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첫 날밤의 추억

여러분! 아내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by 보리똥


"국내도 가보지 않은 곳이 많은데 굳이 신혼여행을 해외로 떠날 필요가 있을까?"


결혼 전 그와 자주 나눴던 대화였다. 당시 해외여행은 사치라 생각했다. 가도 되고 안 가도 그만인 곳. 친척들은 그래도 단 한 번뿐인 신혼여행은 해외로 떠나야 한다며 서로 돈을 모아 태국행 비행기를 예약해주었다. 사실 살면서 학창 시절 제주도를 가본 것을 제외하고 비행기를 단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다. 억지로 등 떠밀린 듯 '안 가도 되는데'를 남발했던 우리 부부. 그래도 신혼여행을 떠난다니 내심 기분은 좋았다.


피곤한 결혼식이 끝난 후, 준비해놓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한국은 4월 초면 꽃샘추위에 꽤 쌀쌀한 날씨였다. 한국 날씨만 생각하고 긴 바지와 티셔츠만 준비한 우리는 다른 여행객들과는 다른 옷차림이었다. 짧은 옷을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태국 도착 후 후덥지근한 날씨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원하게 민소매 나시만 걸친 외국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답답한 차림새였다.

숙소에 도착하니 우리 모습과는 다르게 모든 게 깔끔하고 정갈했다. 테이블에는 열대과일 바구니와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신혼 첫 날밤이었다. 분위기 없는 남편이지만 이날만큼은 어떤 말을 해도 분위기에 취할 날이었다. 촌스럽게도 신혼 첫날밤에 망고란 과일을 처음 먹어보았다. 생긴 건 노르스름 맛있게 생겼는데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사과처럼 대충 껍질을 까고 속을 발라내니 기대했던 것보다 먹을 수 있는 양이 작았다. 하지만 달달한 맛은 여느 과일 비 할 데 없이 당도가 높았다. 단지 우리나라 사과나 배처럼 배 터지게 먹을 수 없다는 게 흠이지만 말이다. 도착하자마자 망고와 씨름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미소를 지었다. 시간, 장소 불문하고 먹는 걸 좋아하는 나를 보며 터져 나오는 미소였다. 온종일 먹는 걸 입에 달고 있었지만 젊은 시절 나는 꽤 날씬한 몸매였다. 먹는 양에 비해 살이 안 찐다는 말을 평생 듣고 살았다고 하면 믿지 못할 것이다. 비록 지금은 먹는 대로 살이 된다는 말을 듣고 살지만 말이다. :)

남편은 밤도 늦었으니 샤워를 하자고 했다. 샤워장은 두 종류였다. 화장실 안에 있는 월풀 욕조와 울타리가 있는 야외샤워장이었다. 대나무로 만든 울타리라 작정하고 본다면, 원 없이 보일 수 있는 높이었다. 대단지 리조트라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야외 샤워장에서 씻자는 남편. 수도꼭지를 비틀자 샤워기 물이 슈 욱하고 뿜어져 나왔다. 너무 차갑거나 뜨겁지 않은, 적당히 미지근한 물은 나의 몸을 감쌌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은 촘촘하고 일정하게 수를 놓고 있었다. 태국의 밤공기가 좋았다. 풀벌레는 여기저기에서 노래를 불렀고 남편도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튿날은 태국의 설날이자 '송끄란 물축제'가 열린 날이었다. 준비성이 약한 우리는 태국의 명절 인지도 모른 채 시내에 나가자마자 봉변을 당했다. 장난꾸러기 태국인들은 귀여운 물총도 있는데, 물을 가득 담은 양동이를 내 머리에 대놓고 쏟아부었다. 장난이라 하기에는 정도가 지나쳤지만, 태국 언어를 모르니 화가 난다는 표현도 할 수 없었다. 시내에 나간다고 나름 신경 써서 얼굴 화장도 했는데 물 한 바가지에 모든 정성이 지워져 버렸다. 기껏 바른 마스카라는 판다처럼 우스꽝스럽게 변해있었다. 더 난감한 상황은 물장난 가득한 태국인들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려고 할 때면 어김없이 물총 공격이 날아왔다. 눈도 뜰 수없는 처참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결국 남편은 내 손을 꼭 잡으라며 있는 힘껏 시내를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을 쳤다. 으랏차라 100 m 전력질주다!


우리는 겨우 택시를 잡아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 순간 오토바이를 타고 택시를 따라오는 현지인. 순간 지금까지 보았던 물총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물총이 택시 창문을 통과해 얼굴을 관통했다. 푸합~ 숨쉬기 힘들 정도로 거침없는 물세례였다. 태국인들은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재밌다는 듯 쌩하고 지나쳤다.


끊이지 않는 물총을 맞은 우리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고단한 몸을 씻었다. 누가 지켜볼 수도 있을 거라는 걱정은 첫날밤의 사치일 뿐이었다. 젖은 옷과 얼굴을 깨끗하게 닦는 게 우선이었다. 온기 가득한 샤워기 물은 물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고,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 주었다.

샤워를 끝낸 후 가져온 향수를 손목에 뿌렸다.


"아휴! 여기 방향제 너무 세게 뿌리는 거 아니야? 냄새가 코를 찌르네!"


'이 냄새는 방향제가 아니라 내가 뿌린 향수 냄새라고! 이 양반아!' 라. 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꾹 참았다. 오늘은 신혼여행 두 번째 밤이니까!


우리의 첫날밤은 그렇게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저물어 갔고, 어느새 해가 중천인 아침을 맞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햇살이 싱그러웠다. 이내 눈이 부시다며 손바닥으로 햇살을 가리는 남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결혼 후 첫 날밤. 남들처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지만, 떠올려보면 재미있는 기억들뿐이다.


무뚝뚝한 남편과 함께 한 시간들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오늘. 인생에 신혼은 단 한 번 뿐이지만, 시간이 흘러도 사랑하는 만큼은 변함이 없다.

"우리 오늘 밤도 신혼 첫날밤 분위기 좀 내볼까? 으흐흐"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군대 간 남친 기다리는 말랑말랑 고무신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