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버스는 감성에 빠지기 딱 좋다.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었다.
버스에 타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불필요한 바람이라도 스칠까 봐 내 얼굴만 불어올 만큼의 창문을 열었다.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났다. 밭을 지나면 고소한 깨 냄새, 고추가 무르익어가는 매콤한 냄새, 하얀 종이에 쌓여있는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에서 산뜻한 포도향이 났다. 버스는 포도밭을 지나 노랗게 물든 논을 지났다. 사람이 없는 논이지만, 사람처럼 생긴 허수아비가 두 팔을 벌려 훠이훠이 참새들을 쫓는 춤을 추었다. 요즘 참새는 허수아비를 보고 놀라기보다는 허수아비가 추는 장단에 맞춰 쌀을 훔쳐 먹는다. 몇 알을 뱃속에 채웠는지 모를 참새는 배가 볼록해서 터질 것 같았다. 짹짹짹 노랫소리가 거칠어질 때 즈음 참새는 논을 떠나 더 멀리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 없는 그곳, 참새가 정처 없이 가서 머무는 곳이 참새의 고향이다.
정류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늘 버스 중간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황급히 일어나 벨을 눌렀다.
버스는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정차했고, 카드를 찍고 턱턱 버스 계단을 내려왔다.
내가 운영하는 옷가게는 이른 아침이면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볼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기 무섭게 앞문에서는 고무신을 신은 할머니가 자신 체구보다 더 큰 짐보따리를 들고 버스에 힘겹게 올라타고 있었다.
옷가게에 가기 전 빵가게에 들렀다. 담백한 곰보빵이나 바게트를 좋아하는 나는 통통한 바게트를 하나 골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구수한 누룽지처럼 빵 굽는 냄새가 좋았다. 가을이 무르익는 만큼 빵도 계절처럼 노랗게 잘 익었다. 빵을 들고 가게로 터벅터벅 향했다. 길을 걸으며 상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아직은 개발이 되지 않아서 노후된 건물이 많은 시장이었다. 인테리어도 없이 장사하는 화장품 가게, 밤새도록 술 손님 가득했던 고깃집, 아침 손님을 기다리는 순대국밥집, 겨울이 다가오기 전 뜨개질을 하라는 듯 내놓은 다양한 색상의 뜨개실 들, 이제 장사를 시작하는 떡볶이와 어묵을 만드는 포장마차를 보며 군침을 삼킨다.
시장 입구에 있는 오래된 내 옷가게는 어림잡아 30년 이상은 된 시멘트 건물이다. 천장을 메꾼 나무가 썩어서 공사를 해야만 도배를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관리가 안된 곳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30년 동안 단 한 번도 공사를 하지 않았던 옷가게 문을 열었다. 곰팡이 냄새 처럼 오래된 냄새가 났다. 가을 냄새로 가득했던 바깥공기를 빨리 데리고 오지 않으면 고약한 냄새는 옷에도 잔뜩 스며든다. 옷들은 좋은 냄새보다 나쁜 냄새를 흡수하길 잘한다. 나쁜 냄새는 오래된 건물이 내뿜는 방귀와도 같다. 사람 몸도 소화가 되기 위해 방귀를 내뿜어야 속이 시원한 것처럼 건물도 사람처럼 방귀를 뀌는 것 같았다. 오래 맡고 싶지 않은 꿉꿉한 냄새였다.
문을 활짝 열고 조명을 켰다. 원두커피를 내리자 옷가게는 커피 향으로 가득 찼다. 비로소 진짜 옷가게 같았다. 좋은 향 가득한 누구든 머물고 싶은 옷가게. 이어서 오늘 같은 기분에 어울릴만한 노래를 검색했다.
박정현에 편지할게요. 서영은에 가을이 오면, 윤도현에 가을 우체국 앞에서, 윤건에 갈색머리... 가을에 듣고 싶은 노래가 많다는 걸 인정하며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지난주에 사입해 놓은 카디건을 골라 옷가게 메인에 디스플레이했다. 겨자색 카디건에 검은색 정장 바지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이런 옷을 좋아하는 고객이 몇 명 되질 않는다. 주로 수협에 다니는 직장인이나 공무원 언니가 있었는데 이들이 옷을 구입하지 않으면 판매되지 않을 옷들이었다. 이런 점을 감수하고 메인에 디피하는 이유는 '다른 옷가게들보다 조금 젊은 옷을 판매하고 있다'는 일종의 판매전략이었다. 근처에는 대여섯 개의 옷가게가 있었는데 대부분 양품점 수준이었다. 게다가 다른 옷가게는 재고가 많아서 손님이 직접 계절에 맞는 옷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런 옷가게들에 비하면 내 옷가게는 깔끔 그 자체였다. 재고도 적고, 손님에게 꼭 필요한 옷만 있을 것 같은 그런 곳. 하지만 오늘은 유독 손님이 없는 날이다.
'개미새끼 한 마리 다니질 않네.'
이때다. 옆칸에서 미용일을 하고 있는 건물주인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손에는 검정봉투를 두 개 든 채로.
봉투 안에는 김밥 한 줄과 어묵 국물, 단무지가 들어있었다.
"손님 없는 것 같길래, 점심이나 같이 먹으려 했지. 지금 포도 수확철이라 그래. 이렇게 놀다가 퇴근하는 거지 뭐. 나는 할아버지 한 분 이발하고 장사 끝났어."
"그러게요. 근데 햄, 단무지밖에 안 넣었는데 김밥이 정말 맛있어요." 입속 가득 김밥을 물고 알아들을 수없는 말을 중얼댔다.
한 줄 김밥치고는 속이 편안한 점심을 먹었다. 주인아주머니는 한동안 옷가게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젊은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금 봐도 작은 체구에 큰 눈, 고운 피부였던 그녀는 과거에는 남자들이 그녀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임신을 해서 배가 불렀는데도 버스에서 내려 젊은 남자가 뒤따라 왔었다니깐. 호호호. 그래서 임신한 거 안 보이냐고 했더니, 얼굴만 보고 따라왔다고 하더라고. 그때 내가 그렇게 예뻤어."
나는 평생을 살며 그런 경험 없었기 때문에 주인아주머니 말을 들으며 탄성을 질렀다. 좋으셨겠다. 참 부럽다고 격하게 과한 표현을 보이자 이내 아주머니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근데, 시간 지나면 전부 소용없어. 늙으면 다 똑같은 걸."
.
늙는다는 것. 젊은 모습이 사라진다는 것. 나이가 든다는 것은 외적 아름다움이 사라지더라도 내면은 더욱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그녀는 몰랐다.
첫 번째 손님이 들어왔다. 단정한 옷차림을 한 그녀는 메인에 디스플레이된 겨자색 옷을 보고 들어왔다.
"카디건 좀 입어볼 수 있을까요? 색깔이 참 예쁘네요. 가을느낌도 나고..."
웨이브가 들어간 단발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겨자 색깔이 얼굴색과 잘 어울렸다.
"정장 바지 사이즈가 어떻게 되죠? 사이즈만 맞다면 한 벌로 구매하고 싶은데요."
예상치 않았던 신규 고객이 옷 한 번을 구매해갔다. 손님이 메인에 있는 옷을 가져가면 고민이 찾아온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옷을 진열하는 일은, 그녀가 우연히 이 길을 지나칠 때 "당신을 위해 준비한 옷이에요."라는 걸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아무렇게나 진열하는 옷이 아니었다.
그녀가 떠난 후 조금 편한 니트 티셔츠와 면바지를 진열했다. 어린아이 세명을 육아 중인 아기 엄마를 떠올렸다. 그녀가 꼭 우리 옷가게를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가게문을 열자 방금 먹었던 김밥의 참기름 냄새가 코끝을 스치며 바깥으로 빠져 나갔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국화꽃 냄새가 풍겼다. 바람이 가장 바쁜 계절인 가을. 누군가를 위해 꽃 냄새를 머금고 옷가게까지 찾아온 바람이 고마웠다. 일찍 가게문을 닫고 가을바람에 이끌려 참새처럼 정처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잠시 멈춘곳이 진정 내가 가보고 싶은 가을풍경이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