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일, 어쩌면 그것이 우리 삶에서 절대 도려낼 수 없는 가장 뿌리 깊고 본질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것이 아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 모든 것이 함께 먹고살려는 단순한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빵을 몇 개 훔쳐 가슴에 품고 달아난 자도 결국 식솔과 함께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가장 원초적인 스타팅 블록에 발을 디디고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우리 집은 딸만 넷이다. 어릴 적 엄마는 시골일, 아빠는 동네일을 하느라 바쁘셨다.
덕분에 셋째였던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다. 나는 언니들의 돌봄에 자랐고, 언니는 한창 동네 친구들과 뛰놀 나이에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언니들은 동생들을 돌볼 때마다 투 털투덜, 투덜이 스머프 같았다.
"너와 막내 때문에 내가 좋아한 쥐불놀이도 하지 못했고, 가을이면 밤도 따러 못 갔어.
겨울에는 어땠게. 무덤에서 비료포대 타고 놀아야 할 때 쟤네 똥 기저귀 가느라 꼼짝도 못 했지 뭐야"
언니 말을 가만히 듣던 둘째 언니가 발끈했다.
"언니가 똥 기저귀를 얼마나 갈았다고! 나는 추운 겨울날 노란 똥이 담긴 기저귀를 찬물에 빨래를 하는데, 으~ 엄마는 그 흔한 고무장갑도 하나 안사고 손이 얼음장이 돼도 신경 안 썼단 말이야. 언니가 겨울에 기저귀 빨래 안 해봤으면 말도 하지 마."
언니들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어릴 적 나와 동생 이야기를 꺼내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서로 자신이 더 힘들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누구 말이 진실인지, 누가 더 우리를 위해 희생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당시 억울했던 언니들 마음을 떠올리면 그럴 만도 했겠다. 어린 나이에 친구들과 놀고 싶고, 추운 날 빨래하기 싫은 건 내가 언니였더라도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이었을 거다.
엄마는 딸 넷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사일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농사가 변변치 않을 때는 근처 대기업 생산직에 들어가 부품 조립까지 하셨다. 주야를 병행해서 일을 하셨는데, 엄마가 야간 일을 할 때가 가장 좋았다. 야간에 들어갔다가 퇴근한 엄마 가방에는 맛있는 빵들이 가득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회사 간식시간마다 빵과 우유가 나오는데, 안 먹는 사람들 빵을 몰래 가방에 챙겨 오셨다. 특히 가장 맛있던 빵은 페이스트리였는데, 전자레인지에 15초 살짝 돌리면, 야들야들 부드러운 빵이 완성됐다. 페이스트리는 끝부분보다 중앙이 가장 맛있었다. 회오리치는 페이스트리를 가장자리부터 돌돌 돌 벗겨 먹으면 중앙은 더욱 달콤하고 살살 녹는 맛이었다.
나는 엄마가 회사일을 좀 더 오래 했으면 했다. 하지만 아빠가 목 디스크 수술을 한 이후부터 엄마의 회사 생활은 막을 내렸다. 좋아하던 페이스트리 빵을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난날을 떠올리면 엄마는 하루라도 쉬는 날이 없었다. 시간이 좀 있다 싶으면 농사일, 바다 일을 하셨고, 그것도 어려울 땐 회사까지 다닌 걸 보니 엄마의 희생은 끝이 없었다.
어른이 되니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부모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하지 않으면 좋은 집에서 살 수 없고, 맛있는 것도 사 먹기가 어렵다. 또 좋은 곳에 갈 수도 없고, 아이들에게 멋진 장난감도 사줄 수 없게 된다.
뭐든 특별한 동기가 있으면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 부모란 직업이 아닐까?
나는 절대 엄마처럼 못 살 거라 생각했는데, 엄마가 돼보니 엄마처럼 살지 않으면 안 됐다.
나 자신보다는 아이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는 부모란 이름.
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남편은 아이들 사진만 보면 그렇게 안타깝고 슬픈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봤다.
"너희들을 위해 좋은 집으로 이사 가려했고, 너희들을 위해 아파도 참고 일했는데 우린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