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장이에유 포도축제 어때유

허름한 시골 옷가게 사장입니다

by 보리똥

작은 키에 커트머리, 검은색 옷을 입은 50살 중반 정도 돼 보이는 손님이 가게문을 두드렸다.

동그란 얼굴과 큰 눈은 호기심 가득한 20대 아가씨처럼 보였다. 그녀는 가게 이곳저곳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내 옷에는 관심 없다는 듯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푹신해서 엉덩이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그래서인지 옷을 구경하는 사람보다 소파에 앉아 수다 떠는 걸 더 좋아하는 손님이 많아졌다.


이 동네에는 커피전문점이 두서너 개 있지만, 대체적으로 동네 사람들이 자주 모여있는 곳은 옷가게나 화장품 가게, 미용실 정도였다. 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왔다가 버스를 기다리거나, 수다 떨고 싶어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런 가게들은 여자들로 북적였다. 그녀 역시 수다가 필요해 보였다. 물론 나와 대화코드가 맞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옷가게 기본 수칙 중 하나는 '경청'이었다. 들어주고, 웃어주고, 공감해주는 것만큼 훌륭한 소통은 없었다. 세대가 다르더라도 사람 사는 이야기는 누구나 비슷했다. 남편과 다투거나 자식이 말을 안 듣거나,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이야기가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들어온 사소한 이야기로 대화를 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조금 달랐다. 보면 볼수록 세련되어 보이는 모습과 말투는 가정일만 하는 주부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올해 포도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데, 참여 농가도 적고, 축제코스도 뻔해서 재미없어해요. 혹시 포도축제 어떻게 생각해요?"

상대를 배려하는 존댓말과 또랑또랑한 말투는 내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글쎄요. 축제를 많이 다녀보진 않았지만 무엇보다 먹거리가 풍성했으면 좋겠어요. 축제와 관련 없는 먹거리들이 비싼 가격에 판매되는 걸 보면서 축제인지 도떼기시장에 온 건지 헷갈릴 적이 많았거든요."

"호호호. 맞아요. 많은 사람에게 농산물을 알리는 게 주목적인데, 장사꾼들 천지죠. 동네 사람들 역시 돈이 안되면 모든 걸 다 귀찮아해요. 해마다 참여 농가가 적어서 애를 먹어요. 포도 농사만 열심히 지으면 뭘 해요. 판매 증대를 위한 노력을 할 줄 알아야지. 이것 봐요. 가슴이 얼마나 답답한지 봐요. 고구마 한 개가 목구멍에 콱 걸려있는 느낌이라니까요. 컥컥."


이곳 사람들 대부분은 주로 포도농사를 짓는다. 강한 햇살과 적당하게 부는 바닷바람은 포도 살을 통통하게 살찌게 하고 당도를 높여주는 일등공신이다. 또한 다른 지역과 달리 포도알이 크고 단 맛이 강한 게 특징인데 그 비결은 바로 '포도알 솎기'에 있었다. 알이 많고 포도송이가 클수록 햇볕을 받는 부분이 적어 지기 때문에 당도가 약해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 포도는 알 수는 적지만 대신 알이 크고 당도가 높다. 타 지역 포도와 차별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농사를 짓는 입장으로써는 한 송이에 많은 포도알이 달려있어야 돈이 된다. 그럼에도 과감하게 큰 포도송이는 포기하고 송이가 작더라도 좋은 품질을 유지했다. 많은 농가들이 이 같은 노력을 한 결과 국내에서 이 지역만큼 맛있는 포도를 생산하는 지역은 없을 거라 자부한다. 나 역시 포도 하면 '땡땡 포도'가 먼저 생각나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에 젖는 듯하더니 생각났다는 듯 똘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주민참여를 위한 참여 전단지를 한 번 써줄래요? 써주면 시내 곳곳에 붙여볼까 하는데요.

아니,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 내가 백날 써도 주민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 젊은 사람이 써주면 조금 더 호소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역시 그녀는 옷가게를 괜히 찾아온 게 아니었다. 옷이 아니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있을까 기회를 엿본 것이고, 마침 포도축제에 관심이 많은 주인장을 만난 것이다. 그날부로 그녀에게 마음이 무거운 숙제를 받은 사람처럼 며칠을 고민하며 전단지를 쓰고 수정했다. 심지어 동네 이장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은 마을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농산물을 알리기 위한 노력이 달랑 종이 한 장에 달려있다면 단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나는 이장이 되었다가 전투장에서 싸우는 군인처럼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몇 올 남아있지 않은 잔머리를 굴려가며 일주일 만에 전단지를 완성했다. 잔머리 한 올이 종이장처럼 힘없이 뽑혀 허공을 날아다녔다.


"오, 완벽해요. 옷가게 사장하지 말고, 전단지 사업해도 되겠는데요. 호호호. 고마워요. 고생해준 대가로 포도축제에 초대할게요. 잔치국수와 떡도 있고 공짜 먹거리가 많으니 꼭 와서 참여해줘요. 축제가 잘 끝나면 옷가게 사장 공이 크니 내가 아줌마들한테 옷가게 소문 내놓을게요."


그녀는 만족한 듯 웃음 띈 얼굴로 가게를 나갔다. 밝고 경쾌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가 나간 후 한동안 가게는 정적이 흘렀다. 농사철이라 거리에도 인적이 없었다. 다만 고추잠자리 떼가 놀이터를 찾기 위해 날갯짓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가로운 오후 시간이었다. 파란 구름도 덩실덩실 엉덩이를 흔들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30대, 미혼인 나는 평생 꿈꾸던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차가워진 원두커피가 쓴 맛이 났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인생 상담도 하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내가 진정 꿈꿔온 삶일까 고민해본다. 직장다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시작한 옷가게가 돈보다는 인간관계를 위한 수단이 되어가고 있었다. 매출이 없어도 누군가와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고, 따듯한 차 한 잔을 하며 고민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게 나쁘지 않았다. 당장 동대문에 가야 할 돈도 필요하고 월세도 내야 할 때가 찾아오는데, 낙천적인 옷가게 사장은 오늘도 그렇게 열쇠 문을 잠근다. 가던 길을 뒤돌아서며 가게에게 찡긋 인사를 건넨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나아지겠지.'

그녀만큼 경쾌한 발소리가 기분 좋게 들린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