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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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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똥 Oct 24. 2021

장날 순대 맛은 아는 사람만 아는 진실

엄마! 순대 없으면 못 산다고요!

"어제 일은 정말 미안해."

엄마는 화가 났다. 엄마에게 장바구니에 원하는 걸 사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짜증을 냈기 때문.

시골은 4일에 한 번씩 장을 섰다. 엄마는 장을 보러 나가기 위해 머리를 감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마을에는 한 시간마다 한 대씩 버스가 들어오는데 장을 보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오는 주민들이 많았다. 

"엄마! 아까 말했던 순대랑 찐 옥수수 꼭 사 와?"

"아이고! 알았다 알았어! 벌써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네. 사 올 테니까 그만 좀 얘기해라. 귀에 딱지 안겠다."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버스를 타기 위해 달려 나갔다. 엄마가 좋아하는  버스 앞 좌석에 앉아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만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는 엄마 모습을 바라보며 버스는 마을을 빠져나갔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순대와 옥수수를 좋아한다. 장날마다 찾아오는 순대 할머니가 있는데, 순대를 자르는 할머니의 칼 솜씨는 단연 예술이었다. 할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 한 줄을 꺼내어 뜨거운 줄도 모른 채 착착착 먹기 좋게 잘랐다. 칼이 순대 꼬랑지에 닿을 때면 플라스틱 하얀 접시에 순대를 차곡차곡 담았다. 마치 제빵사가 정성스럽게 만든 케이크에 과일 데코를 올리듯, 할머니는 순대를 담는 마지막에는 케이크 데코처럼 순대 꼬랑지를 세워 올렸다. 어릴 적 케이크보다 순대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것도 모두 순대 할머니 덕분이었다.

알다시피 순대 맛의 하이라이트는 꽃소금에 뿌려진 고춧가루다. 보통 하얀색 소금보다 빨간색 소금이 칼칼하니 맛있던 이유도 이것이다. 뜨거운 순대를 빨간 소금에 찍어 입에 넣는 기쁨이란, 더 이상 말로는 소용없다. 할머니표 순대를 먹어봐야 느낄 수 있다.

순대를 먹을 생각에 잔뜩 기대를 품고 있던 찰나 마을버스가 들어왔고 엄마는 두 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왔다. 얼른 엄마에게 달려가 장바구니 한 개를 들고 들어왔다. 실은 엄마 짐이 무거워 보여 들어주려 했던 게 아니라 장바구니 안에 들어있을 순대와 옥수수 존재가 더 궁금했던 것이다.

자반고등어, 오징어, 오이, 사과, 멸치, 엥? 전부 반찬거리뿐이다.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까만 봉지를 다시 뒤적였다. 아니, 뒤적이다 못해 하나씩 풀어헤쳤다. 봉지에 담겨있어야 할 순대와 옥수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들쳐보기도 전에 따뜻한 온기가 있어야 할 봉투는 단 하나도 없었다. 분명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다.

"엄마! 엄마! 왜 순대랑 옥수수가 없어? 혹시 버스에 놓고 내린 거 아냐?"

"사 오려고 했는데, 순대 할머니랑 옥수수 아줌마가 장날 안 나왔더라. 쉬는 날인가 봐. 그 사람도 사람인데 쉬어야지. 사과나 까먹어라."

나는 사과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순대가 먹고 싶은 거였는데, 엄마는 내 마음을 너무 몰라도 모른다,

"순대 먹을 생각에 점심도 안 먹었는데, 그럼 다른 데 가서라도 사 오지. 아 진짜!!!"

"짐이 많아서 돌아다닐 수가 있어야지. 사람은 많고 버스 시간은 다가오고... "

"나 오늘 밥 안 먹어! 흥!"

 엄마에게 화가 나서 그날 저녁은 단식투쟁 중이었다. 얼마나 순대를 기다렸고 먹고 싶어 했는지 내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는 엄마가 그토록 원망스러웠다. 저녁이 다가와 어두컴컴해도 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다. '누군가는 저녁밥 먹으라고 찾아오겠지. 설마...'

부엌에서는 식구들 밥 먹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누구 하나 먹으라고 챙기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뱃속에서는 '꼬르륵 파티'가 열렸고, 점심부터 밥을 먹지 않은 나는 배가 고프다 못해 속까지 쓰려오기까지 했다.

하는 수없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식구들이 잠을 자러 들어간 시간에 고양이처럼 부엌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냄비에는 엄마가 장을 봐왔던 자반 고등이 찜과 프라이팬에는 꽈리고추를 넣은 멸치볶음이 있었다. 군침이 돌아 침을 꿀꺽 삼 겼다.

'지금 밥을 먹지 않으면 평생 그 맛있는 순대도 먹어보지 못하고 죽을지도 몰라.'

나는 순대를 위해 살아야 했으니 먹어야만 했다.


이튿날, 엄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부엌에서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엄마, 어제 일은 정말 미안해. 엄마가 순대랑 옥수수를 사 오지 않아서 화가 나서 밥을 안 먹으려고 했는데,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었지 뭐야. 순대를 먹어야 하니 죽으면 안 되잖아. 남은 반찬 내가 다 먹었어."

"너 덕분에 아침에 먹을 반찬이 없으니 오이에 된장 찍어 먹어야지 뭐. 다음 장날에는 같이 장 보러 가자.

엄마가 순대 오천 원어치 사준다."

엄마 덕분에 찾아오는 장날에는 뜨끈한 할머니표 순대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강원도 찰옥수수는 덤으로 따라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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