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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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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똥 Oct 24. 2021

엄마와 코! 리** 립스틱

엄마, 잘못했어요.

엄마 화장대에는 형형색색 신기하게 생긴 화장품들이 많다. 분명 얼굴 어딘가에 바르는 것인데, 정확한 용도를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화장품 광고를 유심히 봐도 사용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단지 예쁘게 생긴 광고 모델 얼굴만 내세워  에 로션을 찍어 바르고는 코! 리** 노래만 렀다.


평소 엄마는 모델처럼 화려하게 화장하는 편은 아니었다.  얼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다. 다른 부위보다 가장 공을 들이는 곳은 입술이었는데,  입술 화장을 할 때마다 가장 작고 얇은 붓으로 창백한 입술을 붉게 물들였다.  어릴 적 나는 색칠공부를 좋아했는데 작은 그림에는 정교하게 색을 입혀야 하는 것처럼 입술도 정교한 작업이 필요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부모님이 외출을 하신 날이다. 사실 엄마가 외출하는 날은 손에 꼽힐 정도다.

동생과 나는 엄마가 나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장 화장대 앞에 앉았다. 내가 제일 먼저 꺼내 든 건 엄마의 파운데이션. 그 시절에는 파운데이션이라는 게 생소했지만, 엄마의 뽀얀 얼굴은 파운데이션이 요술을 부렸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화장대에 앉자마자  주저 없이 파운데이션을 발랐다. 엄마는 시골에서 논일, 밭일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늘 햇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였다. 엄마도 검은 피부가 싫었는지 파운데이션으로 도자기 피부처럼 뽀얗게  바르곤 했다. 그래엄마의 목과 얼굴은 흑과 백이 존재했다.

나는 엄마 얼굴을 떠올리며 파운데이션을 얼굴에 곱게 펴 발랐다. 이후 동생 눈에는 파란색 아이섀도를 나는 붉은색을 발랐다. 그다음은 입술. 엄마가 가지고 있는 립스틱은 진한 핑크색과 자두를 닮은 빨간색 두 가지였다. 내 입술에는 빨간색을 바르고, 동생에게 핑크색 립스틱을 발라주었다. 동생 입술에 바르는 걸 마무리하던 찰나 아뿔싸! 립스틱 절반이 댕강 부러져버렸다. 무리하게 립스틱을 길게 뺀 후  손목에 힘을 준 참사다. 예상하지 않았던 결과에 부러진 립스틱을 원래 박혀있는 자리에 간신히 쑤셔 넣었다.

 겨우 넣긴 했는데 돌려도 다시 나오지 않는 립스틱. 이미 손가락은 울긋불긋 빨간색으로 잔뜩  었다.

조금 있으면 엄마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다. 화려하게 화장품을 펴 바른 얼굴에 부러진 립스틱을 엄마가 본다면 우리는 제대로 야단맞을 게 뻔했다. 하는 수없이 립스틱 뚜껑을 닫아놓을 수밖에 없다. 뚜껑을 닫아 놓기만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은 다가오는데 얼굴과 손을 지우는 게 문제였다. 얼른 동생과 나는 수돗가로 달려가 물로 씻어 내려했지만 얼굴매 끌 거리기만 할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비누 거품을 내어 여기저기 빡빡 문질렀더니 칠한 색깔이 겨우 없어졌다.  일을 마친 엄마가 돌아왔다. 우리는 태연한 척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빨간 머리 앤 오프닝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빨간 립스틱을 발랐을 것이다. 엄마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립스틱은 빨간색이었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부러진 립스틱을 사용했어도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립스틱 부러진 걸 모르나?'

 혼내봤자 소용없는 일,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을 엄마. 때론 알고 있어도 모르는 척하고 눈 감아야 할 일들이 많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엄마. 젊은 시절 탱탱했던 피부는 온데간데없이 주름진 얼굴뿐이다. 하지만 변함없이 빨간색 립스틱이 가장 잘 어울리는 엄마.


오늘은 엄마에게 예쁜 색 립스틱을 하나 사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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