 오늘 일이 끝난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바지락을 하루 평균 대 여섯 시간은 잡아야 한다. 얼굴에 땀은 비 오듯 쏟아졌지만 겨우 두 바구니째다. 뜨거운 햇볕으로 인해 현기증이 났고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젠 바지락에 바자만 들어도 넌더리가 난다.


바지락은 매일 잡지는 않는다. 바지락을 잡을 수 있는 물때가 있기 때문이다. 밭일도 마찬가지다. 밭은 미군이 주도하는 사격 장안에 위치해 있는데 사격 중이라는 빨간 깃발이 내려져야 출입이 가능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피부가 하얗고 노란 머리 외국인을 시집와서 보았다. 밭일을 하는 내 모습을 보며 뭐라 씨부렁씨부렁 되던데, 밝은 표정을 보니 나쁜 말 같아 보이진 않았다. 아마도 늦게까지 밭일을 하니까 이제 시간이 됐으니 집에 가라고 했을 것이다. 콩글리쉬란게 별게 있나. 입을 오므린 채로 고! 고! 하는데 어서 가라는 말이지 뭐.


마을은 조용한 날이 없었다. 내가 밭일이나 바다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하늘 어디선가 우웅! 콰앙! 큰 소리가 한참이나 들려왔다.  방에 누워있는데 어김없이  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 방에 있던 창문이 와장창 깨졌다. 방 벽에는 ! 금이 갔다.


보통 바닷가 한가운데에 있는 '농'이라는 곳에 폭탄을 떨어트리며 훈련을 하는데, 이날은 폭탄 조준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만약 폭탄이 마을을 향해 떨어졌다면, 사람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날의 여파는 마을에 퍼졌고, 우리 집뿐만 아니라 다른 집들도 벽에 금이 가고 그런 난리가 없었다. 나는 다행히 안방에 쏟아진 유리 파편 몇 미터 앞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만일 조금만 더 창문 가까이에 있었더라면 온몸은 유리 파편으로 구멍이 났을 것이다.

이곳은 정말 매일매일이 전쟁터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식혜 좋아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