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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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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똥 Oct 24. 2021

아빠가 가수 김종환을 좋아한 이유

엄마는 무작정 기다렸다

'몇 번의 가을이 지나고' 또다시 가을이 찾아왔다. 아빠는 정말 그녀를 잊은 걸까? 엄마는 잘 알고 있었다. 아빠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부모님은 음악을 듣는 취향이 같다. 보통 기분이 좋거나 나쁘거나 한결같이 트로트 삼매경에 빠지시는 분들이다.

둘째 언니가 스물셋이란 나이에 결혼을 했다. 다 큰 딸이지만 부모님은 일찌감치 시집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고 언니는 결국 이듬해 봄 결혼을 했다.

부모님은 결혼식이 끝난 후 집에 돌아와서는 동네 떠나갈 만큼 큰 소리로 노래를 틀었다. 트로트는 뽕짝 뽕짝 신나게 울려 퍼지는데 부모님 얼굴은 들리는 음악처럼 신나 보이질 않았다. 얼굴에는 근심과 아쉬움이 한가득 서려있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철부지였던 나는 시끄럽게 들리는 노래 때문에 귀는 따갑고 가슴은 벌렁대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트로를 즐겨 듣던 아빠의 음악 취향이 바뀐 날은 가을이 막바지에 이를 때였다.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시내에 다녀온 아빠는 낯선 카세트테이프를 가져오셨다. 감싸 져 있는 비닐을 주섬주섬 벗겨내고 오디오 전원을 켰다. 부드럽게 시작되는 반주 소리가 그동안 들었던 노래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따라라, 따라 라라.... 이후 한 남성이 여성을 향한 사랑 가득한 마음을 담은 애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우리 둘은 변하지 않아  

김종환 사랑을 위하여


아빠는 노래 테이프가 구간반복을 해도  하염없이 멍한 표정이었다. 엄마는 아빠 모습이 낯설었다. 소파에 앉아 평소 듣지 않던 노래를 들으며,  마치 짝사랑에 빠져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노래를 듣다가 이내 안방으로 들어가는 아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싶더니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거실 밖으로 나온다.

"김종환? 당신이 이런 노래 듣는 거 처음 봤구먼?"

" 요즘 유행하는 노래라고 해서 들어보는 거지. 매일 같은 음식만 먹으면 질리는 거야."

엄마는 안 되겠다 싶어 아빠가 잠자는 틈을 타서 휴대폰 발 수신 내역을 확인다. 역시 낯선 번호가 찍혀있었고, 전화를 해보니 예상했던 대로 여자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말씀을 하세요. 왜 말씀이 없으세요?"

그날 이후 엄마는 아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여인이 아빠가 만나는 사람이 맞는지 궁금해서 미칠 노릇이었지만 엄마는 아빠에게 더 이상 묻지 말라고 했다. 


며칠 후 방안에  있던 편지지가 통째로 없어진 사건이 생겼다. 을 낙엽 모양 편지지를 사뒀는데 항상 책상 앞에 있던 게 감쪽같이 사라진 거다.  집에서  도난 사건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언니나 동생에게 편지지를 가져갔는지 물어봐도 본인들은 아니라고 발뺌했다. 하긴 언니, 동생은 편지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의심 후보에서 당연히 제외됐지만 말이다.

두 번째 의심 후보는 아빠다. 물론 엄마는 편지 같은 걸 쓰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아빠뿐이다. 요즘 부쩍 이상해진 아빠를 보니 가장 유력한 후보인 셈이다.

"아빠! 혹시 내 책상 위에 있던 편지지 못 봤어? 다들 아니라고 해서. 혹시 아빠?"

"허허. 내가 무슨 편지지... 네 동생이 갖고 갔나 보지."

아빠의 소행인 걸 알겠지만 물증이 없으니 범인을 잡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의 사랑을 위하여 노래는 몇 달 동안 온 거실에 울려 퍼졌고, 하도 반복해서 앨범을 들었더니 다음 노래가 무엇이 나올지 알게 될 정도였다.

노래는 아픈 마음을 치유할 때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그립게 하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움은 더욱더 클 수밖에. 엄마는 그런 아빠 마음을 헤아리듯,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아는 듯 무작정 기다려주었다.

가을이 지나 추운 겨울이 찾아왔고, 하얀 눈이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한 날이었다.  눈도 내리겠다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들으며 한껏 폼을 잡고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거실에서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뽕짝 뽕짝" 소파에 앉아 흐뭇한 표정으로 트로트를 듣고 계시는 부모님. 엄마는 아빠가 결국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래! 아빠는 역시 뽕짝이 어울리지!"

트로트를 함께 듣는 부모님을 보니 그제야 안심이 됐다. 하지만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아있었다.

"근데, 아빠, 그때 그 편지지 아빠가 가져갔어?"

"고마해라 좀!!"

성질을 내던 아빠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역시 그날의 편지지 사건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의혹만 남긴 채 세월 속에 묻혀갔다.

가수 김종환만이 아빠의 진실을 알 것이라 믿으며.

그렇게 몇 번의 가을이 지나고 또다시 가을이 찾아왔다.

오늘은 짙은 가을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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