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사이즈 갈색 장미꽃 티셔츠

빛바랜 장미꽃 이야기

by 보리똥

오전 10시, 옷가게에 도착했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은 쇼윈도 유리창과 만나 눈이 부셨다.

햇살에 눈살이 찌푸려질 즈음 옷가게 문을 열었다. 적어도 30년 이상은 돼 보이는 출입문은 요란하게 끼익 소리를 냈다. 가게문을 열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오래된 건물 냄새다. 이 냄새는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주인이 없는 사이 가득 채워졌다가 가게로 돌아오면 서서히 사라진다. 비에 젖어 눅눅해진 나무 냄새와 흡사하기도 한데 비 내리는 날이면 코를 찌를 정도로 심하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들이 냄새를 잔뜩 흡수해버렸다. 환기가 필요하다. 문을 열고, 원두커피를 내린다. 알 수 없는 냄새가 원두커피 향에 조금씩 잊혀 갔다.


단발머리, 낮은 단화, 메이크업을 하지 않아 화장품 향기를 단 한 번도 풍기지 않던 그녀가 아침 일찍 가게를 찾았다. 그녀는 105 사이즈 옷을 입고, 캐주얼 복장을 좋아했다. 남자처럼 굵은 목소리였지만, 심성만은 누구보다 고운 천생 여자였다. 매주마다 신상이 입고되면 지나가다 말고 차 한잔 하러 왔다며 가게를 들르던 그녀였다. 춥거나 덥거나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던 피부는 한결같이 홍조를 띠고 있었다. 붉그레, 밝그레 물드는 얼굴처럼 그녀는 아기같이 여린 성격이었다.

"내게 맞는 옷 좀 가져왔어?"

그녀는 항상 예쁜 옷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옷이 있는지 먼저 물었다. 갈색을 좋아했던 그녀는 몸에 꽉 끼지 않아 차르르 흘러내리는 티셔츠를 좋아했다. 갈색 티셔츠에는 한 송이 어두운 색깔의 장미꽃이 그려져 있었다. 장미가 새빨간색이었다면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빛바랜 듯하지만 장미 본연의 자줏빛 색이 살아있는 티셔츠였다.


"난 꽃 중에서 장미가 가장 좋더라. 처음 남편에게 장미꽃 선물을 받던 기억이 떠올라. 내가 장미를 좋아하는 걸 알고 빨간색 장미를 사줬어. 장미를 좋아하지만 안개꽃이 섞여있으면 난잡해 보여서 장미꽃만 있는 걸 좋아하거든. 장미가 어떨 때는 향이 짙다가, 또 어떤 때는 아무 냄새가 없을 때도 있어. 그럴 때는 그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는 순간이었을까."


그녀는 처음 결혼했던 남자와 이혼을 했고, 지금의 남자를 만나 전라도에서 이곳까지 이사를 왔다. 그녀의 직업은 포도농사를 짓고 있었다. 드디어 올해 새로 집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집 앞에는 나무와 장미꽃을 많이 심어 놓을 거라 했다. 그랬던 그녀가 갑자기 지갑을 열며 무언가를 꺼냈다.

"나 젊을 적 사진인데, 이때는 정말 날씬했지? 그때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고 몇 년 후부터 살이 찌기 시작했어. 살찌는 건 멈출 줄 몰랐고, 나는 또 둘째 아이를 출산했지. 그때부터였나 봐.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어느 날부터 집에 들어오질 않았어."


사진 속 여자는 분명 그녀가 맞다. 발갛게 홍조 띤 얼굴, 갈색 반팔 티셔츠, 검정 바지에 단화를 신고 있는 그녀 모습은 지금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젊은 시절 취향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던 그녀였다. 그때와 다른 거라곤 뚱뚱해진 체형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듯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기억이란 놈은 소중하거나 잊고 싶은 것까지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어서 자신을 괴롭게 하고 아프게 한다. 그녀가 그렇다. 뚱보가 돼버린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만난 남자를 잊고 싶지만 지금까지도 그를 잊을 수 없는 건 기억이란 작자의 횡포였다. 변하지 않는 건 여전히 남편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동대문 시장에서 새로 사왔지만, 입고 있는 옷과 비슷한 듯 달라 보이는 갈색 티셔츠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마음에 든다며 흔쾌히 구매를 했다. 티셔츠에는 빛바랜 듯 작은 장미 봉우리가 그려져 있었다. 활짝 피어있는 장미는 시들 날을 기다리지만, 봉우리는 조금 더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녀를 지켜주길 바랐다. 그런 마음을 그녀는 눈치챘을까?

"장미가 참 예쁘네. 내가 좋아하는 장미 봉우리야."


나는 시장에 나가면 그녀를 위한 갈색에 장미꽃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찾는다. 생각보다 찾기 어려운 스타일이라 도매시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그러다가 그녀를 위한 옷을 발견하면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기쁘다.

누군가를 위해 옷을 사고, 그녀가 나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옷가게 사장이 된 걸 다행이라 생각한다.

비록 몇 푼 안 되는 돈을 벌고 있지만, 그녀를 생각하면 행복하다.


시장에 다녀와서 가게에 출근하자마자 스팀다리미를 가동해 비닐봉지에 담은 구겨진 옷들을 촥촥 다림질을 한다. 주름진 옷이 활짝 펴질 때, 내 마음에도 할짝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가 가져갈 빛바랜 장미꽃도 습기를 머금어 더욱 선명해졌다. 작았던 봉우리가 그새 절반쯤 피어난 것 같았다. 장미꽃을 보고 감격할 그녀를 떠올린다. 오늘은 그녀와 어떤 이야기를 할까. 꿉꿉한 가게 냄새가 빠져나가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다. 그녀의 차분한 발자국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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