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내 새끼, 밥 먹었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내가 밥을 먹었는지, 뭐 하고 놀았는지 늘 궁금하다. 분명 어제저녁에도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새 잊은 건지 오늘도 같은 말을 했다. 나는 할머니가 밥을 먹었는지 무슨 놀이를 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어린아이니까, 어른들 세계를 이해하는 게 힘든 나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를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 할머니 댁에 놀러 갔을 때마다 그들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쉿, 이건 나만 아는 비밀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계절 사랑이야기를 들려줄까.
할아버지 댁은 빨간색 벽돌로 만든 집이다. 집 주변에는 작은 밭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하얀 강아지(방울이)가 살고 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꽃들이 집 주변에 가득한데, 이것들은 풀과 함께 섞여서 어떤 게 꽃인지 풀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따뜻한 봄이 찾아오면 주위에는 매화꽃이 지천이다. 나처럼 작은 키로 자라는 개복숭아 꽃도 예쁘게 피었다. 곳곳에는 초록색을 띈 '쑥'이라는 게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할머니는 쑥을 따서 소쿠리에 담았다. 할머니가 쑥을 똑똑 따는 게 신기해서 함께 쑥을 따 봤다. 어린 나이에 쑥은 보송보송 하얀 솜털이 가득 붙어있었다. 녀석, 나이도 어린데 벌써부터 털이 나다니. 사람은 어른이 되어야 털이 난다고 들었는데 쑥은 태어나자마자 생긴셈이다.
"아가, 이게 쑥이라는 풀인데, 냄새 한번 맡아봐라. 쑥 냄새가 참 좋지?"
"웩, 할미 이거 약이에요?"
"몸에 좋으니까 약이 될 수도 있지. 근데 이걸로 우리 아기가 좋아하는 떡도 만든다."
할머니는 수돗가에서 쑥을 깨끗하게 씻은 후 소쿠리에 올려 물기를 뺐다. 시들었던 쑥들이 물을 만나자 뿌리를 만난 듯 다시 봉긋봉긋 피어났다. 처음보다 더 많아진 쑥을 뜨거운 물에 삶았다. 하얀 쌀가루라는 걸 쑥과 함께 섞어서 동그랗고 납작하게 반죽을 했다. 때로는 내가 좋아하는 꽈배기 모양과 포도송이를 만들기도 했다. 할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찜통 안에 반죽을 넣었다. 시간이 지나 떡이 반질반질 고운 얼굴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내가 만든 떡부터 먼저 꺼냈다. 초록색 꽈배기는 더 배배 꼬아져 있었고, 포도송이는 탐스럽게 익었다. 할머니가 만든 떡은 둥글 납작한게 내 얼굴을 닮았다.
"옜다! 너희들이 만든 개떡!"
"할미 이건 개떡이 아니라 꽈배기 떡이랑 포도떡이에요."
"이게 진짜 이름이 개떡이란다. "
"으아앙, 할미 나는 이 떡 방울이(하얀 강아지) 안 줄 거란 말이야."
나에 쑥떡 이야기는 이렇게 개떡이 아닌 떡으로 마무리 되었다. 떡은 쑥에 붙어있던 털은 온데간데없고 풀향기가 나면서 쫄깃쫄깃 맛있었다. 내가 먹는 모습을 방울이가 애처롭게 쳐다보길래 한 입 잘라주었더니 입을 앙 벌린 채 잘도 받아먹는다. 누가 개떡 아니랄까 봐. 흥!
봄이 지나 햇볕 쨍쨍한 여름이 찾아왔다. 할머니네 여름은 빨간 벽돌을 빼고 모든 게 초록색으로 변해있었다.
고추나무, 들깨, 옥수수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단단한 고추는 매섭게 생겼고, 들깻잎은 그새 내 얼굴만큼 자라 있었다. 옥수수는 신기하게 젊을 적에는 하얀 머리카락이었다가 나이가 들면서 갈색으로 변한다고 했다. 어른들은 나이가 들면서 검은색 머리가 하얀색 머리로 변한다고 했는데, 옥수수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가 보다. 나는 고추와 들깨보다 옥수수가 좋다. 알알이 박힌 작은 진주구슬은 탱글탱글 윤기가 흘렀다. 할머니는 내가 집에 가자마자 미리 따놓은 옥수수를 찌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할미가 내 새끼들 주려고 옥수수 다듬고 있지. 이것들이 모두 찰옥수수인데, 얼마나 맛있다고."
"찰? 할미 찰이 뭐야?"
"딱딱하고 뾰족한 철은 아는데, 찰은 모르겠어."
"찰옥수수는 찹쌀밥처럼 맛있다는 거지."
"그럼 찹쌀밥은 뭐야? 하얀 밥이야?"
"그럼! 하얀 밥이지. 보슬보슬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밥 같은 거야."
"우와! 맛있겠다. 할미 빨리빨리 만들어줘."
옥수수가 익어가는지 냄비는 뽀얀 연기를 뿜어냈고, 집안은 어느새 온통 옥수수 냄새로 가득했다. 할머니는 잘 익은 옥수수를 그릇에 담아왔고, 그중 가장 크고 잘생긴 옥수수를 내게 건넸다. 옥수수 한 알을 뽑아 입에 넣으니 무언가 톡 터지는 느낌이 나다가 하얀 밥처럼 쫄깃쫄깃하게 씹혔다. 할머니는 내 입에 옥수수 한 알이 들어갈 때 미소 한 번을, 옥수수 두 알이 들어갈 때 두 번 미소를 지었다. 옥수수를 많이 먹을수록 할머니는 큰 소리로 웃었다. 할머니네 집은 옥수수로 만든 웃음 공장이다. 벌써 두 개째 옥수수를 먹는 중인데 배가 부르다. 꺼억! 잘 먹었다.
더운 8월이 지나 가을이 찾아왔다. 크고 작은 낙엽들은 할머니 마당에서 빙그르르 돌더니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낙엽이 떨어진 가지 끝에 주황색 탐스러운 열매가 달려있었다.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많이도 열렸다. 참새들이 소풍을 나온 듯 가지마다 매달려 있었다. 분명 맛있게 생긴 열매를 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길고 긴 막대기에 양파 주머니를 매달아 이것들을 하나 둘 따기 시작했다.
"이건 감나무란다. 빨리 따지 않으면 참새가 다 먹어버린다."
"하부지, 정말 맛있겠다."
감은 딱딱한 것도 있었고, 물컹물컹한 것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작은 칼로 껍질을 깐 뒤 작게 조각을 내어 내게 건넸다. 아삭아삭 씹히는 달콤한 맛이 마치 솜사탕을 발라놓은 것 같았다. 이렇게 맛있는 감을 참새들이 탐내는 게 당연했다.
"하부지, 솜사탕 감 참새들도 먹게 몇 개만 남겨놔요."
"내 새끼 착하기도 하지. 그럴 줄 알고 맨 꼭대기에 매달려있는 건 그대로 두었단다. 허허허."
국화꽃이 잔뜩 핀 가을이 지나 추운 겨울이 찾아왔다. 빨간 벽돌집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할머니는 신기하게 생긴 양말을 신고 있었다. 발가락에 봉긋 솟아있는 양말이었다. 나는 양말이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건 버선이라는 거야. 얼마나 따뜻하다고. 할미가 우리 아기한테 버선 양말 하나 만들어줄까?"
"에이, 버선 양말 신는 친구들이 어딨어."
할머니는 버선발로 어디론가 나가더니 그릇에 자줏빛 고구마를 잔뜩 들고 왔다. 울퉁불퉁, 동글동글, 모양도 제각각인 고구마는 어떤 맛일까? 껍질을 벗기면 분명 고구마 속도 빨간색일 것이다. 할머니는 뜨끈한 고구마를 쟁반에 담아왔다. 고구마 꼭지를 따고 껍질을 벗겼더니 웬걸, 고구마 속은 노란 병아리 색깔이었다. 고구마 한입 먹으니 달큼하고 보들보들하게 씹혔다. 두 입 크게 먹으니 목구멍이 막혔다. 어른들은 고구마에 동치미를 함께 먹으면 소화가 잘 돼서 좋다고 했다.이럴 때 동치미 한 입 먹었더니 정말 목구멍을 가로 막고있던 고구마가 뻥 뚫렸다. 살얼음이 떠있는 동치미는 시원한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이었다.
내가 고구마를 열심히 먹고 있는 사이에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 내리는 모습을 본 방울이는 기분이 좋은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작은 눈 뭉치를 바닥에 굴리고 굴려 커다란 눈 뭉치 두 개를 만들었다. 두 개를 위아래로 합치니 멋진 눈사람이 되었다. 나뭇가지를 주워 팔과 눈 코 입을 붙여주었다.
손에 끼고 있던 젖은 장갑을 눈 사람 손에 매달아 주었다. 진짜 사람 같은 눈사람이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고 있는 빨간 벽돌집 이곳은 사계절이 마술처럼 퐁퐁 피어나는 곳이다.
내가 이분들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름도 이상한 개떡과 옥수수, 주황 색감, 빨간 고구마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풍성한 곡식을 먹이기위해 봄부터 겨울까지 쉴틈이 없었다. 곡식 키가 커가는 만큼 내 키도 쑥쑥 자란다. 펑펑 눈 내리는 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마중나왔다. 나는 달려가 두 팔로 힘껏 안았고 이내 눈송이같은 온기가 가슴속을 파고들었다.